일시: 5월 31일(화)

마신 양: 소주 두병여...


지난번에 “앞으로는 진짜 못마신다”고 쓴 적이 있다.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술을 마셔버렸다. 물론 부끄럽다. 마신 이유를 대자면 이렇다. 지도학생이 원샷잔을 선물했다. 원뿔 모양으로 되어 잔을 받고 바닥에 내려놓을 수가 없는, 그래서 원샷을 하고 엎어 놓아야만 하는 그런 잔. 그 잔을 술자리에서 써먹기 위해 가지고 다녔다. 어제가 마침 5월의 마지막 날이고 해서 그 잔으로 술을 마셨다.


다음날인 오늘, 고무 패킹해 놓은 게 다 떨어졌고, 입이 무지하게 아팠다. 치과에서 준 아이스 팩을 볼에 대고 있으려고 냉동실을 열었다. 없다. 엄마에게 여쭤봤다.

“아, 그게 그거냐? 지난번 냉장고 청소할 때 버렸다. 난 그냥 얼음 주머닌 줄 알고”

갑자기 입이 더 아파왔다.


실험용 쥐에게 기생충을 먹인 적이 있다. 모교에서 뱀과 물고기를 잡아 기생충을 고른 뒤 튜브에 담고, 생존력을 늘리기 위해 스티로폴 박스에 얼음을 넣은 뒤 기생충을 넣었다. 학교로 가서 기생충을 먹인 뒤 빈 상자를 집 마루에다 놔뒀다. 모교에 돌려주려고. 간만에 일을 한 뿌듯함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 다음날, 상자를 찾으니 없다. 어디 갔을까? 엄마의 말씀, “아, 그거? 상자가 더러워서 버렸다”

아니 그 상자를 버리다니. 다른 건 몰라도 그 상자에는 쥐에게 먹이기 위한 주사바늘-말이 주사바늘이지 끝이 동그랗고 금속으로 된...-이 있었는데, 미국에서 사온 시가 몇만원짜리 기구다. 돈도 돈이지만 구할 수도 없는 그런 건데 그걸 버리다니. 엄마는 상자 속도 안열어보고 버렸단 말인가?


황급히 밖에 나가 봤다. 정말 다행하게도 그 상자가 우리 옆의옆집 앞에 팽개쳐져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했더니 이상이 없었다. 해피엔딩이지만, 청소차가 와서 가져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에게는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글 쓸 소재를 잔뜩 적어놓은 종이 쪼가리같이 내겐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에겐 쓰레기로 보이는 것들. 그런 것들은 대개 청소할 때 버려지는 운명에 처하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당사자는 왜 청소를 했냐면서 버린 사람을 원망한다. 하지만 청소라는 게 원래 쓸모없는 것을 버리는 것, 그런 식이면 청소 자체가 불가능하다. 소중한 거라면 내팽개칠 게 아니라 잘 둬야 하지만, 내 딴에 잘 둔다는 게 소파 위, 현관 앞-출근길에 잊지 않기 위해-등 별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곳. 그래서 난 지금도 엄마랑 “그거 왜 버렸냐”며 실랑이를 벌인다. 하도 그러니까 지금은 내 물건으로 보이면 종이 한 장도 허투루 안버리려 하시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따금씩 핀트가 안맞아 내 걸 버리는 적이 있다. 이게 속상하면 내가 청소를 하면 될텐데, 그러기 싫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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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6-0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저는 생전 안치우다가 엄마가 제방 구석에 숨겨놓은 돈 삼백만원 가방을 휘까닥 버린 적이 있답니다. 백날 가도 청소 안하던 ㄴㄴ이 어쩌구 하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기억이....... 엄마는 쓰레기장을 하루종일 뒤지셨지요. 결국 찾긴 했지만^^ 그러게 그걸 왜 거기다 두시냐구욧!

인터라겐 2005-06-0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원샷잔 어떤건지 궁금해요...반샷을 허용하지 않는 제게 딱 필요한거같아요..ㅎㅎㅎ 얄팍하게 저는 완샷을 하는지 감시한다고 하면서 상대방이 완샷에 목숨걸적에 전 슬그머니 잔을 내려놓지만... 술자리에서 꺽어 마시면 재미없어 보여요..저는요..

인터라겐 2005-06-01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사탕님 삼백이요? 허거덕... 예전에 울 엄니가 반지를 휴지에 싸놓으셨는데 언니가 청소하다 버려서 결국 언니가 새로 사드렸잖아요...ㅎㅎㅎ 그런데 삼백은 정말 엄청나네요...

야클 2005-06-0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샷잔이 궁금하네용. 사진 좀 보여주세요~ 카메라폰 사진이라도. ^^

클리오 2005-06-0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번에 통증이 심하신 것 같아, 정말로 다시는 술 안드실 줄 알았었는데... ^^;;

마태우스 2005-06-0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지금도 아파 죽겠어요. 흑. 술 카운트 60 돌파, 책은 아직도 58.
야클님/사진 찍어서 지인엑 보냈습니다. 아마도.... 오늘 저녁엔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인터라겐님/그럼요 원샷잔 아주 멋있습니다. 술맛도 더 나구요.... 가지고다니면서 먹으니까 좀 이상하게 보는 분도 계신데.... 하여간.
별사탕님/사, 삼백만원...다시 찾으셔서 다행입니다. 그죠, 일단 둔 사람의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저도 그걸 망각하고 엄마한테 화를 내지요...
쥴님/술일기란 술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을 담고 있습니다. 술을 안먹었으면 아이스팩을 찾지 않았을테고, 이 글도 없었겠죠^^

플라시보 2005-06-0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는 혼자 살아서 누가 버리는 일은 없지만 대신 머릿속을 허옇게 비운 내가 청소하다가 중요한 종이 같은걸 버리는 불상사는 왕왕 발생합니다. 앞으로는 중요한 물건이면 방에 두세요. 그리고 미리 말씀하세요. '엄마 내 방은 내가 치울테니 절대로 치우지 마세요' 흐흐.

moonnight 2005-06-0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또 술을 드시다니요.. ㅠㅠ 그나저나 원샷잔 궁금하네요. ^^; 저도 무조건 한 잔인지라.. 가지고 싶어집니다. 호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