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그러셨지만 어머님은 내가 밥먹는 걸 좋아하신다. 삼십년이 넘도록 밥상을 차리셨으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요즘도 어머니는 내가 집에서 밥을 먹겠다고 하면 춤을 추신다.

오늘 저녁을 먹을 수 있냐고 물으셨다. "오늘 안되는데... 내일, 모레, 그러고보니 이번주엔 집에서 한끼도 못먹겠어요" 원래 아침을 안먹으니, 내가 집에서 밥을 먹는 건 토요일 아침이나 가능할 것 같다. 어머님의 표정이 울상이 되신다.
"어쩌냐. 내가 흑돼지 사 놨는데... 놔두면 변하는데..."
그래서 난 "도시락으로 싸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고, 어머님은 너무 신나하시면서 도시락을 싸셨다.

오늘 점심은 그래서 어머님이 싸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어머님은 "렌지에 데워 먹어라"고 하셨지만, 난 찬밥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그건 밥을 빨리 먹어야 하는 슬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테이블에 도시락을 놓고, 흑돼지에 김치를 싸서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그러고나니 시간도 절약되고 몸도 편하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과 밥을 먹는 게 싫다. 같이 먹는 사람과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영 부담스러워서다. 앞으로도 계속 싸달라고 할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매일 그러는 건 어머님이 귀찮으실 것 같아 안그러기로 했다.

되돌아보면 나의 역사는 도시락의 역사고, 오늘의 나를 만든 건 팔할이 도시락이다. 대부분이 고교 때까지만 도시락을 싸가지만, 난 대학에 다닐 때도 줄기차게 도시락을 쌌고, 조교 시절에도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엥겔계수 60을 넘기는 게 목표셨던 어머님은 도시락 하나만은 근사하게 차려 주셨고, 그래서 친구들은 나와 밥을 먹기를 좋아했다. 친구들 셋이서 라면집에 가서 라면을 먹고, 내 도시락을 말아 먹으면 저녁 늦게까지 배가 불렀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른을 훨씬 넘긴 이 나이까지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면 되겠는가?

어머님께 가끔 여쭤본다. "엄마는 제 밥 차리는 게 귀찮지 않아요?" 엄마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이렇게 반문하신다. "넌 벤지밥 주는 게 귀찮니?" 생각해보니 그렇다. 난 벤지밥을 언제나 기쁜 맘으로 주고, 벤지가 밥을 그 자리에서 다 먹으면 무지하게 대견해하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혼자 살면서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렇게 날 사랑해주시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엄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들을 씻으실 때는 죄송스러운 생각이 든다. 어머님도 이제 육십대 중반에 다다르셨는데, 언제까지 어머니를 혹사시킨담? 놀지만 말고 나도 요리학원이나 다녀볼까 싶다. 나를 위해 수없이 밥상을 차리신 어머님께 근사한 저녁이라도 한번 차려드려야지. 요리학원이 물도 좋다지 않는가?^^  그게 안되면..요리책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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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4-0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도 먹어~" "아니, 난 늬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
어느 집에서나 한 두 번 쯤은 오고갔을 법한 대화. 자식을 낳아보고 새삼 실감한 것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정경처럼 뿌듯한 게 없더군요. 밥상 차려드릴 궁리보다, 머리 맞대고 맛있게 밥 먹는 모습 한 번 더 보여드릴 궁리를 해 보세요.^^

비로그인 2004-04-06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님의 글 '좋은생각'을 읽는것 같네요. 아름다워라~

플라시보 2004-04-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어머니가 요리를 잘 하시나 봅니다. 우리 엄만 솔직하게 말 하자면 나보다 한 3배 정도는 못 하십니다. 그래서 엄마가 이혼해서 집을 나가기 전 까지는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싸 가기도 하고 아버지의 그녀 (음식솜씨 와방이었습니다.)가 싸주기도 해서 잘 먹고 다녔습니다. 한동안 도시락을 잊고 살다가 이 회사로 옮기면서 부터 도시락을 싸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별 이변이 없는한 저녁에 밥해 먹으면서 낼 도시락 반찬을 만들어 놓고 아침에는 밥만 쌱 퍼서 가져갑니다. (간혹 아침에 후닥닥 거리며 하기도) 도시락의 좋은점은 우선 싸게 먹힌다. 둘째 메뉴 고민을 머리터지게 하지 않아도 된다. 셋째 혹 다이어트 하려는 자들이 있다면 사 먹을때 보다 같은 양을 먹어도 살이 현저히 빠짐을 느낀다 입니다. 어머니가 많이 귀찮아 하시지 않는다면 일주일에 이 삼일이라도 도시락을 싸 보세요. 살이 쭉쭉 빠질겝니다.(제 주변에 그렇게 해서 살뺀사람 많습니다. 흐흐.)

쎈연필 2004-04-06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의 도가니탕입니다.....

마냐 2004-04-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멘트가 죽이는군요....'넌 벤지 밥 주는게...' 모전자전...그 상황에서 저런 코멘트가 나오다니...

책읽는나무 2004-04-0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의 정성스런 밥의 비유를 벤지밥으로......ㅋㅋ....저도 어머님의 멘트에 두번 웃었습니다...^^
님도 도시락과의 질긴 인생이었군요....하지만...사먹는 밥보다는 도시락이 훨 영양만점아니겠습니까??....시간,돈,머리를 덜써도 되고(오늘 뭘 먹을까?? 고민).....갑자기...저도 대학다닐때 용돈 좀 아껴볼 요량으로 도시락을 싸다녔습죠!!...그땐 이모가 싸주시긴 하셨지만...친구들과 식당에 앉으면 항상 내도시락 먼저 까먹고...나는 친구들 돈주고 산 밥을 대신 먹었던것 같네요...^^...
님의 어머님 님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전해집니다...내친구하나는 팅까팅까 놀다가 요즘 공무원 시험친다고 도시락 싸가지고 도서관에 다니는데....친구어머님...가라는 시집은 안가고 나이 서른이 다되었는데 내가 도시락 싸준다고 막 구박하신다는군요....ㅋㅋ....님은 참 행복하십니다...^^

갈대 2004-04-06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시절 도시락 2개씩 싸가지고 다녔는데 점심은 그럭저럭 먹을만 했지만 저녁은 완전히 찬밥이 되어 있었죠^^

panda78 2004-04-10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님이 너무 좋으세요-- 벤지도 귀엽고-- 마태우스님은 행복하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