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바쁘니까 고양이가 알아서 할게 - 열여섯 마리 고양이와 다섯 인간의 유쾌한 동거
이용한 글.사진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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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늘 주변에 존재해왔지만 존재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던 나에게 새롭게 하나의 생명이 되게해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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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和! 일본 - 응집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해부
성호철 지음 / 나남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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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뱀이나 도마뱀 등의 파충류를 보면 대게 징그럽고 섬뜩하다고 느끼는 것은 예전 파충류인 소형 공룡들이 초기 포유류를 주식으로 잡아먹으면서 생긴 형모감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와 비슷하게 일본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보면서도 정작 재미있게 보면서도 정작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가지고 지내는 것은 일제 강점기를 직접 겪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는 그러한 거리감을 그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한 감정이라며 위안을 삼으며 ‘일본’, ‘일본인’에 대하여 그간 무관심 속에서 갈아 왔다고 해야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일본의 방문연구원으로 1년 동안 체류하면서 일본과 일본인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물찾기가 아니라 퍼즐맞추기임을 깨달았다고 하는 저자와는 달리 『와! 일본』은 일본에 대한 보물찾기와 같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대 일본은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고도성장기 세대 및 장기 불황기세대 등이 공존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일본인이라는 뿌리가 같으므로 공통되는 큰 범주로 묶을 수 있는 데, 저자는 일본인의 특징을 다른 이들과 조화롭게 사는 삶의 방식인 ‘와(わ)’와 그 구성원들의 시선의 합(合)으로 집단의 입장에 서서 세계를 보는 자세인 '메센(目線)'을 일본의 특징으로 보고 있다.


 


 이에 지장학적인 근거로 섬나라라는 특징을 들고 있는데 같은 섬나라인 영국과는 달리 일본은 집단에서 배제되면 섬 밖으로 밀려나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인식이 크므로 자신보다 집단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와’와 그 결과인 ‘메센’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집단의 눈(目) 때문에 개인적인 불편 및 불만을 참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다른 문화권 특히 서양인인 느끼는 친절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살기는 불편한 일본의 공기인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아베 총리의 뉴스만 보면 치솟던 불편함이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인들의 다수는 태평양전쟁을 자신들의 집단이 침략당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동양 문화권을 서양 열강들로부터 해방시키려다 미국에 패한 전쟁으로 말이다. 그래서 같은 패전국인 독일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면서, 종종 자신들이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인양 그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조정래 작가의 소설 ‘정글만리’를 읽을 때 일본 천황의 항복문을 처음 접했었는데, 주인공격인 송재형 뿐만 아니라 그 글을 보고 울분을 토하던 중국인들을 보고는 같은 생각을 하였었는데, 이번에 일본인들의 와와 메센 등을 조금 알고 나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인들의 생각을 조금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소득이 있었던 『와! 일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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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경제 - 복잡계 과학이 다시 만드는 경제학의 미래
마크 뷰캐넌 지음, 이효석.정형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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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과학자들이 거듭되는 연구와 사고 끝에 많은 법칙들을 만들어 내고 활용하고 있다. 물론 수많은 사색과 연구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뉴턴의 사과나무라든지 케쿨레의 꿈과 같이 순간의 영감들이 많은 법칙을 만든 기폭제가 되었다는 일화들이 종종 뒷이야기로 전해지곤 한다. 이렇듯 전혀 과학스럽지 않은 일들이 과학에 이용될 수 있다면 자연과학도 다른 학문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누구나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시도를 한 결과가 바로 마크 뷰캐년의 『내일의 경제』이다.

 

  자연과학 특히 물리학에 있는 몇몇 아이디어와 개념을 더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경제와 금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저자는 “물리학은 상호 작용하는 많은 조각이나 부분들이나 요소들이 어떻게 전체 시스템에서 놀랍도록 집단적인 패턴이나 행동을 초래하는지 이해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그 조각이나 부분들, 요소들이 전자나 원자일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거의 아무것이나 될 수 있다. (p.38)”는 전제아래 전자나 원자 대신 경제와 금융을 대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갑자기 나타나는 토네이도의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을 근거로 일시적인 혼란이 있더라도 스스로 수습한다고 하는 시장의 평형에 찬물을 끼얹으며, 최근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비롯하여 그동안의 주가의 흐름 및 많은 경제학자들의 전망 및 분석들을 제시한 후 그것들을 다양한 물리학에 접목하여 보고 있다. 그중에서 주가의 대폭락 전후에 많은 전조들이 보이는 것 등의 시장상황을 지진과 비교해보는 부분은 인상 깊었다.

 

 ‘복잡계 과학이 다시 만드는 경제학의 미래’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복잡계 과학, 경제학 등 쉽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최근 음악시장을 휩쓴 콜라보레이션과 같이 과학과 경제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내일의 경제를 다른 시각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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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 -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여는 법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문진희 옮김 / 판미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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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행복에 관하여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행복하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는 면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종교적 지도자들이 말하는 깨달음에 관하여 많은 관심만 가지고 있을 때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지은 『나의 눈』을 접하게 되었다. 다른 것보다 띠지의 “지금까지 깨달음을 이렇게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 놓은 책은 없었다”라는 문구에 이끌려 깨달음을 관하여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생각에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집어 들게 되었다.

 

  그러나 깨달음을 쉽게 알 수 있다면 지금보다는 더 행복한 뉴스가 넘쳐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예전에 인문학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도덕경』을 집어 들고 무작정 읽은 적이 있었는데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 덕분에 『도덕경』은 아직까지도 그냥 글씨만 한번 읽어본 채 책장에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부끄러운 과거지만 호킨스 박사의 『나의 눈』도 비슷한 경험을 주었다.

 

  편집자는 "독자들의 자아와 참나 모두를 위해서 쓴 글이며, ‘이원성과 비이원성 양극의 초원’이라는 전통적으로 깨달음에 큰 장애였던 것에 관한 내용은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그 의문이 절로 해소될 것이다. (p. 12)"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공이 부족한지 수양이 부족한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부족한지(아마도 마지막의 경우가 가장 유력한 것 같다) 책을 덮어도 이해보다는 큰 장애만 남은 기분이었다.

 

  저자의 전작인 『의식 혁명』에 관한 설명이 많이 할애되어 있어 전작을 읽지 않은 상태여도 저자의 핵심이론인 인간의 의식 수준과 운동역학에 관해서 어느 정도 알 수는 있었으나, 그 이론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어서 그런지 그것이 이해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의식수준에 대한 로그값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이론이라면 바로 그것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모든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어렴풋이 대충알고는 있는 것 같은 그러한 내용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많이 있었는데, “앎의 상태를 ‘마음이 없는’ 수준이며, ‘공(void)’이나 ‘무(nothingness0’와 같지 않다. ‘공(空)’이나 ‘무(無)’라는 용어들은 형상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다. 궁극은 형상이 없고 한계가 없으며 위치성도 없는 영역이며 따라서 모든 것의 전체성이 항상 현존하는 영역이다. (p. 177)”고 정의하는 것이나 근본적 지금(radical now)에 대한 물음에 “모든 시간이 다 그렇듯이 ‘지금’조차도 덧없는 환상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주시한다고 해서 ‘지금’이라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체가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이나 ‘그때’도, ‘과거’나 ‘미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지금’이 사라진다면 항상의 무한함이 그 자리에 들어설 것입니다. (p. 428)”라고 대답하는 부분은 다소 난해한 정의들을 나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서로 다른 언어 형태들은 그 가르침들을 낳은 문화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모든 영적인 부분의 최고점인 신, 있음(is-ness), 불성, 그리스도, 화신, 진리, 깨달음, 참나, 크리슈나, 실상, 앎, 하나임, 절대, 전부임, 총체, 신성, 등의 의미들의 차이점이 없다고 하는 대답이었다. 많이 파생되어 왔지만 결국은 각뿔 모양의 한 점, 꼭대기를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많은 공감이 가는 대답이었다.

 

 언젠가 제3의 눈이라고 불린다는 송과체에 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이유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 있지만 그것이 발달한 이는 심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저자가 말하는 삶의 진실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글로 읽어도 이렇게 어려운데 깨달음에 다다르려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자도 많이 인용한 붓다의 가르침을 인용해본다.

 

“그 누구도 섬기지 말라, 오로지 참된 가르침들만을 따르도록 하라 - 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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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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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이맘때가 되면 출판계나 독자들의 시선은 지구 반대편으로 가곤한다. 한림원의 발표로 인해 이미 출간된 책이 재조명되거나 아예 새로운 옷을 입고는 다시 세상에 나오거나 소개가 미흡한 작가의 경우 이에 보상이라도 하듯이 관련 서적들이 양산되기도 한다. 노벨문학상 타이틀이 둘러진 작가의 작품은 그것만으로도 다소 난해한 이야기라도 꾹 참고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자신의 취향과는 조금 어긋나더라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익혀두는 유행어라든지 유행가 같이 한동안 회자되는 작가이므로 읽어 두어야 하는 것같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년 이맘 때 즘엔 주위에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노벨상 작가의 책을 한번씩 잡게 된다. 그러한 심리가 작용해서인지 올해는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을 읽었다. 솔직히 말하면 오르한 파묵의 다른 책에 비하여 분량이 많지 않은 것도 고르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아직까지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많이 접해보진 못했으니까 그나마 빨리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란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거지만 이번 예상은 완전히 틀렸었다. 일주일 가까이 씨름하면 읽은 책이므로...

 

 오르한 파묵의 또 다른 소설 「고요한 집」의 등장인물인 역사학자가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한 이야기라고 시작하는 「하얀 성」은 주인공이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에 터키함대의 공격을 받고 이스탄불에서 노예생활을 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인칭으로 주인공이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풀어가고 있는데, 과학에 관심이 많은 호자라는 사람이 나를 노예로 삼았는데 놀랍게도 생김새가 나와 똑같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국적도, 살아온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이야기이다.

 

 동서양, 고금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 근원적인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여서 그만큼 더디게 읽히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은 많이 있으나 동양과 서양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지정학적인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오르한 파묵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인 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한 동안 답도 나오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그러한 잡생각(?) 때문에 더디게만 읽어간 것은 흠이었지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도 희미한 꼬리조차 잡히지 않는 ‘나는 왜 나인가’란 물음보다 터키함대의 공격을 회상하면서 주인공인 ‘나’가 회상하는 “지금에 와서는, 선장이 그렇게 겁에 질려 버리면서부터 애 인생이 조금씩 달라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결정된 인생은 없다는 것을, 모든 이야기는 실상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우연히 경험했던 것들이 사실은 필연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다. (p. 17-18)”는 소설 초반의 글이 더욱 기억에 남는 아직은 어려웠던 소설 「하얀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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