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 - 제138회 나오키 상 수상작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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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엉킨 나무 두 그루 그림의 제목은 '체인 갱'이었다.
쇠사슬로 묶인 두 죄수라는 뜻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나 상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뒤엉킨 채 비쩍 마르고 지쳐 간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가지를 뻗는다.
_ 140쪽 중에서

처음 연애라는 것을 할 땐 그랬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은 내가 알아야 하고, 이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내 것과 다름 없다고. 20살이 되었고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난 상대방을 '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가 소유하고 있고,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고. 그래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내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지금 이 순간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내가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핸드폰의 통화목록, 문자를 보는 건 기본이었고, 이메일과 주요 포털 사이트의 비번까지 우리는 공유했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얽히고 설킨 것이 서로의 숨을 막아버렸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헤어지기 한 달 전 다툰 한 싸움에서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 깨달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싸움의 발단은 영화표 한 장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의 지갑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영화 표를 발견했고, 그걸 내가 아닌 학교 후배와 본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별일 아니기에 넘겼고, 굳이 네게 말을 해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내가 그날 내 남자가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결국 우리는 막말을 해가며 싸우고 말았다.

그와의 만남에, 그리고 헤어짐에 어떠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그와의 연애 경험은 훗날 나의 연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나치게 쿨해서도 안되지만 지나치게 핫 해서도 안되는 것이 연애라고 말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둘이 둘이어서 더 빛날 때 더 아름다운 사랑일 수 있다고 말이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과 차가움의 중간지점이 어디인지 나는 그 첫 연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던 거 같다.

갑자기 지난 내 연애를 떠올리며 길게 이야기를 꺼낸건 어젯 밤 읽은 시쿠라바 가즈키의 소설 <내 남자>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10년 전에 읽었더라면 이 소설 속 사랑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런지 모르겠다. 어쩌면 한술 더 떠 이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이들의 잔혹하고 끔찍한 사랑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해왔다.

소설은 주인공 하나의 결혼을 앞두고 신랑이 될 요시로와 하나의 양아버지 준고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요시로는 장인어른이 될 준고에게 하나와 자신과의 결혼 축하 선물로 하나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선물해달라고 미리 부탁했고, 그날 만남에 준고는 하나 몰래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와 요시로와 하나 앞에 내놓는다. 그 카메라에 표정이 변하는 하나. 그리고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아쉬움이라고 하기에는 뭔가가 이상한 오묘한 준고의 대사들. 소설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카메라에 얽힌 비밀과 준고와 하나, 이 양아버지와 딸의 정의할 수 없는 관계를 밝혀나간다.

하나와 준고가 아빠와 딸의 관계가 된 건 하나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었다.  훗카이도 남서쪽의 작은 섬에 살아가던 하나는 어느날 닥친 해일로 온 가족을 잃게 된다. 홀로 이재민 수용소에서 며칠을 지내던 하나는 어느날 자신을 먼 친척으로 밝힌 27살 준고를 만나게 된다. 하나를 돌보아 줄 그 누구도 없었던 상황이라 하나는 준고를 따라 섬을 나오게 되고, 준코는 비록 결혼도 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하나를 자신의 양녀로 들이기 위한 수속을 밟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둘의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관계는 서로를 얽고 얽히며 이어진다.  

<내 남자>는 추리 소설을 읽는 듯 하다가도 로맨스 소설을 읽는 듯하고, 검붉은 핏빛이 떠오르기 하다가도 맑고 청명한 푸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하다.완벽한 내 남자,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없는 완전한 내 여자를 갈망한 두 남녀의 이 처절한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피하고 싶을 만큼 추잡하게 느껴지다가도, 그 어떤 사랑보다 더 강렬하고 정열적이며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나오키 상 수상에 빛나는 충격적인 설정과 아름다운 문장은  "나는 아빠 거니깐, 아빠 손에 죽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중학교 1년생 하나의 말과 책 속에 등장하는 그림 '체인 갱'이 계속해서 머릿 속에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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