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생, 잠깐 나 좀 보죠.”
학장이 불렀을 때 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불도저’란 별명처럼 그는 학장이 되자마자 ‘리모델링을 한다’ ‘실험실을 통합한다’ 이러면서 학교 전체를 공사판으로 만들어 버렸고, 난 그걸 앞장서서 비판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학장의 말은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마선생, 그만둬야겠어.”
이, 이건 무슨 소리인가? 연구업적도 상위권이고, 강의평가도 괜찮은 나한테 그만두라니? 학장의 다음 말도 내 상상력을 가볍게 비웃었다.
“제보가 들어왔어. 마선생이 에이즈라더군.”
학장이 말한 에이즈가 내가 아는 에이즈가 맞는지 난 한참을 생각했다. 그게 맞단다. 학장의 설명은 이랬다.
“에이즈에 걸린 여자를 우리 병원서 붙잡아놓고 있는데, 그 여자 말이 마선생과 잤다더군.”
난 2년 전에 결혼했고, 그 이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 게다가 난 학장이 내민 사진 속의 여자와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만난 건 사실이잖나?”
“작년 세미나 때 제 옆자리에 앉았어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학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알긴 아는 거군, 맞지?”
그날 난 저녁 약속이 있어서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바로 뛰어나갔고, 그 이후엔 그녀와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나랑 잤다고 우기고 있다.
“대체 어디서 했답니까?”
학장은 씩 웃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모두 나간 뒤 의자 위에서 했다더군.”
에이즈를 검사하는 방법은 내 혈액 속의 항체를 검사하는 ‘웨스턴 블롯’과 에이즈 바이러스의 DNA를 증폭시켜 진단하는 'PCR', 이 두가지가 널리 쓰인다. 난 진단검사의학과에서 피를 뽑혔고,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두 검사에서 모두 음성이 나왔다. 하지만 학장은 그 결과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검사에서 음성이라고 자네가 에이즈가 아닌 건 아니야. 그 검사의 민감도가 100%가 아니라는 건 자네도 알지? 무엇보다 그 여자가 일관되게 자네와 잤다고 얘기하고 있어. 에이즈가 잠자리를 통해 전파되는 건 자네도 알지?”
여자의 증언은 별로 일관되지 않았다. 처음에 의자에서 했다고 하더니만 벽장 뒤라고 진술을 바꿨고, 나중에는 근처 모텔에 갔다고 했다. 하지만 학장은 이렇게 우겼다.
“그래도 했다는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지 않은가? 저 여자가 했으니까 저러지, 안했는데 왜 저러겠는가?”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학생들도 “마선생이 에이즈래!”라며 수근대고 있었고, 학부모들은 “에이즈 교수가 있는데 학생을 보낼 수 없다”며 학교 측에 항의를 했다. 내 문제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게 아니었고, 교수회의에서 3차례에 걸쳐 조사를 한 뒤 최종판결을 내리겠다는 게 학교 측의 방침이었다.
“마선생, 혹시 테니스 치나요?”
교수회의에서 이 질문이 나왔을 때, 난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네, 칩니다만....”
“그 테니스라는 게 격렬한 운동이지요?”
난 질문을 한 최교수를 잠시 쏘아보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선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격렬한 운동을 좋아하는 거군요?”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그 다음 질문도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다. 자주 쓰는 체위는 뭐냐, 성해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말에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다행스러운 건 교수회의에 참석한 다른 교수들이 내 편을 들어준다는 거였지만, 난 이 모든 게 짜증스럽기만 했다.
이 모든 게 차기 학장이 유력시되는 날 견제하기 위한 현 학장의 계략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내게 이상한 질문을 던진 측도 ‘학장파’로 분류되는 학장의 꼬봉들이었다. 원래 난 이달 6월에 실시되는 학장선거에 출마할 마음도 없었다. 올해 목표는 그저 논문 15편이었을 뿐, 귀찮게시리 학장 같은 걸 왜 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소장파들 사이에서 날 지지하는 측이 꽤 많았고, 재선을 노리는 현 학장 측에선 그걸 위협으로 느꼈던 거였다. “에이, 이렇게 된 거, 선거에 출마해 버릴까?”
최종 발표가 있기 전날, 내 기분은 영 뒤숭숭했다. 에이즈가 아니라는 결정이 나올 게 거의 100%였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난 에이즈 교수라는 오명을 씻을 수가 없게 됐으니 말이다. 실제로 동료들은 나와 악수도 잘 안하려고 했고, 어쩌다 만나도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나원참 교수는 심지어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물증이 없어 음성이 나온다 해도 도덕적으로는 이미 에이즈야!”
학생들도 그랬다. “전 교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도 내가 고맙다는 뜻으로 손이라도 잡으려면 황급히 손을 뺐으니까. 학장 측의 계략은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에이즈라는 게 환자와 잔다고 무조건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결정문을 읽어내려가는 강교수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하품을 해버렸다. 한달 새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피로가 누적된 탓이었다. 강교수가 잠시 읽기를 멈추고 불쾌한 표정으로 날 째려봤다.
“여자의 증언에 전혀 일관성이 없고 정황으로 봐도 맞지가 않은데다....해서 본 회의에서는 마선생의 에이즈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란 판단을 내리는 바입니다.”
그 말을 듣는순간 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끝이다. 학장에 나갈지 안나갈지는 모르지만, 이제 이런 일로 불려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난 여러 사람으로부터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았다. 학장이 내게 다가왔다.
“마선생, 자네 나병이라며?”
피로가 싹 가셨다.
“네? 뭐라고요?”
학장이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보가 들어왔어. 우리 병원에서 붙잡아 두고 있는 나병 환자가 있는데, 자네와 4년 전 방을 같이 쓴 적이 있대. 아, 이건 자네가 에이즈가 아니어서 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제보가 들어왔을 뿐이야. 제보가 사실이라면 나병에 걸린 교수를 강의하는 데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내일부터 조사할테니 협조 좀 해주지.”
한달 남짓 고생했는데 다시 또 조사를 받아야 한다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학장님, 그만하시죠. 사실 저 에이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