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이 멀쩡한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해마다 보도블록을 가는 공사가 벌어지는 걸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공무원들을 비난하지만, 진짜 문제는 예산이 남으면 다음 해의 예산을 깎는 현 체제에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한가하게 남 탓을 할 때가 아니다. 나 역시 만만찮게 예산을 낭비하고 있는 중이니까.

내 연구실 옆에는 큼지막한 실험실이 있다. 열명 정도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기생충을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처음 발령받을 당시엔 그 넓은 곳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난 모교도 가고, 다른 교실도 가면서 실험을 하려고 했다. 내 핑계는 타당했다. "뭐가 있어야 실험을 하지!"
그래서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은 대충 다 들어주려고 했고, 다른 교실에서도 내게 우선권을 주면서 날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기계가 몇대 들어오고 나자 교실은 이제 일할만한 곳으로 탈바꿈했다. 돈이 어디서 나는지 맨날 "기계 살 거 있으면 적어내라"는 공문이 왔다.

기계를 사려면 무슨 일을 할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어야 했지만, 그런 게 전혀 없던 나는 남들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물어봐 가면서 기계를 샀다. 필요가 없더라도 다른 교실에 있으면 적었다. 그렇게 들어온 기계를 난 얼마나 썼을까? 놀라지 마시라. 난 단 한번도 기계를 쓴 적이 없다. 실험실 열쇠를 맞춘 게 작년의 일이니, 그럴 수밖에. 내 방에 있는 초대형 현미경은 아예 비닐조차 뜯지 않았다. 실험실에 가면 비닐만 겨우 뜯은 것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며 서 있다. 그렇게 몇 년만 더 지나면 그 기계들은 낡은 것들이 되어 갈 것이다. 예산은, 그렇게 낭비되고 있다.

기계가 갖춰져도 난 여기 저기를 유랑하며 실험을 했다. 내 실험실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 영 무서운 일이었다. 한번 안하니 계속 안하게 되고, 나중에는 할줄 몰라서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갔다. 난 실험을 손에서 놓은 듯했다.

그래도 뭔가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작년 말이었다. 일말의 양심 때문이라고나 할까, 난 실험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고, 혼자 하기가 무서우니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몸담았던 보건원 사람들을 떠올렸다. 날 가엾게 여긴 그쪽에서 같이 실험을 하자는 러브콜을 여러번 보내왔던 까닭이다. 난 그분에게 전화를 드렸고, 그분은 매우 기뻐하셨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난 보건원 식구들 20여명에게 술과 밥을 샀으며,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날 정도로 마셔댔다. 그게 작년 말이다.

지금은 그 일조차 까맣게 잊혀져 버렸고, 난 여전히 놀고 있다.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내가 할 수 있을만한 귀여운 일을 계획해 냈지만, 돈이 없었다. 연구비를 타내려고 생각도 했지만, 만사가 귀찮고, 막상 돈을 받았는데 일이 잘 안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필경 잘 안되겠지만-도 든다. 시간은 계속 가서, 벌써 6월. 아아, 세월은 빠르다.

오늘, 교학과 사람들이 내 실험실에 왔다. 그들은 매우 놀란 듯했다.
"아니 실험실 탁자에 먼지가 자욱하던데, 아줌마들이 청소 안해요?"란 말, "기계도 한번씩 써보고 그러세요"라는 말 등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이 내 가슴에 박혀왔다. 그들이 가고 난 뒤 난 내 실험실에 오랜만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안쓴 흔적이 역력한 기계들은 우리나라의 예산이 이렇게 낭비되고 있다는 걸 항변하듯 안타깝게 서 있다. 들어간 김에, 난 내가 쓰던 타월에 물을 적셔 실험실 탁자를 닦았다. 기계도 한번씩 쓰다듬어 보고...

올해 가을, 우리대학이 종합평가를 받는다. 오늘 들어온 사람들이 놀랐던 것처럼 평가 위원들은 깨끗한 기계에 원더풀을 연발하겠지. "아니 어떻게 저토록 깨끗하게 기계를 사용하십니까???" 이러면서. 갑자기 무섭다. 내일부터는, 공회전이라도 좋으니 한번씩 기계를 돌려야지. 잘리면 달리 할 일도 없는데, 비굴하게나마 버텨야지 않겠는가.

* 절 보면서  "할일은 다 하겠거니"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오해를 풀어드릴 목적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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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2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저는...꼭, 짤리지 않을 만큼만 하고 있습니다.-.-;;;; (덩달아 고백)

sweetmagic 2004-05-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무서운 실험실 얘기 해드려요 ? 전 작년 천둥치고 비 오던 어느날 실험실에 갖혔습니다. 혼자서.. 그것도 안에서......히필 그 으스스 스산하던 날 문이 고장나 버렸고 전 밤까지 꼼짝없이 갖혀 있었더랬죠.....뒤늦게 오신 열쇠아저씨도 이유를 모르겟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셨고, 결국 창문 쇠창살 전기톱으로 썰어내고 건네 받은 열쇠아저씨용 드릴로 문을 거의 부수다 시피해서 탈출에 성공했죠. 지켜보던 수위아저씨 수위 경력 20년이 넘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시라며 혀를 내두르셨다는.... 해골에 전신 뼈다귀까지 있는 서른 평도 넘는 저희 실험실.....팔다리 각각실제 인체를 떠낸 석고 모형들은 불을 꺼도 퍼런 빛이 납니다. 흐흐흐 저희 실험실 기계들은 아무리 비싸고 좋은 거라도 오래되서 정이 안가는데 님은 그 좋은 환경에서 뭐 하세요 ? 저랑 바꿔요 !!! 이번 글은 좀 얄밉군요 님 !!!!!!! - 사실은 많이 얄미움 - 세상에 거기는 실험기기 일지도 안 쓴데요 ?????연구비 안따고 논문 안씀 교수평가점수는 뭘로 받나요 ? 대학종합평가....전 그것 때문에 등골이 휠지경인데...**학교 **교수님은 조오.........켔다~~~!!! ( 순간, 흥분했음 )

다시....

님 ^^ 그냥 그 페이스 유지하세요. 실험은 무슨 실험이예요~~ 대학종합평가 같은 건 잊어버리세요~ 평가가 뭐가 중요해요. 그냥 귀찮은데 기계도 그냥 두세요 힘드신데... 실험은 무슨 실험이세요 그냥 술이나 드시고 유흥이나 하세요 ~~ 인생은 즐기는 거잖아요 ~ 방긋방긋 - diabolic magic-

2004-05-24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렌초의시종 2004-05-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자리가 사회인의 고해성사 자리가 될 듯한 묘한 예감이;;; 그런데요, 왠지 마태우스님을 보고 있자면, 할 일을 안하시는 그모습이 왠지 마태우스님의 진정한 할 일같다는 생각이......^^;

마냐 2004-05-24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스윗매직님이 흥분하실만 하다는 생각도 슬며시 고개를 드는군요....ㅋㅋㅋ

panda78 2004-05-24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후....

마태우스 2004-05-25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들어본 적 없어요. 저희 학회 안나오시는 분 같은데요
panda78님/그 웃음의 의미는????????
마냐님/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바르게 살께요. 제가 글 안올리면 "사람 됐구나!"라고 생각해 주시길....
sweetmagic님/하, 한번만 봐주심 안될까요? 컴퓨터도 비싼 건데 활용해야죠... 아, 앞으론 잘할께요....
로렌초의 시종님/너무 심오한 말씀이라 이해가 잘 안가지만, 어찌되었건 전 고해성서를 발판으로 바르게 사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진우맘님/그래서 님이 부럽습다.

작은위로 2004-05-2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할 것 같아 부럽다는... 저희 사무실은 좁은데 목소리 큰사람이 많아서 일하고 싶어도 일하기 싫어지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 ... ... 님.. 놀고싶어도 매일매일 목표관리일지를 써야하는 저로서는 안하고는... 짤릴것같아서... 하는 척이라도...ㅜㅠ 해야 한답니다. 부러워요~ 부러워요~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