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운 얘기지만, 강의준비를 제대로 안하고 강의를 할 때가 있다. 내가 하는 강의준비란 어떻게 하면 애들을 좀 웃겨볼까 하는 거지만, 준비가 부족하면 유머도 잘 안된다. 학생들이 갑자기 무서워지고, 억지로 짓는 내 미소는 비굴해 보인다. 누군가 엎드려 자는 포즈를 취하거나, 하품을 해버리면 더더욱 땀이 난다. 반면 준비가 잘 된 경우엔 애들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멋진 강의-내 딴엔-를 할 수 있다. 애들과 호흡도 맞고, 애드립도 어쩜 그리 적절히 구사되는지.
예비군복을 입으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건, 그 군복에 마법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 옷을 입으면 고통스러웠던 2년여의 기억들이 떠올려지고, 이유없는 반항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스스로 택한 게 아니라 억지로 끌려간 것도 억울하고, 군 생활 중 겪어야 했던 기합과 구타의 기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금같은 시간에 예비군 훈련에 동원되어 시간을 죽이는 것도 아깝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그래서 예비군복만 입으면 퇴행을 한다. 아무 곳에나 소변을 갈기고, 걸음도 이상하게 걸으며, 통제에 전혀 따르지 않는다. 이렇듯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을 다독이면서 수업에 참여시키려면 몇배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비군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별로 그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강사로 초빙되는 사람들 중 귀가 솔깃할 얘기를 한 사람을 난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온, 북괴에 대한 위협을 과장하고, 주한미군이 없으면 큰일난다고 하고-이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너무 오래 들어온 얘기라는 거다-투철한 안보관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안보의식이 해이해서 큰일이라고 한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만사 귀찮은 예비군들이 자버리는 거다.
어제 온 교관도 그랬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해 한시간을 얘기했다. "북한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같은 민족이니 인적 자원은 똑같고, 지하자원은 북한이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잘살고 그 나라는 못사느냐(북한의 굶주리는 실상을 십분간 얘기함). 그건 북한이 공산주의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택하기 때문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더 잘 살았지만, 70년대에 비슷해지고, 80년대에 역전이 된 것은 그런 이유다. 공산주의를 택한 나라들이 다 망했지 않느냐"
가장 극악한 독재가 행해지던 70년대, 80년대를 논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운운하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더 한심한 것은 공산주의의 반대말을 자유민주주의로 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파워포인트로 근사하게 뽑은 슬라이드가 아깝다. 이런 강의를 하면서 안자길 바라는 게 이해가 안가지만, 그는 강의 중간중간 자는 애들보고 일어나라고 했고, 조교들은 돌면서 애들을 깨웠다. 그도 인간이니 우리가 자기 강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텐데, 왜 해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얘기를 하는 걸까. 김병조가 나오는 안보 동영상도 최첨단 미디어가 부끄럽게 옛날 얘기만 하고 있다. 그런 동영상을 만들 돈이 있다면 용천에나 보내지. 도대체 그런 예비군 훈련을 왜 하는 걸까 언제나 의문스럽다. 그걸 할수록 국가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는 느낌인데 말이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지-이리저리 굴려 가면서...-이런 식이라면 예비군 100개 대대가 있어도 적 특공대 10명을 막지 못할 것 같은데...
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온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때였다면 그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비군을 폐지하기엔 너무 많이 왔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졌으니까. 지금 예비군 동대장은 십몇대 일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할 정도로 인기 직종이 되어 버렸다. 없앨 수 없다면, 제대로라도 했으면 좋겠다. 수많은 돈을 써가면서 국가에 대한 불만만 증폭시키는 현재의 방식은 문제가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훈련이 끝나고 차비 3천원을 받는 심정은 복잡다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