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교에 진학할 때, 교복자율화가 시행되었다. 교복이 일제의 잔재며 획일주의의 표상이라 해도, 이미 교복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매일같이 사복을 골라 입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도 잘 사는 축에 속했던 나였지만, 아침이 되면 입을 옷이 없어 머리가 아팠고, 바지를 안사주는 엄마에게 항의하느라 일주일간 교련복만 입고 다니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랬다. 그땐 교련복이 있었다. 시간표에 교련이 들어있지 않는 때라도, 마땅한 옷이 없으면 교련복을 입는 애들이 간혹 존재했다.

고2 때 한 친구는 일년 내내 교련복을 입고 다녔다. 9월의 어느날 그가 반팔 티셔츠에 교련복 하의를 입고왔을 때, 다들 놀랐다. "xx아! 너 그러니까 멋지다!"고, 진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던지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옷차림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 친구는 늘 돈이 없었다. 등록금을 못내서 담임에게 불려다녔고, 학교에서 걷는 돈을 거의 내본 적이 없다. 그러던 그 친구가 딱 한번 돈을 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반 회지였다. 교지가 없던 우리 학교에서 우리 반은 유독 단합이 잘되고 친했다. 우리반이라고 노는 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늘 웃음이 넘치는 그런 반이 바로 2학년 때 우리반이었다. 그런 반이기에 반 회지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을게다. 회지 비용으로 일인당 천원씩 걷었는데, 놀랍게도 60명 전원이 주저않고 돈을 냈었다. 반장과 짝이었던 나는 다른 몇몇 애들과 같이 토요일 오후를 반 회지를 만들면서 보냈는데, 그걸 만드는 시간도 매우 즐거운 시간으로 내게 남아 있다.

내용은 이렇게 채워졌다. 개인마다 자기소개, 20년 후의 내모습, 가장 당황했던 일, 이런 등등을 써넣는, 그러니까 앙케이트 형식이었다. 회지가 다 만들어지고 그걸 돌려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상상이 가는가? 우리를 부러워했던 다른 반 애들은 우리 책을 빌려다 보기도 했고,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들에게도 그 책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우린 회지를 남김없이 압수당해야 했다. 앙케이트 항목 중 하나인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과 그 이유"가 문제가 된 것. 그당시 '피받아'라는 별명을 가졌던 교련 선생님이 집중적으로 거론이 되었는데, 우리 책을 본 그 선생님이 매우 불쾌하셨던 것 같다.

불온문서의 주동자로 몰린 우리는 학생과에 불려다니느라 겨울방학의 초반부를 보내야 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탓에 그게 왜 부당한 일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다들 모범생에 속하는-그때 난 그랬다-애들이라 처벌을 받지 않은 것만도 그땐 감지덕지였을거다.

세월이 흐른 후, 다른 학교로 옮기신 담임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 학교를 옮기신 이유 중 그 반회지 사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알고 놀랐다. "그때 속이 많이 상했어. 너희들이 만든 걸 그렇게 뺐는 게 어딨냐?"
회지를 빼앗기고 난 뒤 힘있는 사람들-학교에서는 선생님-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선생님들은 다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은 그걸 속상해 하셨다니, 일시적으로나마 우리 담임을 미워했던 게 죄송했다. 반장 말에 의하면 그때 안뺐기고 남은 교지가 한권 있단다. 그걸 가지고 60부를 다시 만들어 돌리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만날 때마다 했는데, 그놈의 게으름 때문에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이면 내가 고교를 졸업한 지 어언 20주년이 된다. 20년이 된 기념으로 우리 동창들이 한번 쨘 하고 모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모일 때, 그 반 회지를 만들어 거기 나온 우리반 애들한테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 내가, 그리고 우리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너무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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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6-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고등학교 때 만드신 반 회지 다시 받으시면, 그 때 마태우스님이 쓰신 글, 꼭 올려주세요.. 정말 궁금해요. ^^

ceylontea 2004-06-0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추억이네요... 저도 그 회지 정말 보고 싶어요... 꼭 올려주세요.

진/우맘 2004-06-0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20년 전에도 똑같으셨군요.^^

*^^*에너 2004-06-01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교지 보고 싶어요. ^^

starrysky 2004-06-0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안 좋게 끝나기는 했지만요. 교련 선생님 나빠요! -_- 왜 체육이나 교련 담당 선생님 중에는 그런 성향의 분들이 많으실까요? 아니, 그런 성향이신 분들이 주로 체육 전공을 하시는 건가? 담임선생님께 많이 죄송하셨겠어요.

마태우스 2004-06-0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arry sky/그래요, 아름다운 추억이었지요. 담임선생님께는 늘 죄송하답니다.
*^^*에너님/다시 만들게 되면 공개할께요^^
진우맘님/뭡니까! 장족의 발전을 했구만, 모함만 하시구...
실론티님/네! 제건 아니구 다른 친구가 한 멘트가 생각나요. 사는 곳: 하늘아래 첫동네. 가장 당황했을 때: 칠판에다 sec라고 써야 되는데 sex라고 썼을 때. 모든 것이 폭로됐다....
panda78님/그렇게 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