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10일, 밀크라는 영리한 개로부터 여러 마리의 강아지들이 태어났다.
하나둘씩 자기 아이들이 없어지는 게 신경이 쓰였던 밀크는
옥션에 뜬 강아지 사진을 보고 찾아간 아내를 무척이나 경계했다.
그 중의 하나인 이 녀석 (훗날 예삐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역시 그리 기분이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낯선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형제자매들이 없어지는 마당에
또 낯선 여인이 나타났으니까.
그래서 예삐는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녀석이 심통을 내봤자 귀엽기밖에 더하겠는가?
아내와 동행했던 친구는 예삐를 보자마자 대번에 이렇게 말했단다.
"예쁘다."

밥그릇보다도 작은 이 녀석에게 아내는 "엄마 젖 좀 더 먹고 와라"며 계약금 5만원을 건내고 집으로 온다.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누가 봐도 최상의 미모를 가진 녀석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계약금 내가 물어줄테니 나한테 넘기라"라고 했다면
우린 하마터면 예삐 구경도 못할 뻔했다.
서로에게 다행스럽게도 예삐는 무사히 우리 가족이 됐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예삐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예삐도 나중에 깨달았겠지만, 예삐가 몸을 의탁한 곳은 '강아지계의 삼성가'였다.
강아지를 위해서라면 전세금을 모두 털어넣을 수 있고,
필요하다면 간이식도 해줄 수 있는 엄마아빠가 있었으니까.
둘 중 하나라도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개한테 뭐하러 그런 비싼 치료를 해주냐"라든지
"왜 강아지만 돌보냐. 난 개만도 못하냐?"같은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우리 부부는 개를 예뻐하기로는 상위 1%에 들어갈 만한 부부였기에,
인공심박기를 달아줄 때도, 한달 약값이 수십만원이 들어갈 때도,
그것 때문에 우리 부부가 예삐를 원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삐가 있던 4년 7개월은 우리 부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지나고 나니까 하는 말이 아니라,
그 순간을 살아내는 동안에도 우리 부부는 늘 그렇게 얘기했다.
재롱은 있는대로 다 부리는 예삐 덕분에 우리 부부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지러졌고,
직장에서 전화통화를 해도 늘 예삐 얘기만 해댔다.
그 덕분에 아내가 결혼 때 데리고 온 뽀삐는 다소 찬밥 신세였지만,
수완이 좋았던 예삐 덕분에 뽀삐도 먹을 걸 많이 얻어먹었으니
예삐의 존재가 그렇게 손해나는 일만은 아니었으리라.

"어떻게 저런 개가 있을까?"
우리 부부가 수도 없이 했던 말이다.
영리하면서도 이기적이지 않고, 장난꾸러기이면서도 얌전해야 할 땐 얌전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예삐의 존재는 우리 부부의 자랑이었다.
거기에 얼굴까지 예쁘니, 어찌 넋을 잃지 않겠는가?

언젠가 천안에서 있었던 달리기 대회에서 예삐는 20여마리의 개들 중 1등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운동을 시킨 결과이기도 하지만,
인공심박기를 달고 일군 성과라 더더욱 뿌듯했다.
유일하게 약한 게 심장인데 거기다 기계를 달아줬으니,
앞으로 이십년간 예삐와 더불어 즐겁게 사는 일만 남았다 싶었다.
그러던 2012년 초, 예삐에게 발작이 찾아왔다.
몇분 동안 거품을 흘리며 발작을 하는 예삐를 보는 건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다.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을 쓴 덕분에 증세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스테로이드는 예삐의 외모 뿐 아니라 건강이 나빠지는 원인이 됐다.
2012년 8월 16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
건강이 좋아진 듯 간만의 재롱을 보여준 예삐 덕분에 기분 좋게 학교에 갔던 그날,
아내에게서 예삐가 또 발작을 한다고, 지금 병원에 가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 다음 전화에서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예삐 이제 보내야 할 것 같아."

예삐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예삐다.
사람들은 말한다. 다른 개 입양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들은 모른다. 예삐를 대신할 수 있는 개는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가끔은 생각한다. 예삐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천사가 아니었을지를.
위 사진처럼 납작 엎드려 뽀삐에게 장난을 거는 그런 강아지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정말이지 예삐는 우리 부부가 평생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누구나 자기 개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지만,
예삐와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예삐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가는 다른 개주인들에게 위로를 표했다.
2013년 오늘은, 원래대로라면 예삐의 여섯번째 생일 파티를 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작년 8월 이후 예삐의 시간이 정지해 버린 탓에,
우리 부부는 초 다섯개를 꽂아놓고 주인공 없는 파티를 열었다.

사람이 다 그렇겠지만,
특별한 날이다보니 예삐 생각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간절하다.
"한번만 더 안아봤으면 좋겠다"고 아내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오늘만큼 그 말에 공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예삐가 그리 빨리 우리 곁을 떠날지 몰랐다.
이때는 얼마나 행복했던 순간이었는지,다시 이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 부부에겐 그닥 필요없는 말이다.
아내와 나 둘 다 예삐에게 더 이상 할 수 없을만큼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같이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라면,
한 5년쯤 더 살았다면, 그때 이별했다면 지금만큼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의 슬픔이 지금보다 몇배 더 클지라도,
아내와 난 예삐가 더 살아있기를 바랐을 거라는 거다.

지금 아내와 난 하느님을 부러워한다.
하느님은 예삐의 재롱을 마음껏 즐기고 계실 것 같아서.
내로라는 개들이 하느님 주위에 많겠지만,
예삐가 제일 귀여움을 받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예쁘고 머리좋으면 누구나 좋아하기 마련인데, 하느님이라고 다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