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채팅을 그리 많이 한 건 아니다. 채팅보다는 말로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해서기도 하고, 채팅이란 '이성을 꼬셔서 어떻게 한번 해보자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믿는 편견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세이클럽에 접속을 했고, 그 친구의 충고대로 '별을 기다리는 소년'이란 방을 만든 뒤 언젠가 올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몇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그런 곳에는 여자 아이디로 접속을 하면 일대일 대화를 신청하는 쪽지가 무진장 온다는데, 그렇게 심한 경쟁을 뚫고 내 접선을 받아들일 여자는 없었던 거다.

그러던 어느날-그때가 2001년일게다-프리챌에 글을 쓰는데 쪽지가 왔다. 여-자-다! 그것도 모르는 여자. 혹시 누구 아니냐는, 사람을 꼬실 때 쓰는 상투적인 멘트. 그걸 계기로 난 그녀와 1: 1 채팅을 했고, 몇 번 그러다가 채팅을 답답해하는 내 제안에 따라 전화 통화까지 했다. 나보다 한 살 적은 유부녀란다. 유부녀, 유난히 부담이 없지 않는가? 난 취미가 테니스임을 밝혔고, 그녀는 테니스를 배우겠다며 한번 만나자고 했다. 오오, 내게도 이런 일이! (참고로 내가 원한 것은 술친구였다. 진짜다! 술친구가 그리도 많으면서, 라고 물을지 몰라도, 그땐 여자 술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난 연습용 공을 잔뜩 사가지고 그녀 집이 있는 광명시까지 갔다. 약속대로 빨간옷을 입은 여자가 벤치에 앉아있다.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 난 사실 도망가고 싶었다. 이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인지상정이고, 게다가 난 눈도 그리 높지 않은 터이지만, 그녀는 흑흑 너무도 안이뻤고, 몸집도 겁나게 컸다.

그날 난 몇시간 동안 그녀에게 공을 던져줬고, 그녀는 엄청난 힘으로 그 공들을 쳐냈다. 하늘높이 날라가는 공들을 보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한탄했다. 그 뒤부터 난 매주 토요일마다 그일을 했고, 밥값도 매번 내가 냈다 T.T 금요일쯤 되면 제발 비나 눈이 오라고 빌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위기를 빠져나갈까 고민고민 하던 끝에, 애인이 생겼고, 그래서 더 이상 테니스 레슨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기성 편지를 그녀에게 썼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 편지는 너무도 명문이어서, 그녀 뿐 아니라 나도 감동해 마지않았는데, 추후에 써먹을 용도로 저장해둔 그 편지는 디스켓이 에러가 나면서 다시 복원이 불가능해졌다.

어찌되었건 난 그녀로부터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그 뒤부터는 누가 채팅을 해서 어찌어찌 했다는 무용담들에 일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도 난 채팅을 싫어해, 지인들끼리 대화를 주고받는 MSN도 하지 않는다(그렇다고 내가 독수리타법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일분에 400-500타 정도는 친다). 할말이 있으면 말로 하자, 이게 내 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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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3-22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도 재미 있어서 눈물이 나려합니다.^ ^ 저도 대화는 상대방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노는 걸 선호합니다. 지인들과 메신저로 만나는 것도 영 적응을 못하고, 무조건 바쁜 척 하죠.

연우주 2004-03-2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팅해서 2번 만남을 시도했던 적이 있고, 그 중 한 친구랑은 아직 메신저 친구인데 최근 거의 대화 안 했구요. 한 사람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구요...^^;
한창 채팅 열심히 했던 때가 저도 있긴 했는데, 2000년쯤이 그랬구요. 작년 8월에도 몇 번 한 적이 있구요. 그 이후엔 또 안 하게 되네요. (암튼 별 걸 다 해 봤네요.--;)

가을산 2004-03-23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팅은 96-99년 하이텔 시절에 많이 했었는데...
그땐 텍스트 위주의 게시판으로도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방에서 동호회의 전국운영회의도 했었는데, 오히려 요즘은 그럴 기회가 더 적은 것 같아요.
님들 말대로 채팅보다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 것인지?

비로그인 2004-03-2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도 진짜 테니스를 할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에라이~운동이나 배우자" 하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한담 마태우스님이 상처를 받을까요? 낄^^낄(야비하게)

마태우스 2004-03-2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바겐님/이번에도 최고의 코멘트로 뽑혔습니다. 부상으로 뭘 드리지?? 제가 전에 드린 태극기는 잘 쓰고 계시는군요.... 생각좀 해볼께요^^

연우주 2004-03-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폭스가 승승장구 하시는군요~~^^

2004-03-23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연엉가 2004-03-23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겁나게 웃었습니다. 아마 마태우스님은 정이 많은 분이가 봅니다. 안좋게 말하면 거절을 잘 못한다고나..(히히)
그 후로는 채팅에 채자도 들먹이기 싫었겠네요.

마냐 2004-03-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팅의 추억' 장난 아닙니다. 캬아~ 어쩐지 부럽기두 하구...한번도 낯선 이와 채팅을 못해봐서리.....제가 쉰세대로 가는 증거라 여겼는데...암튼, 마태우스님 마저..그런 추억이 있다니 샘 나는군요. ㅋㅋㅋ 적당히 그 다음부터 안 가도 그만일것을, 상당히 독특하십니다.

sooninara 2004-03-2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줌마들이 챗팅을 다한다기에 늦은 34살 처음으로 챗을 해보았습니다..
그나마 순발력이 있던 저는 다음카페 챗방에서 한달만에 챗언어 배워서 '방가'..'하이루'등을 써가면서 챗방을 휘어잡았었죠..(30대 이상 386세대 위주의 카페라서 30,40대 위주라 금방 날아다니게 되었습죠..) 그때 챗에 빠져서..남편은 텔레비젼보고..저는 그옆에서 챗하고^^
저는 오히려 남편앞에서 떳떳하게 챗하면서 이사람은 누구고 ,,이사람은 누구다..하면서 남편의 방해를 차단시켰답니다..그러다 어느날...유명한 세이클럽까지 진출해 보았는데..
마태우스님의 '별을 기다리는 소년'은 못봤는데..(전 2002년에 들어가서)
세이클럽은 음악듣기가 유명하더군요..아마츄어가 음악방을 열어서 방송을해서...음악 들으러 갔다가..챗까지 햇는데..그나마 순진하던 다음카페하고는 비교가 안되더군요..그래서 세달만에 챗에 미친 생활을 마감하고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지금은 하도 챗을 안해봐서...
(제가 독수리 타법으로 챗할때는 상대방이 제가 독수리라는것을 모를만큼 날아가게 자판을 쳤다는거 아닙니까? 지금도 독수리인데..이젠 늙어서 오타도 많이 나고 챗할때만큼 속도가 안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