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레이몬드 카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집사재 / 1996년 3월
평점 :
품절


문학에 있어서 겁나게 현학적인 친구가 내가 읽는 책을 보더니 말한다. "레이몬드 카버 읽었어? 이딴 거 읽지 말고 그사람 거 읽어"
그의 말투에 카버까지 싫어졌지만, 카버가 무슨 죄가 있냐 싶어서 어느날 문득 신청을 했고, 그 책은 오랜 기간 방바닥에서 순서를 기다린 끝에 내 간택을 받았다. 여러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숏컷>은 나름의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깊은 울림을 내게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격찬하는 걸 보니 훌륭한 작가이긴 한 것 같은데, 내 문학적 내공은 카버를 소화하기엔 영 버거웠다.

평소 책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보지 않았었다. 책을 읽지 않았던 중학교 때 독후감을 쓰라고 하면 언제나 해설만 보고 읽은 것처럼 위장해서 감상문을 내곤 했던 기억도 나는데, 하여간 책 뒤의 해설은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하고 책의 해석을 한가지 틀로 고정시킨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혼란스러운 카버의 단편은 나로 하여금 한편 한편이 끝날 때마다 책 뒤를 뒤적이게 만들었다. 카버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예컨대 남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별것도 아닌 것에 계속 웃음을 짓고, 상습적으로 이사를 가는 등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행동들을 즐겨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대스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해설을 수시로 봤지만 해석에 별 도움이 안되었다. 난 매우 황당하게 읽었는데 "매우 흥미깊고 또 재미있는 작품이다"라고 말한 다거나, 난 읽고나서 멍--했는데 하루키가 "나는 이것을 읽고 완전히 카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고 말할 때는 낮기만 한 내 문학적 내공에 좌절하게 된다. 역시 난해한 작품은 해설을 봐도 큰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쉬운 건 쉬워서, 어려운 건 어려워서 도움이 안된다면 해설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하지만 하루키의 다음 말에 약간의 위안을 삼아야겠다. 이사광인 어머니를 다룬 작품에 대해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설사 제목이나 줄거리를 잊어버렸다 해도, '아 카버의 단편에서 불평만 해대는 이상한 이사광 어머니가 나오는 그 이야기...'라는 식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정도면 족하다고 나는 행각하는데...(326쪽)]
시험에 너무 길들여져서인지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게 마치 책에서 꼭 찾아야 하는 정답인 것처럼. 하지만 소설이란 게 그저 재미있게 읽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게 아닌가?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있기는 있을 테지만, 구태여 그걸 찾으려고 노력하지 말자. 책에는 정답이 없고, 내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소화해 내면 되는 거다. 시험을 보듯이 책을 읽는다면 책읽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평소 들은 풍월을 총동원해서 이 책에 나름의 진단을 붙인다. "잔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현대인의 소외와 일탈을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 후후, 그럴듯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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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8-13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쥴님 안녕하세요? 그래도 귀여니 류의 소설은 아니었거든요. 문장이 세련되고 스토리 전개에 무리가 없었어요. 단지 제가 이해를 못했을 뿐...이해를 했다면 별이 다섯개였겠지요. 그리고 원래 제 리뷰가 막가파식 리뷰잖습니까. 게다가 유명 작가의 유명한 책이라니 좋은 책이려니 하는 편견도 있었습니다.

stella.K 2004-08-13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사람 글을 꽤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숏컷>이었는지 아님 다른 책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이 사람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더라구요. 근데 저도 마태님과 비슷한 이유로 별로 잘 읽혀지지 않았는데 그래도 꾸역 꾸역 읽었습니다. 전 미국 취향의 작품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폴 오스터의 작품도 좀 겁나더라구요.
내 취향이 아니어도 좋은 작품은 이 세상에 많이있는 거겠죠. 전 마태님이 왜 별 네개를 주셨는지 알 것도 같아요.^^

자일리톨 2004-08-1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중간중간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엿보고서 놀랐습니다. 즐겨찾기 추가할께용~

sweetmagic 2004-08-13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두요 동감.....
엉뚱한 얘기지만 ... 전 뭔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당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게 쉽지가 않아요.ㅎㅎㅎ

비로그인 2004-08-13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마태우스님의 리뷰, 뭔가 펑 뚫리면서 되먹지도 않은 의미들을 주워담으려 했던 제 허세가 자꾸 부끄러워지네요.

마냐 2004-08-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설만 보고 위장독후감을 쓰셨다는데..벌러덩...천하의 마태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군요. ^^

털짱 2004-08-14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의 부재에도 털 끝 하나의 흔들림도 없이 이렇게 묵묵히 미녀동지들의 후원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 마태님을 보자니, 흑 기...기쁨의.. 눈..물...로 할... 말이...없어요.ㅠ_ㅠ

털짱 2004-08-14 0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요, 제가 없는 사이 마태님이 많은 글을 남겨주길 바랬는데 너무 약소해서 서운해요. 알라딘의 비타민 마태님인데...

마태우스 2004-08-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밤에 쓰려고 낮엔 디비 잤습니다. 지금은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구요, 지금 전 쌩쌩하답니다. 실망시켜서 미안, 셀프!
마냐님/그럼요. 제가 서른까지 책을 거의 안읽었다니깐요. 하지만 그게 꼭 후회되는 건 아니어요. 책을 많이 읽은 분들은 왠지 고독을 즐기고 그러는데, 전 사람들 틈에서 살고, 게다가 그 기간 중 귀염성을 길렀거든요.
복돌님/님은 언제나 절 칭찬만 하시는군요. 님의 친절에 보답하는 뜻에서 더더욱 막가파식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스윗매직님/원래 생각은 글보다 앞서 간답니다^^ 특히 님처럼 재기발랄한 분이라면 더더욱...
자일리톨님/앗 어쩐지 하나 늘었다 했더니..감사합니다.
스텔라님/아아, 이해심 많은 스텔라님.... 저도 님에게 더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마냐 2004-08-1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전에 책을 거의 안 읽고도..마태님처럼 진정한 지식인이 될 수 있다...이거 '인생역전'의 귀감으로서 널리 알려야 한다니까요.

마태우스 2004-08-15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전이라뇨. 저 지식인 아니구요, 진정한 지식인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어요........

하이드 2004-09-0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 기간 방바닥에서 순서를 기다린 끝에 내 간택을 받았다." 가 무지하게 와닿습니다.
왠지 옆에다 쌓아두면, 압박감에 더 읽게 될 것 같은... 이란 핑계를 대고, 사실은 귀찮아서, 정리 안하고, 오는 족족 쌓아두곤 하지요 . 매달 읽을책들( 부담스럽지요), 그리고 최근에 배달된 책들( 자꾸 보지 않으면, 두번, 세번 주문하는 황당한 일이 종종 벌어지지요). 최근에 읽은책들( 뿌듯하지요) 버리거나 처분할 책들( 의도적으로 무시하지요.) 등등등.
레이몬드 카버의 책은 어릴적(?) 하루키때문에 빠지게 되어 꽤나 여러권 읽었는데, 아마, 저 시리즈도 하루키 책의 붐을 타고 슬쩍 나와주신게 아닌가 생각되어지기도 하네요. 비슷한 시기에 새로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 하루키 보다는 하루키 덕분에 알게되는 작가들이 더 더 좋아요. 저는 장편보다 단편을 편애하고, 한페이지에 두문장쯤 나오는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류의 책보단, 한줄에 한문장 나오는 심플한 스타일이 더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