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여쭤보러 들어왔어요.. 다름이 아니라 제 친구S양의 친구....가 얼마 전에 그 병원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더니 걸리는 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로 물질적인 증거가 없구요, 그리고 병원 사람들을 포함해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수치심에 신고를 꺼리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신고를 했을 경우, 그 의사놈이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하지 않을까란 문제가 있구요.. 그럴 경우 지금 뾰족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곤란한 입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 아가씨 요즘 계속 울기만 하고 남성 혐오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는데,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무언가 뾰족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쭤보러 왔어요...ㅠㅠ 법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면 찾아가서 두들겨주고 오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그 아가씨를 어떡해서든 도와주고 싶어요...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ㅠㅠ]
이 글을 보자마자 불끈 분노가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그간 여성을 위하는 척만 했던 내가 드디어 뭔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혼자 별 욕을 다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다시금 글을 올렸다.
[그 아가씨는 환자로 병원에 갔다가 의사놈에게 당한 것이구요, 꼬리뼈쪽이 아파 찾아갔다고 합니다. 직원을 건드리든 환자를 건드리든 성범죄는 용서못할 짓이지만, 환자를 건드렸다니 아무튼 개밥에 말아먹을 놈입니다. 진료를 받으러 들어갔는데 간호사도 들이지 않고 의사 혼자 맞이했구요, 텔레비전을 켜 놓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물리치료 같은 걸 하는 척 하며 손을 놀려 파열이 되었다고 하네요.. 병원은 홈페이지를 들어가니 내과 외과 소아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방사선과 이비인후과 등등을 진료하는 곳이네요. 규모가 자세히 나와있진 않아서 얼마나 크거나 작은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원장놈이란 작자가 가정의학과 전문의라서요.
그게 2주 전의 일입니다. 서둘러 진단서를 떼어야 한다고 했더니 의사들이 한 통속이라 잘 안 해 준다는 이야기를 하네요... 민이 오빠, 혹시 진단서(소견서?)를 써주실 의사분을 소개해주실 수 있다면 알려주셔요... 상담소에 의뢰하면 의사 문제도 해결이 되는 건지도 궁금하구요.. 환자를 건드리는 파렴치한 색히가 다시는 병원원장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그냥 이 아가씨 혼자 울면서 지나가면, 그런 놈은 다른 환자에게도 손을 뻗게 될 지 모르니까요...]
2주라... 당장 진단을 받는 게 중요하거늘,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라도 진단을 받는 수밖에. 난 여성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여자 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갑게 내 전화를 받는 그녀는 하지만 내가 그 문제를 거론하자 당황하는 듯했다.
"민아, 그게 말야, 좀 민감한 문제라서..."
그럴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성폭행은 대개 물질적 증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잡아뗄 경우 입증이 힘들며, 명예훼손 운운하며 피해자 쪽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성폭행을 당한 대학원생을 대리했던 동국대 조은 교수의 사례나, 박남철 시인의 성폭력 사건에 관여한 김모시인이 겪은 일들을 보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사람이라면, 성폭력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긴 해도, 내 동창의 신중한 태도는 좀 아쉽다. 평소 사회정의를 역설하던 그녀라면 내 얘기에 같이 분노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공감 정도는 해줄 줄 알았었는데. 그래도 그녀는 있는 그대로 정도는 진단해 주겠단다. 피해자에게 유리하게가 아닌, 보이는대로 말이다. 성폭력 사건의 민감성에 비추어 보면, 그정도라도 해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이 사건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는 알 수 없다. 그 친구가 쓴 글을 읽어봤을 때, 이 여성도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처럼 중간에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 의사로 인해 더 많은 여성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건 중단되어서는 안될 싸움이지만, 그 싸움이 피해자에게 두배, 세배의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고려하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강요만 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의지지만, 그런 의지가 없다고 피해자를 탓하는 건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결과를 빚으니까.
남자는 성폭력을 '순간의 실수'라고 둘러대지만, 그 '실수'가 여자에게는 일생을 따라 다니는 공포가 될 수도 있는 법,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관대하다. 조직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동원되고, 가해자의 인권이 들먹여진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가 성폭력의 천국이 되어 버린 이유가. 한가지만 기억하자. 우리의 아내와 딸들도 다 여자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