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1월 20일(토)


누구랑: 친구랑...


마신 양: 소주 두병...


1. 화려한 고희연


지난 토요일, 큰어머니의 고희연이 코리아나 호텔에서 있었다. 그 잔치가 최근 보기드문 화려한 고희연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코리아나 호텔이 특급이어서도 아니고, 음식이 맛있어서도 아니다. 그건 바로 거기 출연했던 몇몇 연예인들 덕분이었다. 물론 장나라같이 한창 주가를 올리는 연예인이 나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을 대면 “아! 그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었다.




-사회는 이경래가 봤다. 유머일번지 등에 나왔던 이경래는 지금 술집을 하고 있는데, 그 술집에 드나들던 사촌형과 친분을 쌓게 되면서 사회로 나섰다. 일반인은 아무리 사회를 잘봐도 연예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날 재확인했다.


-황마담이 나왔다.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카메라폰의 플래쉬를 수없이 터뜨렸는데, 황마담은 여자 목소리를 몇 번 내더니 노래 두곡을 부르고 사라졌다.


-조미미? 이름은 모르겠지만, 옛날에 활동했던 <와일드캐츠>의 리드싱어가 나왔다.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텐데 젊어 보였고, 히트곡이었던 <마음 약해서> <십오야> 외에 정체불명의 노래 하나를 더 하고 갔다.


-김상배가 왔다. 이름은 몰랐지만 “제 노래 하겠습니다”며 <몇미터 앞에 두고>를 부를 때, 다들 “아, 저사람!” 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랬지만, 김상배 역시 출연료 값은 충분히 하고 사라졌다.


-개그우먼 김지선이 왔다. “개그맨들은 팔방미인”이라는 이경래의 말처럼 노래도 어쩜 그리 잘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른 연예인들은 노래 세곡을 하고 사라진 반면, 이경래는, 이제는 한물 가서 그런지 몰라도, 밤 9시 반까지 사람들의 여흥을 돕다가 갔다.




2. 큰어머님네


우리가 서울서 살 때, 큰아버지네는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사촌형은 그래서 “그때 너희집 가면 시골쥐가 서울 온 기분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는데, 부족한 거 없이 자란 우리에 비해 그 집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거다. 내가 고 1 때인가 큰아버님이 간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황마담은 큰어머님을 보고 “고희 맞아요? 에이, 한 50 되지 않았어?”라고 했고, 김지선은 “고희라니 말도 안돼! 아들들 뭐해? 새로 결혼시켜 드려야지!”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큰어머님의 얼굴에는 고생을 하신 티가 너무도 역력하며, 불과 다섯 살 아래인 우리 어머님에 비해 십오년은 더 늙어 보이신다.




하지만 큰어머님은 자식들을 워낙 잘 키우셨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아들 둘과 딸들의 효성이 지극하기가 이를 데 없는 것. 특히 가운데 ‘효’가 들어가는 작은형은 그 이름값에 걸맞는 효자셨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작은형은 사업에서도 성공, 지금은 준재벌이 되어 있는데, 그 덕에 큰어머님은 커다란 아파트 두채의 소유자가 되었다. 우리 엄마는 거의 못가본 해외여행을 해마다 가시는 등 말년의 영화를 누리고 있는 중인데, 얼마 전 있던 고희연은 바로 그 하이라이트라 할만했다.




난 작은형이 돈이 많지 않다 하더라도 남부럽지 않은 고희연을 해드렸을 거라고 확신한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성이며, 작은형이 월급쟁이로 살 때 착실히 돈을 모아 큰어머님께 조그만 아파트를 해드렸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 추측이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3. 우리 어머니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어머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난 그런 어머님의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는데, 내가 손을 흔들고 가서 아양을 떨어도 어머님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게, 큰사촌형이 나중에 나한테 “어머님이 많이 슬프신가보다”라고 하실 정도였다. 어머님은 왜 슬프셨을까. 나이듦이 슬퍼서? 그건 아닐게다. 음식이 맛이 없어서?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신께서 자식농사를 실패한 데 대한 회한이 화려한 고희연을 보면서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카드 드릴테니까 고모님들 모시고 한번 거하게 쏘세요”라고 하고,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 친구분들과 유럽 한번 다녀오세요”라고 말하는 아들을 가진 사람과, 만날 때마다 “돈없어 죽겠어!” “파출부 값 내놔” “차 사야 하는데 돈도 없구”라며 손을 벌리는 아들딸이 있는 사람의 심정이 똑같을 수는 없다. 각자 살 때야 별 느낌이 없을지 몰라도, 만나면 격차는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 게다가 재산 면에서 한창 앞서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박탈감은 더더욱 클 것이다. 그래서 난 어머님께 가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다른 집안이라면 ‘망나니’ 쯤으로 분류될 내가 우리 집에서는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기막힌 현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각자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큰집을 보면서 자식농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내가 무자식 상팔자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도 사실은 우리 집구석에서 사는 동안 자식에 대해 크나큰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지 않는가.




4. 음식


극단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난 음식을 먹으면서 조선일보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깨달았다. 고희연에 나온 음식은 너무 맛이 없었으니까.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휴지 뒤에다 메모한 걸 여기 옮긴다.


-갈비; 질기기가 내 구두 같다


-회; 녹지도 않은 걸 언 채로 가져왔다. 그나마 맛이 너무 쓰다.


-유삼슬;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회초밥; 아까 그 회로 만든 건데 멀쩡할 리가 있나.


-궁여지책으로 가져온 국수: 무색, 무미, 무취다. 자연 시간에 많이 들어본 얘기 같은데 이산화탄소가 그렇던가?


-뷔페에서 절대로 안먹는 슈크림; 배를 채우려고 열 개나 가져왔지만 두 개 먹고 말았다. 안단 슈크림은 처음 본다


-사이다: 김이 빠졌다. 상품명을 보니까 킨사이다다. 이게 아직도 나오던가?




나갈 때 보니까 회는 반이상, 갈비도 절반 가량 남았다. 다음 연회 때 그 음식들은 또다시 연회장을 장식하겠지. 다른 사람들도 음식 불평을 하지만, 뷔페라는 사실 때문에 점심부터 굶은 나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또다른 술집을 찾아가야 했다. 어머님의 우울함이 생각나 난 친구들과 계속 소주잔을 부딪혔고,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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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11-2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마음이 씁쓸하셨겠어요. 우리 엄마도 저랑 나이가 같은 이종사촌을 우리 이모가 침이 마르게 자랑을 하면 늘 씁쓸해 하거든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잘해드려야겠어요. 그나저나 음식평이 기가 막힙니다.^^

로드무비 2004-11-2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삼슬--류산슬(오타)

대대적인 가족 모임 끝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어디 틀어박혀 술마시고 싶은 기분.

저 그 기분 너무 잘 알아요.

비로그인 2004-11-2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님을 같이 모시고 가셨으면 어머니께서 좀 기분이 좋으셨을지도 모르는데;;;(추측)



힘내세요 ^0^

2004-11-26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11-26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눈와요 넘 이뻐요..^^

호랑녀 2004-11-26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어디요, 어디요.. 어디 눈와요?

(앗, 딴소리...마태우스님 효자이신 건 우리가 다 알잖아요. 아자아자 화이팅!!!)


2004-11-2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1-26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11-26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효자라 불리면 좀 부끄럽죠. 엄마 속만 덜썩이면 좋겠어요...

고양이님/첫눈이 고양이님보다 더 이쁘신가요, 설마?^^ 미녀님 모시고 가면 흐뭇하시기야 하겠지만, 주인공이 미녀님이 될 것 같아서, 하핫.

로드무비님/아, 님도 그 기분을 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오타 지적 감사해요.

플라시보님/음식평에 아무도 관심을 안가져 주셨는데, 감사드려요. 제가 봐도 잘쓴 것 같아요, 그죠?






sweetmagic 2004-11-2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클 !! 국수는 흰색입니다 !!

하얀마녀 2004-11-2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매우 뜨끔합니다.

2004-11-27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한 가족모임 하고 왔는데 그나마 내가 또는 우리가 젤 낫군 하는 기분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안 겪어 봐서 모르겠습니다..딴진가요?^^

니르바나 2004-11-27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과 같은 자식이 하나만 있어도 가문의 영광일텐데 어인 엄살이십니까?

큰댁의 자손들이 훌륭하시긴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