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아득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는 책받침이라는 게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용도가 노트에 받치고 글씨를 쓰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그런 용도 이외에 책받침은 책받침 싸움, 그러니까 상대의 책받침을 누가 더 많이 뽀개는가 하는 게임의 도구였고, 나처럼 더위를 타는 사람에겐 유용한 부채였다. 튼튼한 재질로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는 책받침만큼 부채로서 적합한 게 또 있을까? 종이 사이에 군데군데 나무살이 박힌 부채는 금방 찢어졌고, 나무로만 만들어진, 은은한 향까지 나는 고급 부채는 모르고 한번 깔고앉았더니 이내 박살이 났다. 책받침이 추억의 학용품이 되어 버린 게 그래서 아쉽다.
온난화 탓인지, 부채를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일이 잦아졌다. 몇 년 전에 천안역 앞에 있는 안경점에서 동그란 아크릴로 된 부채를 박스에 쌓아놓았다. '하나씩만 가져가세요'라는 문구에 쫄아 사흘간 세개만을 챙겼다. 두 개 집어야겠다는 검은 마음을 품고 간 나흘째, 상자는 이미 없어졌다. 역시 기회가 있을 때 집어야 하는데... 사실 부채는 많을수록 좋다. 부채로 바람을 부치고 있으면 꼭 빌려달라는 애가 생기고, 대개의 경우 돌려주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은 아크릴로 된 부채에는 아무런 부채의식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잃어버릴 것에 대비해서, 난 가방에 최소한 3개의 부채를 갖고 다닌다.
홍대 역 앞에 'xx 아트빌 분양! 실입주금 2천만원'이란 선전문구가 박힌 아크릴 부채가 쌓여 있었을 때, 난 이전의 경험을 거울삼아 왕창왕창 부채를 집어갔다. 한번에 열 개씩, 몇 번을 옮겼는지 모른다. 그것도 부족해서 차를 가지고 가서 담아오기도 했다. 일가친척들을 다 나누어 주고, 친구들한테 다 빼앗기고 했지만, 우리집 창고에는 아직도 그 부채가 많이 남아 있다. 지금도 한 50장 정도? 다 좋은데 그 부채는 손잡이 부분이 지나치게 길어 불편했고, 손잡이를 떼어내면 폼이 안났다. 그래도 내 가방에 들어있는 부채는 대부분 그거다. 가방에서 끝없이 그 부채가 나오자 주위 사람들은 나와 xx 아트빌의 관계를 의심하기도 했다. "혹시....그 아트빌 니꺼니?" '2002년 7월말 즉시 입주'라는 문구를 보니,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아트빌이 분양되지 않았다면 난 여름을 매우 덥게 보냈을 거다.
얼마 전, 굉장히 좋은 부채를 2개 얻었다. 재질은 같지만 훨씬 튼튼해 부채질하기가 편하고, 특히 손잡이 부분이 아주 맘에 든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이쁜 여자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씌여 있다.
[-쇼!쇼!쇼! 쿨 섹시크럽
-모든 것을 내렸습니다!!
-밤샐 때까지 팁 3만원
-20대 미시 99%!
-섹시크럽이란?
@절대로 미시크럽이 아님(20대 도우미 99%)
@ 절대로 비즈니스 크럽이 아님(노는 수준은 북창동)
-Tel: 323-6517]
비즈니스크럽과 미시크럽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데는 절대 가면 안된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갔더니 팁값이 싼 대신 술값이 무지하게 비쌌고, 그나마도 자칭 미시인 여자분들이 술을 차곡차곡 버리니 총 액수는 전혀 싼 게 아니었다. 이런 부채로 부채질을 하니 주위의 시선이 곱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난 이 부채가 좋다. 내용이 문젠가. 시원하기만 하면 되지!(여자 사진 때문에 시원한 건 결코 아니다. 부채가 잘 만들어졌단 뜻이다). 바람에는 저질과 고질의 구별이 없는 법, 다른 부채는 다 빼앗겨도 이 부채만큼은 안뺏길 생각이다. "부채 좀 빌려줘"라고 하면 무조건 난 "xx 아트빌" 부채를 내줄거다.
* 원래 쓰려던 게 이게 아니었는데, 졸리니까 횡설수설해지면서... 졸릴 때는 그냥 글쓰지 말고 자야 합니다... 참, 이벤트 당첨되신 분들 있지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주시겠어요? 심윤경 작가가 지금 해외(?) 출타중입니다. 다음주 금요일에나 온다는군요. 다다음주에 이벤트 상품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저 믿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