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번째

일시: 8월 6일(금)

마신 양: 소주 왕창, 그리고 맥주


난 술을 마시다 도망쳐 나온 경험이 제법 된다. 그 대부분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더 마시면 죽는다’는 보호본능이 작동되어 도망간 것이다. 극히 일부지만, 썰렁한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일로 그랬는지 기억이 안나는 걸로 보아 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엊그제 일은 또렷이 기억난다. 간만에 여섯명이 모두 모인, 즐거워야 할 술자리가 무척이나 썰렁했던 것. 그것도 나 때문에. 난 거의 한마디 말도 없이 소주만 들이부었다. 그거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꽤 많이 마신 것 같지만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술이란 게 원래 썰렁할 때 마시는 음료라서 그런 것일까? 계속되는 썰렁함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택시비를 제외한 모든 돈을 탁자 위에 놓고 술집을 나왔다. 그래도 돈이 좀 남아 우리집 슈퍼 앞에서 맥주 1.6리터를 샀으며, 그걸 김이랑 같이 마시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 전날 왔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P: 부탁이다 돌아와라

P: 다음에 우리 밝은 얼굴로 보자. 나도 마음 아프다

H: 민이야 그냥 맘이 아프다...

H: 빨리 예전의 니 모습 보구 싶어


친구들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호기롭게 나온 건 좋았는데, 다시 그들을 어떻게 볼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문제가 있으면 당당히 맞서기보다는 언제나 회피하기만 했던, 그래서 문제를 더더욱 크게 만들기만 했던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이번에도 복귀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아, 머리아파.


115번째

일시: 8월 7일(토)

누구랑: 고교 친구랑

마신 양: 소주 많이--> 맥주 약간


전날과 달리 무척이나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앞 친구들과도 원래는 늘 즐거웠었는데...). 그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 편하고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좋았다. 다만 1차에서 혼자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게 안타까웠다. 술이 앞에 있으면 참지를 못하는 내 조급함이 그들과 오래오래 즐거움을 누리는 걸 방해한 셈이다.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다지 실수한 것 같지는 않다.


필름이 끊기기 전, 여행 얘기가 나왔다. 개강 전주에 부부 동반으로 놀러 가는 얘기. “아무 여자나 데려와. 너 혼자면 심심하잖아!”라고 하기에 걱정 말라고, 내가 여자 하나 못구하겠느냐고 큰소리를 쳤었다. 하지만 내가 접선한 미녀 하나는 부끄러워서 싫다고 하고, 또다른 미녀는 시간이 어찌될지 모른다고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혀 왔다.


사실 요즘은 남자 구하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다. 지난 여름, ‘부끄러워서 싫다’는 미녀가 모델을 방불케 하는 자기 친구와 같이 여행을 하자면서 남자 하나를 더 구하라고 했을 때, 그 보름 동안 내가 얼마나 주위 사람들에게 전화를 많이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행경비 일체 제공. 미녀 둘과 2박3일”이란 환상적인 캐치프레이즈도 별 도움이 안됐고, 결국 여행은 그 둘만 떠났었다. 참으로 쓰라린 기억이다. 그런데, 그런데 여자 구하기도 이렇게 힘들다니. ‘일당 3만원! 몸에 손도 안댐!’이란 광고를 내걸고 여자를 구해야 할까. 그보다는 책을 친구삼아 그냥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책은 여자보다 아름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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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마녀 2004-08-08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당 3만원! 몸에 손도 안댐!
뒤집어질 뻔 했습니다. ^^

털짱 2004-08-0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 용서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구 나도 용서해줘야해...=..=;

부리 2004-08-08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짱님/그렇다면...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죠?
하얀마녀님/으음, 님은 그런 컨셉에 약하시군요^^ 털짱님을 포기하라! 포기하라!

sweetmagic 2004-08-0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먹다 도망가는 사람 제일 싫던데~
계산은 하고 가셨다니 그 뒷모습이 아름다울 법도 하지만~ 그래도 도망가는 사람은 시러요`!!

sweetmagic 2004-08-0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 마태님이랑 따우님이랑 술 마실 때는 먹을 만큼 먹었다 싶을 때 열 받게 하면 되겠다
호호호`~~ 술 마시다 싸우고 화나면 술값 계산하고 먼저 가 버리는 습관이 있으신 분 요기요기 제 뒤에 줄 서요 ~ 공짜 술이에요`~!!

sweetrain 2004-08-08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마태님과 따우님과 같이 술을 마셔야겠군요...바람직해요...

하얀마녀 2004-08-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술값을 내지 않을까요? ^^

마태우스 2004-08-08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따우님과 술을 마신다고 하면...아마 중간에 제가 미리 계산을 해놨을 겁니다.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선...
단비님/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근데 따우님과는 안싸울것 같다는...
스윗매직님/아예 골든벨을 울릴지도 모른다는...
파란여우님/무슨 말씀이세요. 전 님의 복귀가 올 8개월 동안 가장 기쁜 일이었는데... 남들의 이간질에 속지 마세요. 제 마음을 믿으시길...
털짱님/아시죠 제 맘?


마냐 2004-08-0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님 때문에 아무리 술 자리가 썰렁했다 할지라도(속사정을 모르지만, 이것도 희한한 일...)...친구들이 한결같이 그런 메시지를 보낸건...님이 얼마나 사람들의 신뢰를 얻고 사는지, 인간관계 잘 꾸리시는지 한눈에 보여주는군요...헉.

2004-08-09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짱 2004-08-10 0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 민이 "아시죠, 제 맘?" 이 코멘트를 안받아본 알라딘 여성동지가 있을지 심히 의심스러워요. 만약 아직도 못받아본 미녀가 계시다면 그분은 빨리 돈을 모아서 수술을 받도록 해드려야해요. 민.. 그래두 난 민을 아끼고 사랑하나봐요. 당신은 알라딘 외로운 미녀들의 영원한 보석이니까 공용으로 기부하겠어요. 난 참 너그러운 여자예요, 그죠,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