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나는 지금 백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하얀 실크 가운을 입고 창밖의 가로등 불빛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베토벤의 <월광소나타>를 길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친다]

<아름다운 지옥>에서 여고생인 주인공이 하는 상상의 장면이다. 어찌된 것이 그 시절에 해보는 상상에는 백혈병이 많이 나온다. 라디오에서 작가를 하는 모 씨의 말에 의하면, 보내오는 사연 중 거짓말로 지어낸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들이 무지하게 많단다. 비가 내릴 때 사랑하는 사람은 숨을 거두는데, 그 대부분이 백혈병이라는 것. 왜 사람들은 이리도 백혈병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 이름처럼 피가 하얗게 되는 것이니 '청순가련'을 원하는 여고생들이라면 한번쯤 꿈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피가 많아서 얼굴이 홍조를 띠는 건 좀 촌스러워보이지 않는가? "사랑은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은 것도 그 병에 대한 사람들의 선망을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몇 안되기는 하지만-백혈병의 사례들은 청순가련이나 우아함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백혈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주로 아이들이며, 그들은 머리를 빡빡 깎은 채 고통스러운 화학요법, 혹은 방사선요법을 받으며 재발에 재발을 거듭하는 암과 싸우고 있다. 그들 앞에 서면 백혈병을 한때나마 동경했던 자신이 미안해진다.

김은석이라는 배구선수가 있었다. 청소년대표로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던 그는 내가 학생 때 백혈병으로 S대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별밤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자주 문병을 가면서 그와 친해졌다. 내가 또 스포츠 전문가 아닌가. 내 해박한 지식에 그는 매우 감동한 듯했는데, 키가 190을 넘는 거인이 머리를 빡빡 깎고 누워있는 모습은 나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내 게으름에 만남이 끊기긴 했지만 그는 다시금 재기, 소속팀이던 고려증권에 복귀해 다시금 시원한 강타를 날렸다.

언젠가 그가 뛴 경기에서 난 경기장에 앉아 있었다. 경기 중, 아니면 경기가 끝나고 아는 체를 할까 말까 무지하게 망설였다.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난 아는체를 하지 못했다. 저녁 한번 사겠다는 약속을 못지켜 비난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 때문에. 그리고 그는 스타고, 난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때 아는체를 안한 걸 난 두고두고 후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혈병이 재발한 그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고, 난 그 사실을 모른 체 밖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91년 6월 6일, 친구와 놀러가 술을 마시다 TV 뉴스를 통해 그가 끝내 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음날 영안실을 찾은 날 보고 김은석의 부인은 눈물을 터뜨렸다. "왜 이제 왔느냐"는 책망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날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단다. 그랬다. 난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라 하얀 가운을 입은 준 의사였고, 그는 나의 위로를 필요로 했었던 거다. 내가 찾아갔더라도 그가 죽는 건 피할 수 없었겠지만, 조금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거다. 난 나의 소심함과 게으름, 지나친 자기비하와 더불어 잘못을 하면 사람을 피하는 못된 습관을 마음 깊이 반성했지만, 때는 늦었다.

잘못했다고 사람을 피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며,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난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는 철저히 피하고 있다. 그런다고 도망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잘못된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그게 잘못이라는 걸 알아도 말이다. 성장 초기에 올바른 성격을 갖추는 게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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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5-2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교 다닐때 한참 여자아이를 그린 일러스트가 유행을 했더랬습니다. 연습장이나 책받침 혹은 노트 표지에 그려진 여자아이였는데 백혈병 걸린 애를 그린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마 더욱 동경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백혈병이 그렇게 아름다운 병은 아닌가봅니다.

연우주 2004-05-2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태우스님. 어떤 건지 알아요. 저도 회피하려고 하는 성격이거든요. 최대한 버티다가 결국 직면하게 되지요. 마태우스님. 조금 더 자신감을 키우세요! 마태우스님은 너무 멋져요!!! 오빠, 오빠!!!! (아니다, 아빠, 아빠 해야 하나? ^^)

2004-05-26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랑녀 2004-05-26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모임 동기 남자애가 4학년때 발병해서, 2년인가 후에 결국 하늘나라로 먼저 갔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s대 법대를 다녀서, 집안의 등불이었는데, 참 순박했는데...
그 친구 덕에 참 열심히 살기로 했는데, 10년이 넘어가니 기억도 희미해져갑니다 ㅠㅠ

nrim 2004-05-2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고려증권 팬이었던지라 저도 덩달아 고려증권을 응원했었죠.. 어렸을 적이라 어렴풋하지만 김은석 선수 기억도 나네요.... 다시 복귀해서 선수활동했을때 상당히 감동하기도 했었는데....
저도 잘못을 하고 나면 사람을 피하려는 습관이 있는데.. 요즘은 고쳐나가려고 노력중...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이 책임지려 노력해야겠죠...

2004-05-26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arrysky 2004-05-26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마태우스님 정말 괴로우셨겠어요. ㅠㅠ
저도 그런 소심함과 게으름 때문에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 입힌 일이 많은데, 한번도 제대로 사과해본 일조차 없군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피해다니기만 급급하니 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지금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나 봐요. 마음이 굉장히 답답하네요.

비로그인 2004-05-26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알겠습니다. "잘못했다고 사람을 피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며, 문제를 더욱 크게 만들 뿐이다."

sooninara 2004-05-2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뽁스 총 맞아..죽어가요...헥헥...

죽기전에 사진 올립니다..

깰꼬닥...


2004-05-2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magic 2004-05-27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님은 타고난 재간둥이 이십니다. 축복 받을 일들이 주위에 가득 하시구요.
제가 님을 존경하는 이유이며, 제가 님을 부러워하는 이유입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어도 피하지 마세요....님....
용서받고 용서하고...그런 깊은 이해가 있어야 더욱더 친밀한 관계의 장이 펼쳐지죠...
저도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2004-05-27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4-05-27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입원하셨을 때, 가끔 일산 국립 암센타에 갔었습니다. 그 때 머리깍은, 휠체어에 앉은 아이가 아마 약에 의한 듯한 구토를 하는 걸 엄마가 닦아주는 걸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옆을 뛰어가는 걸 보면서 그 모녀에게 왠지 미안해졌고, 우리 아이들이 아프지 않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음. 이건 좀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이 글 보니까 님이 의사라는 걸 느끼겠습니다..^^; 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