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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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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환경운동과 녹색 사상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역자의 후기(그리고 뒷표지 상단에 자리잡은 출판사의 카피)는 과언이 아니었다. <프랑스 대혁명사>로 유명한 쥘 미슐레의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자랑이 처음에는 허풍 떨기 좋아하는 출판사의 과장된 광고에 불과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자연에 관한 책이라고, 그리고 오래전(19세기!)에 출간되었다고 해서 녹색사상의 대표적인 고전에 반열에 올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바다라는 큰 세계의 일은 현실적이다. 바로 사랑하고 번식하는 일이다. ... 이것이 바다다.  
 바다는 지구의 거대한 암컷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으로, 영원한 수태로 새끼를 낳는다.
 절대로 끝이란 없다
.” (103쪽)

이 지구상에 처음으로 생명을 낳은 바다는 인간이 그 질서를 존중할 줄 알고 
 그것을 깨뜨리지 않고 참을 줄만 안다면 그 복 받은 양식을 기꺼이 내놓을 것이다. 
 지구의 안녕을 위해서 바다 고유의 신성한 생명과 그 완전히 독자적인 기능을
  잊지 않아야 한다.
” (295쪽) 



녹색사상가들의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미슐레의 이러한 글들이 새롭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경이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 이유는 미슐레의 지구와 바다에 대한 ‘탈근대적 견해’가 세상에 나온 때가 19세기라는 것이었다.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에 자연이란 것은 인간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고 개척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었다.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이성’에 대한 회의가 가능했다. 인류는 이성적 존재인 자신들이 저질렀던 끔찍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결과를 보고난 후, 그리고 자신들이 이용한(파괴한!) 자연이 되돌려준 끔찍한 결과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녹색사상과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이러한 경험의 토대에서 가능했다. 그런데 19세기에 씌어진 이 책의 사상은 ‘탈근대적’이며, 자연속의 인간(인간을 위한 자연)이라는 동양적 자연관과 녹색사상의 견해가 완벽히 담겨 있다. 미슐레의 이 책은 21세기인 지금 읽어도 전혀 낡은 것이 아니었다.
 


미슐레의 책을 읽으며 또 하나 느꼈던 것은, 한 사회의 지적 전통과 지식의 축적의 중요성이다. 유럽을 뒤흔들었던 대항해 시기의 경험, 대양을 누볐던 이들이 남긴 경험담과 기록이 없었다면 미슐레의 바다에 대한 이 광대한 사고와 지식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표해록>이나 <자산어보>와 같은 귀중한 저술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절대적인 수가 너무 적었고 바다에 대한 경험을 ‘기이한 이야기이거나 천한 사람들의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에서는 이러한 저작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저술은 왕성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지고 관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이러한 뛰어난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우리에게는 없는) 그들의 지적 전통이 부럽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대서양을 바라볼 수 있는 프랑스 서쪽 바닷가 절벽 위에 서있는 기분이 들다가도, 잠수정을 타고 바닷속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고, 때론 큰 범선을 타고 극지의 차가운 바다와 적도의 뜨거운 바다를 횡단하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에 관심이 없더라도, 지금은 낯선 19세기의 고색창연하고 우아한 문체를 싫어하는 독자라도 읽다보면 여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날 것이다. 바다가 달라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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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무한 혁신의 비밀 - 스티브 잡스를 움직이는 7가지 특별한 원칙
카민 갤로 지음, 박세연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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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아이팟으로 애플을 세계 무대에 화려하게 재등장시키고, 2006년 아이폰으로 세계를 재패했으며, 2010년 아이패드로 애플을 브랜드의 경지로 끌어올린 스티브 잡스. 아이북, 맥북, 아이폰, 아이팟, 그리고 아이패드에 이르기까지 잡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휴대전화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음악과 영화, 컨텐츠 시장에서의 변화에 가속도를 높여 놓았다. 만약에 잡스가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사라져버렸을거다.

 

전작 <스티브 잡스 프리젠테이션의 비밀>에서 매번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잡스의 프리젠테이션 기술, 그리고 그가 만들어 온 메시지의 원칙 등을 살핀 저자 카민 갤로는 이번 책 <스티브 잡스 무한혁신의 비밀>을 통해서는 스티브 잡스와 애플을 관통하는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7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카민 갤로는 10년 넘게 잡스를 밀착 취재해온 가히 '스티브 잡스 전문가'로 불리우는 기자출신 작가이며, 이후 기업에서 커뮤니케이션 테크닉을 전수하는 코치로 활동하며 잡스를 심층적으로 연구해 두 권의 잡스 책을 집필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잡스의 7가지 원칙은 어찌보면 흔한 자기계발서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 '세상을 바꿔라', '창의성을 일깨워라', '제품이 아닌 꿈을 팔아라', 'No라고 100번 외쳐라',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라', '스토리텔링의 대가가 되어라'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 세부적인 예로 들어가면 잡스만의 혁신의 사례가 돋보이지만, 원칙만으로 보면 자기계발서의 대가인 스티븐 코비의 책이나 독특한 경영가로 꼽히는 영국 버진 그룹 회장 리처드 브랜슨의 이야기와 똑같다. 원칙을 두고 이름만 교체해도 아마 대부분의 독자는 속아 넘어갈 수 있을거다.

 

잡스가 없었더라면?에서 시작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좋았으나 이 책에서 제시한 무한혁신의 비밀은 이미 우리가 언론이나 IT전문 블로거들을 통해 수십번 들어왔던 것들에 불과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애플의 이야기, 잡스가 일으키는 센세이션들을 따라가기에 이 책은 조금은 낡은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단순한 잡스 행동 분석기는 이제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잡스 따라잡기 보다는 잡스를 뛰어넘을 제 2의 잡스 탄생을 위해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하는 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잡스 책이 쏟아지는 요즘 그래도 눈에 띄는 책이라 집어 들었지만 역시나라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이제는 잡스의 자서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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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을 범하다 

 <심청전>은 효의 대표적인 사례로, <춘향전>은 사랑의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늘 고전을 '권성징악'의 논리로만 읽어내려갔었죠.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너무 고정된 시각만으로 고전을 해석했던 건 아닐까요? 이 책은 우리 고전을 뒤집어 읽어보는 새로운 시각을 전하는 책입니다. 제목부터가 발칙하죠? 전을 '범한'답니다. 

 

 

 

 

 

 추재기이 

  우리는 언제나 1등만 기억하지만, 역사 속에는 역사를 만들어 온 수많은 마이너리티 인생이 존재합니다. 여기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꼽히는 추재 조수삼을 비롯해서 말이죠. <추재기이>는 조선 후기 마이너리티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몇 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하단 생각이 드네요.

 

 

 

 

 제목은 뭐로하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제목을 짓습니다. 서평 제목 붙이기에서 시작해 각종 리포트와 보고서에 모두 제목을 지어 붙어야하죠. 그리고 한번이라도 제목 붙이기를 해본 사람은 알겁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지를요. 30년 경력의 편집자가 100여 권의 책 제목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들려주며 제목 짓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군요. 그의 제목 짓기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리아의 나라 

 몽골 아이, 미국인 의사들, 그리고 두 문화의 충돌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머세드 지역에 위치한 소수민족 구역에 사는 한 아이에 대한 실제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9년간 취재하며 아이를 사이에 두고 목족 부족과 의사들이 벌이는 문화적 충돌을 그린 책이죠. 다문화사회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이든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세속화 예찬 

 정사보다 야사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내용에도 있지만, 그것을 끊임없이 읽는 건 야사야 말로 권력자가 아닌 우리네와 같은 평민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일겁니다. 세속화 예찬도 그런 의미에서 실제 우리네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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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0-12-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듬 님,
가끔은 야사가 재밌는 건 미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고 그것이 대문자 역사와 맛물려 돌아간다는 데 있는 거 아닐까요? 치즈와 구더기같은 책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아시잖아요...
<전을 범하다> 저도 추천했답니다~^^ 왠지 될 것 같은 예감이 팍 오는데요?...ㅎㅎ
 
스위치 - 손쉽게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행동설계의 힘
칩 히스 & 댄 히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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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히스 형제다. 시작부터가 발칙하다. 전작 <스틱>에서는 한국의 '분신사바' 이야기로 시선을 사로잡더니 이번에는 시작부터 삼성 이건희 회장과 S라인 여대생의 공통점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역시 '메시지'의  대가 다운 발상이다.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던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의 꿈을 이룬 이건희 회장, 그리고 불어나는 몸집으로 위축되던 생활을 하던 한 여대생이 6개월 만에 S라인으로 거듭난 데는 공통점이 있다. 처한 상황과 가진 권한, 그리고 변화의 정도는 달랐지만 무도 '변화'에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번책 <스위치>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손쉽게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처한 상황과 가진 것 없음을 탓하지 말고 "행동설계"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스위치>에는 의심하고, 저항하고, 귀찮아하는 이들을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방법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책은 기존의 자기계발서와는 많이 다르다. 단순한 구호나 외침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의 대가라는 칭호 답게 그에 적절한 사례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대기업의 신입사원은 구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현 시스템에 의해 구입된 424켤레의 장갑 샘플을 모아 가격 태그를 붙이고, 종류별로 각각 가격이 다른 장갑을 이사회 회의장 테이블에 전시해 그로 인한 손실을 눈으로 직접 보게 만들었다. 이 사례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상사, 조직에 함몰되어 새로운 것은 보지 못하는 꿈쩍도 않는 이사회진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호소해야 한다! 도표나 그래프가 아닌 느끼게 함으로써 절박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변화는 항상 손쉬운 것도, 항상 어려운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변화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은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다. 성공적인 변화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게 마련이다. 
_ <스위치>, 358쪽 중에서

 
   




저자들은 <스위치>를 '변화'라는 단어로 정의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사례도, 앞서 말한 신입사원의 사례도 결국은 상대방을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영향력'의 힘을 말하고 있다. 나를 변화하는 것은 쉽지만, 내 주변의 상황, 나를 둘러싼 의사 결정자들의 마음을 돌리지 않고서는 분명 한계가 있다. 삼성이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건 말 안 듣는 직원들에게 움직일 수 있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고, 경영진들의 마인드를 바꾸기 위해 전 세계 지사를 오갔으며, 7 to 5이라는 새로운 근무 시간 도입으로 근무 환경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에게는 어떤 큰 권한이나 자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조정하고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은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장에 등장하는 호텔 직원들의 사례도 그렇다. 3D업종이나 다름없는 호텔 객실 청소는 전혀 즐겁지 않은 일 중 하나다. 그런 호텔 직원들이 어느날 즐겁게 일을 하기 시작하고, 일의 속도가 향상됨은 물론 청소의 정도도 완벽해 졌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 이면에는 청소를 '일'이 아닌 '운동'으로 받아들이게 직원들의 마인드를 바꾼 원인이 있었다. 실제 방을 청소할 때 소모되는 칼로리와 운동량을 비교해 수치를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일도 하고, 운동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호텔 사장은 더 많은 수익을 거둘 수 있었고, 호텔 직원들은 부지불식간에 호텔 사장의 은밀한 영향력에 의해 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진부한 주제인 '변화'를 이토록 흥미롭게 풀어낸 저자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의 패턴의 비밀을 밝혀낸 것 뿐 아니라 조직행동론이라는 칭호 답게 '변화'라는 주제와 관련된 인간 심리를 밝혔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바로 "자제력도 고갈 된다"는 부분이었는데, 가령 헬스장에서 아령을 들 때도 처음에는 아직 근육이 신선하기(?) 때문에 쉽지만 회를 거듭할 수록 힘들어지고 나중에는 들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참으면 참을 수록 나중에는 그 참는 정도가 줄어들고 포기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종 지름신이 강림하는 이들에게는 새겨 들을만한 것이다. 지나치게 참기 때문에 한 번에 욕구를 폭발시키는 것이니, 차라리 참는 폭을 줄이고 적당히 중간 중간 쇼핑을 해주면 어쩌면 소비의 폭을 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상사가 내 말을 듣지 않아요, 남편이 내 뜻대로 안되요, 아들이 부모말을 무시해요. 이제 더 이상 남탓은 하지 말자! 환경부터  바꾸고 행동부터 재설계하자. 심리학을 읽는 듯한 재미와, 자기계발서를 읽는 듯한 자극이 있는 책 <스위치>! 다 읽고 나니 늘 손 닿는 곳에 두고 읽고 싶다는 아마존 독자의 서평에 고개가 끄덕여 지는 책이었다.


첨언) 한국 독자들을 배려하는 저자들의 성의가 참 고맙다. <스틱>의 한국어판 서문(분신사바 이야기)을 보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이 저자들 한국에 대해 참 많이 공부를 했겠구나 생각했는데, 이번 책 <스위치>에서도 잊지 않고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을 써줬다. 저자라면 모름직이 히스 형제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내 책을 읽을 그 나라의 독자들을 위한 배려를 잊지 않는 것! 독자들을 위한 저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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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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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엉킨 나무 두 그루 그림의 제목은 '체인 갱'이었다.
쇠사슬로 묶인 두 죄수라는 뜻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나 상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뒤엉킨 채 비쩍 마르고 지쳐 간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가지를 뻗는다.
_ 140쪽 중에서

처음 연애라는 것을 할 땐 그랬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은 내가 알아야 하고, 이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내 것과 다름 없다고. 20살이 되었고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난 상대방을 '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가 소유하고 있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고.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내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내가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핸드폰의 통화목록, 문자를 보는 건 기본이었고, 이메일과 주요 포털 사이트의 비번까지 우리는 공유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얽히고 설킨 것이 서로의 숨을 막아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헤어지기 한 달 전 다툰 한 싸움에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싸움의 발단은 영화표 한 장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의 지갑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영화 표를 발견했고, 그걸 내가 아닌 학교 후배와 본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별일 아니기에 넘겼고, 굳이 네게 말을 해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내가 그날 내 남자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결국 우리는 막말을 해가며 싸우고 말았다.

그와의 만남에, 그리고 헤어짐에 어떠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그와의 연애 경험은 훗날 나의 연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나치게 쿨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핫 해서도 안되는 것이 연애라고 말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둘이 둘이어서 더 빛날 때 더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다고 말이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과 차가움의 중간지점이 어디인지 나는 그 첫 연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거 같다.

갑자기 지난 내 연애를 떠올리며 길게 이야기를 꺼낸건 어젯 밤 읽은 시쿠라바 가즈키의 소설 <내 남자>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10년 전에 읽었더라면 이 소설 속 사랑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런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술 더 떠 이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이들의 잔혹하고 끔찍한 사랑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왔다.

소설은 주인공 하나의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될 요시로와 하나의 양아버지 준고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요시로는 장인어른이 될 준고에게 하나와 자신과의 결혼 축하 선물로 하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선물해달라고 미리 부탁했고, 그날 만남에 준고는 하나 몰래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와 요시로와 하나 앞에 내놓는다. 그 카메라에 표정이 변하는 하나. 그리고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아쉬움이라고 하기에는 뭔가가 이상한 오묘한 준고의 대사들.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카메라에 얽힌 비밀과 준고와 하나, 이 양아버지와 딸의 정의할 수 없는 관계를 밝혀나간다.

하나와 준고가 아빠와 딸의 관계가 된 건 하나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었다.  훗카이도 남서쪽의 작은 섬에 살아가던 하나는 어느날 닥친 해일로 온 가족을 잃게 된다. 홀로 이재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지내던 하나는 어느날 자신을 먼 친척으로 밝힌 27살 준고를 만나게 된다. 하나를 돌보아 줄 그 누구도 없었던 상황이라 하나는 준고를 따라 섬을 나오게 되고, 준코는 비록 결혼도 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하나를 자신의 양녀로 들이기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둘의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관계는 서로를 얽고 얽히며 이어진다.  

<내 남자>는 추리 소설을 읽는 듯 하다가도 로맨스 소설을 읽는 듯하고, 검붉은 핏빛이 떠오르기 하다가도 맑고 청명한 푸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하다.완벽한 내 남자,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없는 완전한 내 여자를 갈망한 두 남녀의 이 처절한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하고 싶을 만큼 추잡하게 느껴지다가도, 그 어떤 사랑보다 더 강렬하고 정열적이며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오키 상 수상에 빛나는 충격적인 설정과 아름다운 문장은  "나는 아빠 거니깐, 아빠 손에 죽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중학교 1년생 하나의 말과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 '체인 갱'이 계속해서 머릿 속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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