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가 4월 19일이어서 4.19 얘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쓰고 오늘 씁니다. 쓰다보니 전에 썼던 얘기를 재탕한 것 같네요.
어느 책에 의하면 4.19 당시 대학생들의 활약은 별로 없었으며, 대학생들은 대세가 결정된 이후에야 거리로 나섰다고 한다. 고 김주열의 죽음에 분노해 시위를 벌인 사람들은 대개가 일반 시민이었고, 대학생보다 고교생들이 먼저 시위에 참여했단다. 그렇긴 해도 4월 19일 당일에는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는데, 그때 서울의대 도서관에는 세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도 오래 전에 들은 얘기라 나머지 두분의 이름은 까먹었고, 또 한분의 이름은 그분-알파라고 하자-이 맞는지 의심스럽지만, 내 기억이 맞다고 치자. 알파는 수석으로 대학에 들어왔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서울대병원에서 오랜 기간 재직하면서 명의로서 이름을 날렸다.
아무리 공부가 좋아도 그렇지, 밖에서 그 난리를 치는데 어떻게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가 있을까.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으면서 “혹시 무슨 일 안나나?”만 바랐던 나와는 많이 틀린 분이다. 그런 자세가 있었으니 명의가 되셨을 테고, 알파로 인해 생명을 건진 환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알파는 그때 이런 생각이셨을 거다. ‘사회정의, 민주주의, 다 좋다. 하지만 올바른 의사는 병에 대해 많이 알고, 환자를 잘 고치는 의사다’
1987년 6월,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6월 10일 이후, 서울 시내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다. 그 파장은 우리 학교에까지 미쳤다. 조별로 흩어져서 실습을 도는 3, 4학년은 제외하고, 1, 2학년에서 수업 거부를 할 것인가 투표가 벌어졌다. 투표결과 2학년은 수업을 계속 받기로 했다. 그럼 우리 학년은? 단합 잘되고, 2학년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었던 우리 학년의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찬성이 160명, 반대가 38명이었다. 그리고 그 38명 가운데는 내 한표도 있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반대를 했을까. 아마도 그때의 난 의사의 본분은 거리로 나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하얀 실험복을 입은 우리는 교문 앞에 앉아 처음으로 시위라는 걸 해보게 되었고, 우리도 드디어 무엇인가를 한다는 뿌듯함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수업거부를 결정한 게 6월 18일인가 그랬는데, 사흘째 되는 20일날 학교에서는 방학을 때려 버린 거다. 수업도 많이 남았고, 시험도 안봤는데.
버티기로 일관한 이승만과 달리 전두환은 6.29 선언이라는 걸 발표했고, 모였던 시민들은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다. 방학 중에 기말고사가 시행되었고, 학기 중 치르는 시험처럼 난 조지고 말았다. 우리는 그때 폐와 복부를 배우지 않았었는데, 그건 두고두고 우리에게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때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우리는 그해 말 대선을 앞두고 “대선을 위해 시험을 거부하자”는 말도 안되는 제안을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고-이때도 난 반대표를 던졌다-전에 그랬듯이 방학 때 시험을 쳤다. 학교측이 강행한 시험을 우리는 또다시 거부했고, 그 시험에 들어간 사람과 안들어간 사람간의 갈등은 오랜 기간 우리를 괴롭혔다.
생각해 본다.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명의가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이라고 해서, 죄도 없는 대학생을 고문해서 죽이는 정권의 행태를 모른 척 하는 게 올바른 일일까. 그렇다고 허구한 날 시위만 하다가 무식해진 머리로 환자를 오진하는 게 옳은 걸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6월 항쟁 덕분에 절차적 민주정권이 들어섰고, 지금 의대생들은 그런 고민 없이 학교를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