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든 동물이든 운명이란 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그 선택마저 운명이라고 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본과 1학년 때, 토끼 한 마리가 내가 있는 실험실로 뛰어들어왔다.

세균 주사를 놓으려고 옆구리의 털을 깎아놓은 토끼가.

이상하게 그땐 그 토끼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 토끼를 안고 차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집까지 갔다.

토끼는 그렇게 몇 달간 우리집에 살았다.

먹을 걸 주니까 나만 보면 반가워서 뛰어오는 게 귀여웠지만,

똥을 어찌나 많이 싸는지, 심난하기도 했다.

그 토끼는 당시 우리집의 독재자셨던 아버지에게 걸렸고,

결국 집근처 시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아마 그날 죽었을 것이다)

그때 결심했다. 힘을 기르자고.

토끼 한 마리 정도는 나 스스로 키울 수 있을 정도로.

 

작년부터 모 방송사와 기생충 다큐를 찍고 있다.

촬영이 거의 막바지에 달한 오늘,

거기서 고양이 한 마리를 가져왔다.

톡소포자충에 걸린 쥐가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는데,

길거리에 있다가 유기견보호소에 들어간 녀석이란다.

고양이는 야생답지 않게 작고 온순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처음 본 내 무릎에 올라오려고까지 한다.

“촬영이 끝나면 고양이는 어떻게 되나요?”

내 물음에 피디가 대답한다.

“다시 거리로 방생해 주죠.”

방생, 말이 방생이지 이건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으로,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아 헤매는 삶으로 내몰리는 거다.

성격으로 보아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 같은데,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교수님이 그냥 키우시죠”

집에 개가 있어서 고양이를 키울 수는 없고,

그냥 연구실에서 키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허락을 구했고, 그 뒤 잠시 짬을 내서 고양이 용품을 사러 다녔다.

내가 ‘톡소’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 고양이는

며칠 전에는 춥디추운 서울 바닥에서 살았고,

오늘 아침에도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보호소의 철장 안에서 눈을 떴지만,

지금은 내가 만들어 놓은, 담요가 깔린 상자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비교적 괜찮은 사료와 고급 모래가 깔린 화장실까지 겸비한 이곳에서.

게다가 이틀 후면 인터넷에서 주문한 이층짜리 집이 도착한단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한 치 앞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길거리의 고양이가 됐다가

비교적 사랑받는 연구실의 고양이가 될 수도 있으니,

운명을 만드는 힘은 사람에게 더 있는 것 같다.

물론 고양이를 기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20년간 여기서 근무할 수 있게 됐다지만,

학교에 고양이가 있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을 테니까 (청소 아주머니도?)

되도록 그분들 눈에 안띠게 하면서 한번 잘 키워 볼 생각이다.

잘 자렴, 톡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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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1-08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쁜 치즈냥이! 제가 개랑 고양이랑 키웠잖아요. 개, 고양이 같이 키우는 사람들 많아요. 연구실 고양이도 멋지구요. 제 로망이 꽃집 고양이.인데, 지금은 형편이 안 되고, 나중에 멋진 샵 내서 나가면, 꼭꼭 데리고 다닐꺼에요. ^^

고양이, 모래, 화장실, 사료, 캔(고양이는 개랑 많이 틀려요. 병도 많구요. 신장이 약해서, 물.이 되게 중요한데요, 물 잘 안 먹어서, 캔 함께 먹이는 경우 많아요) 저는 www.catrep.co.kr 여기서 주로 주문한답니다. 알뜰로 묶어서 저렴하게 파는 아이템들 많아요.

화장실에서 감자와 맛동산을 캘 때 쓰는 스뎅삽도 사면 좋아요. 두고두고 쓰는건데, 플라스틱 샵하고는 차원이 틀리죠. ㅎㅎ


마태우스 2013-01-08 20:26   좋아요 0 | URL
아 갈색 고양이를 치즈냥이라고 하는 모양이군요 모래도 사고 사료도 샀는데, 사료 잘 먹고 대소변을 모래에다 예쁘게 보더군요. 어려운 일 있음 문의드리겠습니다. 참고로...방송국 사람들이 목욕 깨끗이 시켜주고 드라이기로 말려줬답니다.

Mephistopheles 2013-01-08 21:17   좋아요 0 | URL
내...내..내..낸시..랭..? =3=3=3=3

2013-01-08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8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13-01-08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트위터에서 고양이 사진을 많이 보게 되는데 예쁘단 생각을 자주 했어요. 톡소도 예쁜 걸요. 사랑받으며 더 예뻐질 것 같아요. 굿나잇, 톡소야~

마태우스 2013-01-08 21:2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애교도 짱이어요. 톡소란 이름을 가진 거의유일한 고양이일 듯...^^

Mephistopheles 2013-01-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여직원이 사무실 앞 세탁소에 잠시 위탁하고 있던 새끼 고등어태비 길냥이가 있었는데.. 그걸 데리고 와 키웠지요. 근황을 물어보니...고양이가 아니라 돼지라고 하더군요.

마태우스 2013-01-08 21:21   좋아요 0 | URL
음, 고양이는 음식조절 잘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군요....조심해야겠네요. 전 너무 많이 먹이는 게 문제...

순오기 2013-01-0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인사가 늦었습니다~~~
새 식구를 맞이하여 더욱 행복한 새해가 될 듯하네요.
늘 즐거움을 주는 마태님의 2013년도 승승장구하기를...^^

마태우스 2013-01-09 11:22   좋아요 0 | URL
어머나 순오기님, 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도 님의 화려한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사실 제가 올해부터 마음을 좀 굳게 먹고 알라딘을 하고 있답니다^^

울보 2013-01-0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가. 정말키우고 싶어하는 고양이인데. 엄마가 겁쟁이라 외할머니댁에 가서만. 만나는데 ....이쁘네요

마태우스 2013-01-09 11:23   좋아요 0 | URL
동물을 기르려면 큰 책임이 따르더라고요. 울보님이 싫으시면 안키우시는 게 좋습니다

다락방 2013-01-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 진짜 특이한데요!! 마태우스님 말씀처럼 운명을 만드는 힘이 사람에게 더 있는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람은 그 힘을 지혜롭게 잘 써야겠죠. 써야할 곳에 말이죠. 아, 마태우스님 참 좋으네요. 훗.

마태우스 2013-01-09 11:24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근데 고양이가 혼자서 잘 논다는 것만 믿고 덜컥 입양(한셈이죠?)했는데, 얘가 정에 굶주려서 그런지 엄청 귀찮게 하네요. 컴퓨터 파일을 하나 날리기까지 했다는...

Kir 2013-01-09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양이처럼 예쁜 페이퍼네요, 고양이 키우는 게 비용도 비용이지만 신경써야할 게 많다고 들었는데... 마태우스님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
고양이를 만지는 건 겁나지만 예쁘긴 정말정말 예쁘군요^^

마태우스 2013-01-10 21:54   좋아요 0 | URL
네... 벌써 저랑 정이 들었답니다. 예쁘게 잘 키울게요. 집에서 같이 있지 못해주는 게 미안하지만, 학교 있을 땐 최선을 다해 돌보겠습니다

무스탕 2013-01-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초부터 좋은일 하시네요.
톡소 이쁘게 키워주시고(마치 제가 기르던 냥을 부탁드리는 기분으로^^) 종종 소식 전해주세요.
새해 복 그득그득 받으시구요~ :D

마태우스 2013-01-10 21:55   좋아요 0 | URL
네...종종 소식 전할게요. 무스탕님, 작년에도 그랬고 그 전에도 늘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하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