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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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_ 그리스인 조르바, 22쪽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윤기 선생님을 뵈었던 건 지난 겨울 과천의 한 상가 자하의 음식점에서였다. 그날도 선생님은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청 멜방바지에 커다란 가방을 둘러 메고 내 두 발이 다 들어갈만큼 커다란 신발을 신고 계셨다. 건강 탓에 얼굴 색만큼은 밝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그 어느 누구도 누그러뜨릴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윤기 선생님은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분이라 그날도 선생님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선생님의 말씀만 고분고분 듣고 있었다. 그렇게 술자리가 이어지다 어느 순간 함께한 선배들이 자리를 비워 선생님과 나만 자리에 남게 되는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해' 라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그 즈음 읽기 시작한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선생님, 요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는데 책이 진도가 잘 안나가요."

 

사실 그때는 정말 <그리스인 조르바>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책이었다. 잠들 기 전 몇 페이지씩 읽고 있었는데 이야기에 잘 몰입이 되지 않았었다. 책이라는 것도 '때'가 있듯이 아마 내가 그 책을 집어 들었을 그때는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뉴욕 여행때 조르바가 듬직한 친구가 되어 줬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책을 가지고 '책 정말 재밌어요.' '최고에요'라는 말은 커녕  '책이 잘 안 읽혀요.'라고 말을 해버리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해버렸던 것이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오는 선배에게 선생님은 "이 처자가 '조르바'가 진도가 안 나간다네. 이를 어쩌나"라며 허허 웃으시더니 한바탕 조르바 이야기를 쏟아내시기 시작했다. 조르바를 번역할 때 원서를 잡고는 10번을 읽고는 단번에 번역을 완성했다는 말씀에서부터, 자유롭지만 야성미 넘치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충실하는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 조르바의 삶이 너무 멋있다는 이야기까지 조르바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간인가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들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조르바의 이야기는 <그리스인 조르바> 속 조르바의 말투와 닮아 있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인간들의 약속과 도덕률에 속박되기 보다는 영혼의 부름에 몸을 맡긴 채 자유를 쫓아 떠돌아 다니는 사람. 조르바는 이미 이윤기 선생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_ 그리스인 조르바, 82쪽 중에서 

지난 금요일 이윤기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접하고 떠오른 것이 이 책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내게는 인생의 새로운 도약이 되어줄 50여일간의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줬던 책, 그리고 곳곳의 조르바의 말에 줄을 치고 옮겨 적으며 서둘지 말고, 안들을 부리지도 말고 살자며 몇번을 다짐하게 만들었던 책, 조르바가 주인공에게 호통을 치며 한바탕 자신의 인생관을 쏟아낼 때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절로 나오게 만들었던 책 말이다. 다음에 만나 뵙게 되면 '조르바, 다 읽었어요'라고 자랑하고, 곳곳에 밑줄 그은 책도 보여드리고, 다시 한번 조르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 이 책으로 선생님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지는 몰랐다.

 

이윤기 선생님의 소식에 슬퍼하는 한 선배에게 그런 말을 했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라요. 육체의 속박에, 세상의 틀에 갖혀 지내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영혼의 자유로움을 얻었고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났잖아요. 이제는 선생님이 정말 조르바가 되었는지도 몰라요. 너무 즐겁고 너무 재미있으셔서 세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에게 호통을 치실지도 몰라요. 네가 진정 내 행복을 방해하려 하느냐! 라고요."

 

신화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났던 사람, 작가로서 소소한 부분까지 챙기며 작가로서의 사명을 다 했던 사람. 이제 그의 글을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지만, 난 왠지 선생님이 더 행복해 지셨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마냥 슬프기만 하지는 않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을 애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그 사람들 오래도록 기억하는 데 얼만큼의 힘을 주는지, <그리스인 조르바>와 이윤기 선생님을 통해 깨달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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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4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윤기 님을 실제로 만나시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유명하다길래 올해 처음 읽었는데 조르바란 인물의 매력에
빠졌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읽고난지 얼마 안 되어 이윤기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마음 한 구석이 슬프면서 먹먹해지더군요.
결말에 조르바가 죽기 전에 젊은 작가의 꿈에 나타나는 장면이 떠올리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비보라서 아쉬웠기도 했구요. 페이퍼 보는 겸에 제가 재미있게
읽었던 조르바 리뷰가 있길래 읽어봤습니다.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