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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 - 반 룬 전집 2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월
평점 :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는 정말 짧았다. 그나마 책의 절반이 썩 잘 그리지 못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어, 30분도 채 안걸려서 읽었던 것 같다. 원래 나는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을 싫어한다. <파란 날의 책>같은 걸 읽고나서 “한권 읽었다”고 카운트를 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고, 들인 돈에 비해 어마어마한 깨달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 이 책은 인간의 사회가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래서 코끼리들이 사는 사회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걸 알기 위해 1만원 가까운 돈을 들였다는 게 솔직히 배아프다. 그럼 왜 샀냐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짧은 책이 아니듯, ‘코끼리에 관한 짧은 우화’도 짧은 게 아닐 것이라는 생각, 더 중요한 이유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반 룬에 대한 자자한 명성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사게 만들었다.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라면 한번 정도는 경험해 본 뒤에 판단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그런데 이게 뭐람? 내공이 높은 분들은 이 책에서 그 어떤 카타르시스나 촌철살인의 유머를 발견하기도 하겠지만, 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코끼리 사진이나 잔뜩 있었으면 덜 속상하련만.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돈을 들였다면 최소한 세시간 이상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책이라야 돈이 아깝지 않다. 얼마 전에 읽은 <세상종말 전쟁>처럼 온 정신을 집중하고 치열하게 싸운 뒤에야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나는 좋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처럼 짧지만 읽는 내내 포복절도하고,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께”라고 다른 친구에게 전화할 수 있는 책을 원한다 (‘세상은...’은 독자에 따라서 이견이 많다. 황당한 유머를 싫어한다면 고르는 데 신중해야 한다). 내가 <향수>를 제외한 쥐스킨트의 책에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이유도, 바나나를 비롯한 일본 양장본들을 거의 사지 않는 이유 역시 그 책들이 짧기 때문이다. 나는 긴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