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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빅토리아의 발레>를 읽게 된 건 내 정신적 스승께서 추천해 주신 책이어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쓴 스카르메타의 작품이기에 전작 정도의 재미를 기대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주인공 앙헬이 출소를 하고, 간수가 그를 죽이라며 다른 죄수를 풀어주는 첫장면부터 "이거 너무 재밌잖아!"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후 난 책을 덮을 때까지 높이 12미터짜리 파도에 버금가는 재미에 몸을 적셔가며 책을 읽었다. 30페이지 정도를 남겼을 땐 마침 운전 중이었는데, 결말이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차가 밀릴 때마다 두어줄 씩 읽다보니 차가 밀리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제목만 보면 <빌리 엘리어트> 비슷한 얘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피노체트 이후의 칠레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민주화라는 게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칠레처럼 군부독재를 겪은 나라의 국민으로서 감히 말해 보자면, 군사정권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 같다. 이 정권만 무너지면 모든 게 다 잘될 것이라는 허황된 꿈을.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 우리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책에 대해 다시금 말해 보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스카르메타의 글솜씨는 참으로 뛰어나다. 스피디한 전개로 읽는 사람이 숨을 못쉬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책 곳곳에 보석같은 표현들을 배치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예컨대 이런 표현.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는 나머지 마린(성에 대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내)은 손으로 셔츠를 다림질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133쪽)."--> 이걸 세명 정도의 지인에게 말해 줬는데, 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만 재밌었나봐.
"그는 음식을 구걸하는 대신 말의 이빨 사이에서 빼낸 홍당무 반쪽을 씹어먹는 걸로 자존심을 만족시켰다 (171쪽)"--> 아이들이 말똥에 섞여 나온 곡식을 꼬챙이로 집어먹는 것으로 굶주림을 표현한 <칼의 노래>에 버금가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아쉬운 점을 말해 본다. 이따금씩 발견되는 오타는 별로 아쉽지 않았지만, 앙헬과 빅토리아가 질문을 주고받으며 시험공부를 하다 나온 다음 문장은 명백한 오류다.
앙헬: 담즙이 뭐지?
빅토리아: 췌장의 분비물이야.
담즙은 담낭에서 농축되어 담도로 배설되는 소화액이지 췌장의 분비물은 아니다. 이것 역시 책 전체로 보면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전공이 전공인지라 이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