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고교에서 과학을 주제로 한 강의가 있었다.
외진 곳에 있는지라 비싼 택시비를 치르면서 그 앞까지 갔다.
경비 아저씨에게 가서 강의 때문에 왔다고 했다.
그가 말한다.
“애들 수업 다 끝나가는데 무슨 강의야?”
그냥 특강이라고, ‘3층 홍보관에서 한다’고 답했다.
그가 한 곳을 가리키기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경비 아저씨가 쫓아온다.
진짜 강의 맞냐고 묻는다.
맞다고 하면서 계속 갔다.
그는 나를 쫓아 학교 건물 안까지 들어왔다.
2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 아니, 강의하러 왔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믿고 그래요?
경비: 어떤 강의인지 얘기해야죠!
담당 교사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자, 보세요. 여기 강의 부탁한다고, 3층 홍보관으로 오라고 써있잖아요?”
그는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고 했다.
참고 참았던 짜증이 확 터졌다.
“아 진짜. 말하면 좀 믿어야지 진짜. 내가 강의하게 해달라고 빈 게 아니라, 여기서 요청해서 온 거라고요.”
일을 보고 온 다른 경비가 합세했다.
당연히 그는 경비를 편들며 나를 공격했다.
“알았어요. 강의 안해. 안하면 되잖아요?”
결국 난 교문 밖으로 나갔다.
몇 년만 젊었다면 그냥 난 집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진 않았다.
대신 담당 선생님한테 문자를 보냈다.
놀란 선생님이 달려나옴으로써 이 다툼은 일단락됐다.
경비는, 미안하다고 했다.
속좁은 난 그 사과를 받지 않았다.
그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많은 여학생이 있는데다, 남학생이라고 해서 일을 당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
그 경비가 예민하게 구는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강의하러 왔다는 사람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이 사태의 책임은 1차적으로 경비실에 미리 얘기를 안해놓은 학교 측에 있다.
내게는 책임이 없을까?
경비가 날 불신했을 때, 담당 선생에게 전화해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 그렇게 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난 왜 문자만 보여줬을 뿐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내게 잠재해 있던 피해의식이 발동된 탓이리라.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난 강의를 하고 다니는 사람의 외모는 아니다.
그 경비는 그래서 날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쁜 경비’라고 생각해 버렸고,
내 힘으로 이 관문을 뚫지 않으면 내가 지는 거라는 유치한 판단을 내렸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 말을 했더니, 아내가 명쾌하게 정리를 해준다.
“야, 니가 어딜 봐서 강의하게 생겼냐? 게다가 그 인형까지 들고서.”
내 팔을 보니, 곰을 닮은 개 인형이 들려 있었다.
난 올해부터 동물보호단체인 ‘케어’의 홍보대사가 됐고,
그 인형은 오늘 열린 ‘개고기 반대 집회’에서 받은,
문재인 대통령이 입양한 개 ‘토리’의 인형이었다.
다시금 정리를 하자.
바바리맨처럼 생긴 중년남자가 곰인형을 팔에 끼고 들어온다면,
그리고 그가 ‘강의하러 왔어요’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그냥 통과시켜 준다면 좋은 경비는 아니리라.
그러니까 오늘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토리인형이 져야 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분실물 신고 땜시 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 중 하나가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면서 수배자 전단을 확인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