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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 -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
이화경 지음 / 뿔(웅진)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차설(且說)!" 담배 가게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 꾼은 말을 멈췄다. 차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하던 이야기를 그치겠다는 뜻이었다. 한창 감정이 고조되어있던 청중들은 가지고 있던 엽전을 서슴지 않고 풀어 놓는다. 바구니에 엽전이 하나 둘 쌍히고 수북히 쌓여 바구니를 가득 채우지 이야기 꾼은 슬슬 다음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선의 임금이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사건을 들을 때는 모두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임경업 장군을 두려워하여 의주로 후퇴한 호국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모두가 임경업 장군의 비극적인 결말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지경으로 이야기 꾼을 바라본다.
마침내 임 장군의 마지막 이야기가 끝이 난다.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내들 가운데 몇은 소맷자락으로 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하고, 영웅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데 대한 무능한 조정에 안타까움과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야기 꾼이 자리를 일어나 떠나려 하자 갑자기 한 사내가 번쩍 일어난다. "네놈이 감히 장군놈을 죽여?" 분노에 찬 사내는 한 손에 쥐고 있던 낫으로 이야기 꾼을 내리쳤다. 이야기에 빠져 현실과 이야기의 경계를 놓쳐버린 사내는 이야기 꾼을 죽이고야 말았다.
이야기가 무서운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감염력이 강하다는 데 있었다.
감염력은 허구에서 나온다는 것을 김흑은 알게 되었다.
삶 밖의 삶, 현실 바깥의 세계, 사랑 너머의 사랑, 죽음 이후의 죽음은 바로 허구 그 자체지만, 사람들은 그 허구를 갈망하고 사랑했다.
_ <꾼>, 199쪽 중에서
이야기는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 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며, 새로운 세상을 열기도 한다. 조선시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조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야기 꾼 김흑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이야기꾼의 꿈을 품으며 이야기로 웃고 우는 인생사를 그린 소설이 바로 <꾼>이다. 김흑이 서울로 당도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바로 한 청중의 낫에 맞아 죽는 한 이야기 꾼이 모습이었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있는 자였다. 그래서 두려워 하기도 했고, 그래서 더 사랑하기도 했던 것이 이야기였다.
김흑은 길 위에서 머물고 길 위를 떠돌며 살아갔다. 상인을 따라 봇짐을 짊어지고 떠돌기도 하고, 곡물을 들고 시장에서 발품을 팔기도 하고, 소 장수를 따라 소를 몰아주기도 했다. 조선 땅을 벌레로, 짐승으로, 천한 놈으로 떠돌다 문득 그는 이 땅에서 머물다 사라질 자신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 땅 위를 재재거리며 걸어가고 싶었다. 조선 땅 최고의 이야기 꾼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이야기 꾼이 된 김흑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순전히 청중의 입장에서 비롯된다. 그가 처한 상황, 그가 입은 상처를 생각하며 그것을 어루만져주고 달래주고 꿈을 품을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잘 나가던 한 때를 누리다 자신은 한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이제는 한낯 주모로 길 위를 떠도는 사내들을 상대해야 하는 주모의 외로움을 알게 된 김흑은 그녀를 위한 이야기 '상랑뎐'을 들려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가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매질을 당하고 산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청춘을 버리고 늙어버려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그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사랑하되 사랑받지 못한 신세가 서러워 가슴을 쳤고, 세월을 이기는 사랑이 없음에 사랑을 믿지 못했던 주모에게 김흑의 이야기는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입장이 되어 마음을 달래주고 남의 설움과 슬픔을 승화시켜주는 김흑의 이야기에 주모의 마음은 큰 위로를 얻게 된다. 김흑은 참말로 최고의 이야기 꾼이었다.
주모를 빗댄 사랑 이야기, 불운한 글쟁이로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했던 이결 선비가 겪은 인생, 영웅소설을 듣다 임경업 장군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야기꾼을 낫으로 찔러 죽인 청중의 이야기, 고자 남편 덕에 평생 목석으로 늙어야 했던 양반가 아낙의 비밀스러운 이야기, 그리고 어릴 적 병으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불구의 양반집 아가씨가 책을 통해 세상 밖을 꿈꾸다 이야기 꾼 김흑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까지... 이야기에 이치고, 이야기에 울고 웃고, 이야기에 모든 것을 걸었던 우리네 모습이, 우리네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설이다. 책 속 이야기를 한 편 한 편 떼어내어 읽어도 한 권의 소설을 읽은 만큼 완성도도 높고 만족도도 높았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