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7일(수)
예과과장이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신분은 과장이지만 예전처럼 미천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번번히 좌절되는 느낌이다. ‘예과과장은 모든 회의에 당연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독소조항 때문에. 서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회의 때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게다가무서운 학장은 회의 때마다 묻는다.
“서선생은 뭐 할말 없어요?”
아,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왜 할 말이 이리도 없단 말인가? 발언을 두 번, 세 번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꿔달라고 할걸. 아무말도 안했더니 학장이 질책을 한다.
“앞으로 서선생은 기초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회의 때 얘기해 주세요. 알겠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마다 회의를 한다는데 난 어떡해야 하나.
7월 12일 (월)
해부학의 xx 교수를 만났다.
“저... 뭐 할 얘기 없어요? 의견 수렴 해야 하는데...”
xx: 의견수렴을 왜하죠?
나: 학장님이 하래서...
xx: 생각을 해볼께요. 당장 하라니까 생각이 안나네.
흑, ‘생각해 보겠다’고 하는 사람 중에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데... 급한 마음에 미생물의 yy를 만난다.
나: 저... 학교 측에 무슨 불만 있어요?
yy: (화들짝 놀라며) 왜? 누가 저더러 불만 있대요?
나: 그, 그게 아니라 그냥 의견 수렴하라고 해서...
yy: 음.... 화장실에 비치된 휴지가 질이 안좋아요. 닦으면 아프더라.
나: 그, 그런 거 말고 좀 생산적인 거 없어요?
yy: 생각을 좀 해볼께요. 당장 하라니까 생각이 안나네.
내 방에 와서 볼펜을 집어던진다. ‘에이 씨 의견수렴이고 뭐고, 그냥 내가 지어내고 만다!’
15분 뒤, 아주 훌륭한 의견들을 담은 보고서가 출력된다. 음하핫.
7월 28일(수)
회의를 하러 학장실에 모였다. 난 의기양양하게 숙제를 제출했다. 지난주 회의 때, ‘대학발전을 어떻게 시킬 것인가’에 대해 항목별로 써오라고 했거든. 있는 머리 없는 머리 짜내가면서 A4로 두장이나 썼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해왔다.
의학과장: 하면 드리죠.
간호학과장: 아직 못했는데...
교육위원회 위원장: 전 안하는 건 줄 알았는데...
숙제를 안한 것에 대해 무서운 학장이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주세요”라고 하고 만다. 이런 젠장! 숙제를 다한 난 억울하잖아! 다음번에 뭐 해오라고 하기만 해봐라. 안한다, 안해!
8월 10일(화)
학장실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주 수요일 운영위원회는 취소됐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2주 연속 회의를 안한다. 속으론 좋으면서 이랬다.
“어머나, 너무너무 아쉽네요”
학장 비서가 큰 소리로 웃는다. “아이 교수님도...”
한주 또 넘겼다...
8월 16일(월)
알라딘에다 열나게 글을 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난다. 잡상인인 줄 알고 늘 하던대로 “교수님은 서울 가셨는데요”라고 말하려 했다. 그 말만 하면 잡상인들은 두말 않고 나가 버리거든. 하지만 “교수...”까지 말하는데 그가 서류를 내민다.
“병원 기획실에서 나왔는데요, 결제 좀 받으려고요”
병원의 방침이 이러이러 저러저러하게 바뀌었단다. 바뀐 게 굉장히 많지만 내 피부에 닿는 건 하나도 없는지라 난 내가 쓰던 글의 결말을 어떻게 할까 궁리를 했다.
“여기다 서명 해주시면 됩니다”
‘예과과장’이란 직함 옆에 싸인을 하는 곳이 있다. 말 싸인을 그리려다 지극히 평범한 원래의 싸인을 했다. 그러고보니 간만에 과장다운 일을 수행한 것 같아 뿌듯했다.
8월 19일(목)
아무리 늦어도 6시 반에는 일어났건만, 요즘엔 아침에 눈이 안떠진다. 술을 안먹어서 그런가? 몸이 너무 피곤해서 일찍 퇴근하려고 채비를 차리는데, 학장실에서 전화가 온다.
“학장님이 지금 좀 뵙재요!”
나: 나쁜 일인가요?
비서: 모르겠어요!
하여간 일찍 도망갔으면 큰일날 뻔 했다. 휴우....
내려가 봤더니 학장이 나만 불렀다. 침통한 표정으로 앉았더니 가까이 앉으란다.
학장: 서선생은 내가 무서워요?
나: (그럼 무섭지!) 아, 아니요. 그냥...
학장: 예과 업무파악은 다 했나요?
나: (하나도 안했지만) 네, 대충....
학장: 예과생이 몇 명이나 되요?
나: 그, 그게....
학장: 예과생 수업 커리큘럼은 알아요?
나: .....
학장: 장학금 현황은 어떻게 되나요?
나: 지난번에 보니까 어려운 애들이 많더군요.
학장: .....(침묵).... 그러면 예과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다음주에 나랑 얘기합시다. 학생부문, 교육부문, 개선안에 대해서 한번 써봐요.
난 식은땀을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과장은 역시 어렵다.... 2년간 이짓을 해야 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