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난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오락에 심취해 있었다. 무기가 각각 다른 전사 하나를 선택해서 싸움을 벌이는 거였는데, 나의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 때문인지 나는 그 오락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버렸다. 컴퓨터랑 싸울 수도 있고, 2인용을 선택해 다른 사람이랑도 싸울 수가 있었는데, 난 주로 컴퓨터와 싸우는 걸 즐겼다.


거기 나오는 전사들을 몇 명만 소개한다(참고로 이 전사들은 모두 자신의 스토리가 있는데, 영어로 쓰여 있어서 나는 모른다).

-달심: 인도의 중으로 팔다리가 늘어난다. 멀리서 칠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어 별로 선택을 받지 못하는 존재.

-켄과 류: 가라데 선수로 도복을 입고 경기를 한다. 일본에서 만들 땐 가장 강하게 프로그래밍되었을텐데, 장풍을 쓰고 “오--류켄!”을 외치면서 뻗는 주먹이 위력적이긴 하지만 1탄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천리: 속사포처럼 내뻗는 발차기가 특기인 여자로, 별 위력은 없다.

-가일: 반달킥이 위력적인 선수다.

-혼다: 스모 선수로 손을 무지하게 빨리 내뻗는다. 단지 그뿐이다.


그럼 내가 주로 선택했던 건 뭘까. 바로 블랑카다. 블랑카는 약간 진화가 덜된 종족의 전사인 듯 싶은데, 전기를 내서 상대를 감전시키고, 커다란 앞발로 상대를 공격하는 게 위력적이다. 가끔씩 상대에게 매달려 피를 빨기도 하는 잔인한 녀석. 난 이 녀석과 더불어 수많은 전투를 치뤘다. 1단계 전사들을 다 물리치면 2단계 전사가 나오는데, 권투선수, 펜싱선수 등이 나오고 맨 마지막에는 제왕인 바이슨과 대결을 한다.


내가 최초로 바이슨을 물리친 건 의사고시가 끝난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난 잽싸게 성대앞 오락실로 달려가 전자오락을 했고, 블랑카와 더불어 바이슨을 KO시킨다. 그 후 스트리트 파이터 2탄이 나왔는데, 모든 등장인물을 선택할 수 있는 것까진 좋았지만 상대 전사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는 바람에 한번 이기는 것도 너무 어려웠고, 결국 난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은퇴를 하고 만다.


영화 <스트리트 파이터>가 나온 것은 내가 은퇴를 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을게다. 내가 선호하던 오락이 영화화되었다고 하니 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유치하다고 안보려는 친구를 꼬드겨 극장으로 달려갔는데, 다 보고 나니까 친구에게 미안했다. 오락광인 나는 상상이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에 좋아라 했지만, 오락과 담을 쌓고 지낸 그 친구야 재미있을 턱이 있나. 그 뒤 난 그 영화를 케이블 TV로 한번 더 보았는데, 오늘 또 그 영화를 하기에 넋을 놓고 봐버렸다. 장 클로드 반담이 맡은 가일 대령은 역시나 잘 어울렸고, 류와 켄, 다른 조연들도 ‘어쩜 저렇게 비슷한 애들을 뽑아놨냐’는 감탄이 나오게 만든다. 벌써 세 번째, 내용도 뻔한 영화를 여러번 보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아마도 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오락에 빠져있던 그때를 상기하고 있나보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보다는 훨씬 못살았던, 하지만 꿈과 낭만은 잃지 않고 있었던 그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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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1-2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 초반이라면 제가 한창 야망에 눈이 어두워 세상을 긁고 다니던 시절이군요. 그때 님은 전사로 활약을 하셨다니 역시 님은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블랑카는요 개그맨이 흉내내는 '사장님! 너무해요. 이게 뭡니까'하는 블랑카 밖에는 몰라요..>.<

하얀마녀 2004-11-22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나게 했던 게임이군요. 지금도 가끔 에뮬레이터로 돌려봅니다. 전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8개의 모든 캐릭터로 마지막까지 클리어가 가능했었습니다. 대신 영화는 환상이 깨지는 것이 싫어서 안 봤죠. ^^

마태우스 2004-11-2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님/8개의 모든 캐릭터로 클리어가 가능하다면 저보다 더 잘하셨다는 얘기군요. 하지만 오랫동안 블랑카만 해온 제가 전문성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언제 한판 붙어봐야겠네요^^

여우님/앗 전 개그맨 블랑카는 모르는데... 그리고 오락에 빠져있던 저를 대단하다고 해주시다니, 님이 더 대단하세요. ^^

노부후사 2004-11-22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격투기 겜은 전혀 못해서 <스트리트 파이터>같은 경우, 달심만 선택하였지요. 팔이랑 발이 길게 뻗으니까 그거 가지고 공격하고 뒤로 빼고... ㅡㅡ;;

oldhand 2004-11-2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투기 게임에 약한 저는 남들 스트리트 파이터 할적에 죽어라고 라이덴만 했었지요.

비로그인 2004-11-2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1942 인가.. 비행기게임 아시는 분 제목도 가물거리네요;;

瑚璉 2004-11-2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룡권이 안되어서 좌절한 적이 얼마이던가 (-.-;).

그리고 Epimetheus 님, 달심은 장풍에 약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류나 켄, 그리고 가일에게는 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