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고사성어 백과사전 - 한글세대 교양인을 위한
Nexus 사전편찬위원회 엮음 / 넥서스아카데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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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부의 대입 수능에 출제되는 고사성어집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면 쉽게 납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출제 범위안에 들어가는 내용을 갖추고 있어야하고, 적절한 설명이 있어야 목적에 맞는 좋은 고사성어집이기 때문에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사성어집을 찾다보니 정말 많은 종류의 책들이 시중에 나와있더군요. 만족할만한 구성을 가진 책을 찾기위해서 대형 서점이 비치된 모든 고사성어집을 살펴봤습니다. 그 결과 선택한 것이 고사성어 백과사전입니다. 어떤 책은 고사성어의 수가 많으나 설명이 너무 부족하고, 어떤 책은 그 수가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수능의 범위내에 들어오는 고사성어를 빠트림없이 수록하고 있으면서도 관련 내용을 아주 만족스럽게 설명해 놓은 책을 찾다보니 고사성어 백과사전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흔히 너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고있어 고사성어를 익혀가는 과정의 흥미로움이 반감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사성어 백과서전은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었습니다. 

고사성어가 수능의 언어영역에 실리는 이유는 한자로 구성된 고사성어 속에 중국과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사상이나 철학에 서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유사 문화권에서 공존하는 고사성어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의 일상생활에 좋은 지침이 되어줍니다. 옛 성인들의 지혜와 삶의 모습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보다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꼭 고등학생이 아니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교훈과 지혜를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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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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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콜럼버스는 금의 행방을 물으며 우리 조상들의 손목을 잘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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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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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출판계는 인물에 대한 많은 수의 어린이 도서들을 출간하고 있다. 그 중에는 어린이용 세계위인전기가 있는데 이 인물 전기의 전집에 실리는 인물들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인'이라는 말은 '위대한 사람' 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존경할만 한'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고 어린이들이 그 인물됨을 보고 배우는 롤 모델 로서의 매우 긍정적이며 좋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한마디로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위인으로 설정한 인물들을 보면 뜻밖의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예를 들어 위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콜럼버스' 가 대표적인 예이고, 알렉산더, 엘리자베스 1세등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콜럼버스의 일대기는 만화로도 수없이 츨간되고 있다.  

그러나 막상 콜럼버스의 정체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의 손목을 잘라내면서 금과 은이 어디에 있는지 대라고 말한 장본인이며, 수없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도 모자라 노예 무역을 했다는 사실은 알게되는 순간 우리의 어린이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을 상상해보시라... 

알렉산더는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 타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셀수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 수는 일일이 셀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린이들이 롤모델로 생각해오던 그 위대한 인물의 배신감에서 오는 공허함을 무엇으로 달래 줄 수 있을까... 정복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징기즈칸과 그 후예들의 몫이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보다 2배 이상, 알렉산더보다 8배의 땅을 정복하며 가장 잔인한 드라마를 썼던 그들 단연 금메달감 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게임도 되지 않는 드넓은 아시아와 유럽을 초토화 시켰던 그들이 아니던가... 유럽인들은 아직도 징기즈칸과 그들의 후예라면 공포에 사로잡힐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을 중심축으로 역사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고 무비판적인 수용은 역사에 대한 왜곡 현상을 만들어냈다. 승자의 입장에서 쓴 역사서는 유럽인들에게 유리하도록 기술되었고 그 결과 세계의 문화와 문명은 유럽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지금도 그러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셰계사란 인간과 사물이 움직이는 시간적 공간적 영역이다. 어느 한쪽의 영향력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으로 흘러들어가는 현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완력이 강했던 유럽중심의 기술은 없던 역사를 발명해내기도 했고 존재했던 역사를 증발시켜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세계의 역사는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기여한 대부분의 사실들을 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무분별하게 출간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어린이용 위인전기에 콜럼버스와 알렉산더가 등장하는 이유 

진실을 알고보면 절대로 롤모델로서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는 인물들이 우리나라의 위인 전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역사 인식에 밝지 않은 점을 이용한 얄팍한 상술이 숨어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국민들의 역사인식은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서구적 사관 중심이므로 콜럼버스가 정말로 위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죽했으면 아직도 TV에서 콜럼버스의 모험심을 이용한 광고물들 공중파로 싫어 보낼까... 저자들이 이점을 알아차리고 모른척 유명한 인물들을 분별없이 끼워넣는 상업적 의도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역사의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둘째로는 어린이용 도서를 저술하는 저자들의 역사인식이 부족한 탓을 것이다. 어쩌면 실제로 콜럼버스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어린이용 도서들의 대부분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저술되기보다는 어린이용 도서 집필자들에 의하여 기획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결과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 그러한 판단의 근거이다. 남북미 대륙의 7천만 인구 중 90%에 달하는 원주민들이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는 서구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백인들의 질병에 의하여 사망했다.  

그들의 역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지워졌고 왜곡되어있는 실정이다. 이런 서구인들의 무자비한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과연 컬럼버스나 그와 유사한 인물들을 위인전기에 포함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도서 집필자들의 역사인식의 무지함이 무분별한 출판물을 내놓게 된 원일일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독자의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줄 수 있는 역사적 사료들을 아주 잘 제시해주고 있다. 그토록 서구인들의 입을 달콤하게 해주었던 설탕은 흑인 노예무역과 노예들의 피가 배인 달콤함이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그토록 수많은 원주민들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앗아간 서구인들의 맨얼굴을 다시 한 번 더 쳐다보게 될 것이다. 

세계의 문화와 문명이 유럽에서 출발하여 전세계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들은 그들 조상이 숨기고 은폐시켰으며 왜곡시킨 역사를 그대로 인식한 결과이거나, 알고는 있지만 조상들의 잔인하고도 무지했으며 처참했던 역사를 외면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고 무자비했던 조상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연대감으로 나타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콜럼버스가 한반도에 도착하는 일이 발생했더라면 우리의 땅이 신대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을 것이다. 자신들이 신대륙을 발견했노라고...그리고 우리를 인디오라고 불렀을 것이고 금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며 우리 조상들의 손목을 잘라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래도 콜럼버스를 위대한 모험심을 발휘한 위인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책을 통하여 많은 한국의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사관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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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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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정의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정의를 논하는 일은 정의로운 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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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을 생각하면 보통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서부부터 강력한 타건으로 비평가들을 놀라게했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등이 떠오른다. 아, 물론 대학생들이라면 단연 라흐마니노프를 호명할 것이다. 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더해서 20여분의 1악장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연주도 있다. 이는 간단한 단상으로 살펴보고 싶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중의 1악장이 그러하다. 또한 나머지 2, 3악장 역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기 어렵도록 청자를 서로잡는 연주의 연속이다.  

이른바, '황제'라는 닉네임을 후세에 갖게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아마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고전음악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 주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으리라 짐작한다. 

 [폴리니_칼 뵘_빈필_DG 2002 : 과연 누가 이 음반에 흠집을 낼수 있으랴. 다만 나는 폴리니의 또랑거리는 연주가 마음에 든다고 밖에는... 흠집을 잡으려거든 길을 걸을 땐 늘 주의를 요망한다. 어디서 돌팔매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그러나 내게는 최고는 아니다...휙~ 돌~]   

  

애초에 베토벤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5번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워낙 곡의 품위와 연주가 들려주는 장엄함 혹은 세련됨 등등 여타의 모든 요인들이 만들어 낸 느낌이 마치 '황제'의 그것과 같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닉네임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피아노 협주곡 5번을 1770년 생인 베토벤이 1809에 작곡했다고 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작곡생활을 하게되는데,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무력 앞에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후 스스로 황제가되어 절대 권력을 잡고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시기였던 것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음악활동을 하고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완성한 시기는 베토벤보다 24세가 많았던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18년째가 되는 해이고, 1797년 생인 귀염둥이 슈베르트가 12살의 나이로 빈의 궁정 예배당에서 어린이로서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보다 27세 아래였다. 그러나 슈베르트를 어린아이로 보면 절대 안되신다. 슈베르트는 13세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고 16세에 교향곡을 썼으며 18세에는 이르러서는 엄청난 수의 가곡을 쓴 고전파의 마지막 주자였다.)   

닉네임으로 보건데 1악장은 아마도 정녕 '황제'다운 기품이 배어있는 듯 하다. 어쩌면 베토벤은 일필에 악장을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힘있고 탄력적이며 우아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매끄러운 악장을 전달하고 있기에 그런 생각이 들기도한다. 또 아니면 어떠랴... 대략 20분 정도의 1악장을 듣는 이가 전혀 20분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운 곡이다. 현악과 관악의 상호 교감은 뚜렷하고 피아노는 또 피아노대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각 악기들의 호응은 완연한 일체감을 주도록 되어있어 처음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대표곡이다. 아마도 단박에 매료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박하우스_빈필  : 사실 별도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은 음반이다. 박하우스가 황제의 연주에서 가지는 위치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하우스의 연주를 단연 으뜸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애호가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니다. 우선은 2악장의 연주 속도가 내게는 너무 빠르게 전해오고, 전체적 연주의 느낌이 통일성이 있고 유려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지만 악기들 상호간의 디테일한 섬세함을 기대하는 나에게는 만족스런 연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이 핵심인 박하우스의 연주는 황제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폴리니-칼뵘반과 더불어 필수 소장반] 

 2 악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곡이 또 어디에 있을까...과연 베토벤이 작곡한 음악이 맞단 말인가...의심이 들지모르겠지만 분명 베토벤의 곡이 맞다. 고집불통에 성질더러운 인간으로 알려져있는 베토벤의 음악을 숭고하고 세상에서 아름답고 애수를 품은 곡이라 말하려는가...곡을 들어본다면 이 곡을 써준 베토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악장은 듣는 모든 이의 시름을 어루만진다. 때로는 청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아름답다. 마치 손으로 건드리면 다칠 것만 같은 가려리고 푸르른 음악이 온 몸을 감싸게된다. 이런 아늑하고도 솜털같은 포근함은 애수라는 상대적인 감성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스스로 딜레마에 빠트린다. 가녀림에 대한 연민과, 애수의 슬픔과 따사로움의 아늑함과 맑은 세상의 공기를 보여준다. 마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 같은 2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불현듯 베토벤이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딜레마란 말인가. 온갖 해물이 섞인 짬뽕도 아니고...여하튼 2악장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버거운 일이다 내게는... 

그렇게 꿈처럼 2악장이 끝나갈 무렵.... 뜻밖에 전혀 공백이 없는 상태로 3악장으로 넘어간다. 베토벤은 그렇게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쉼없이 넘어가도록 곡을 붙여버린다. 그러나 쉼이 없다고 해서 악장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렷한 연주로 분리되어있다. 이런 형태은 베토벤 이후로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그 전에도.... 

미켈란젤리_첼리비다케: [ 오늘 쪽의 두 연주자를 기억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지휘의 구도자인 첼리비타케와 피아노의 구도자인 미켈란젤리가 만나 음악의 구도자라 칭하고 싶은 베토벤을 협연하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연주는 음악으로서의 가치 뿐만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구도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을 재현해 놓은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한다. 어쩌면 그들은 연주하는 그 순간 구도자였을 지도 모른다. 

음질은 좀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토스카니니의 연주로 듣는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쉼없이 바로 넘어가는 3악장은 Rondo의 주제를 연주해가면서 협주곡의 절정을 이룬다. 피아니스트는 장 3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찝어주어야 곡이 빛을 발하며 살아날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Rondo는 시원스럽고도 악기들이 가진 기운을 쭉쭉~내 뿜어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악기들의 명징성이 뚜렷 할 수록 곡은 청자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피아노는 역동적이면서도 구김이 없어야하고 오케스트라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일사 분란한 연주로 피아노를 살려주어야 할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악보의 치밀함을 구현해내어야 할 것이다. 협연은 피아노의 감정을 살려주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렇게 피아노와 협연은 완벽한 마무리를 해내야 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 연주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정도에서 애호가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바로 짐머만과 번스타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Krystian Zimerman_Leonard Bernstein 의 영상물과 음반

 [짐머만의 피아노와 번스타인의 협연은 완벽함 그 자체이다. 그들이 베토벤을 의도한 그대로 가장 훌륭한 연주를 해냈다. 자켓의 뒷편으로 보이는 연주자들의 표정을 보시라...번스타인의 만족한 표정과 짐머만의 의연한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곡을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연주해냈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둣 하다. 베토벤이 살아있다면 그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의 곡을 연주 해주었노라...라고... 베토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 연주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그랬을 것만 같다... 이 둘은 이 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를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조화롭고, 이토록 모든 악기들이 피아노와 협연의 개성들을 모두 살려낸 연주를 또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으랴...왼쪽의 DVD는 완벽한 황제의 연주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준다.] 

  이 외에도 빼어난 연주들이 매우 많다. 그만큼 연주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곡이라는 뜻일 것이다. 꼭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 해내야만 좋은 연주는 아니다. 연주자 자신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피아노와 협연자들의 상호 노력은 이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완성도를 가진 연주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애호가들의 취향과 선호도가 서로 달라 입맞이 제각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음악에 하나의 고정된 틀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해석과 연주의 차이는 제각각 좋은 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매우 좋은 연주들이 수없이 많으나 다음의 몇가지만 열거해본다.  

   

 

 

  

 

 

1.앙세르메이                              2.제르킨                              3. 아쉬케나지  

1. 앙세르메이의 지휘는 베토벤의 교향곡 연주로도 그 이름이 드높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9번이 커플링되어있어 앙세르메이의 9번에 대한 해석도 감상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2. 제르킨과 번스타인의 협연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들의 빼어난 수연을 아직도 제르킨의 거침없이 뿜어대는 연주를 번스타인은 무리없이 서포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뜨거운 연주를 원하고 폭풍같은 느낌을 받고 싶은 사람은 제르킨과 번스타인으로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쉬케나지를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매우 많다. 

신호도에 따라 다음의 음반들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것이다. 

 

  

 

 

 

위 모두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음반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연주로 첮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빈시타인을 애써 거론 할 필요는 없다. 20세기 여성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남아있는 유디나는 창조적인 예술가요 따듯한 가슴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애호가는 없을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와 연주를 모두 그 이름이 높다.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 노프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분명 그의 팬이되고야 말것이다.  

 에밀 길레스_권터 반트: 이 둘의 연주를 빼놓으려니 아무래도 서운한 감이 몰려온다. 길레스의 러시아적 타건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연주일 것이다. 길레스의 강인한 타건에 흠뻑 매료된 팬들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 어디 강인함 뿐이련가. 2악장의 영롱한 터치는 듣는 사람을 충분히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길레스라는 감동과 함께...여러가지 측면에서 호연으로 생략할 수 없는 음 반 중 하나일 것이다. 권터 반트가 슈베르트 교향곡 미완성에서 보여주는 연주를 들어보신 분들은 또 이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지휘자임에 틀림이 없다.    

  미켈란젤리-줄리니이 두사람이 호흡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리니 역시 지휘에 관한한 그 어느 지휘자 못지 않은 철학을 지닌 사람이다. 미켈란젤리를 구도자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줄리니 역시 그에 걸맞는 구도자일 것이다. 카라얀보다 적은 연주를 남겼지만 결코 카라얀보다 덜 해서가 아니었다. 보다 철저하고 보다 심오한 심연을 꿰뚫어내는 줄리니의 연주는 그 어느 음반 하나도 소홀함이 없는 대 지휘자이다. 정명훈의 스승으로 이탈리아의 지휘 계보를 이어받은 줄리니는 그 어마어마한 선배들의 이름을 더욱 빛내주는 정통 계보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지휘자보다 진중하며 배려깊은 분으로 정녕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한가지 덧 붙이자면 애청반은 곧 명반이다 라는 공식은 아니라고 본다. 각 음반에는 곡 자체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연주 자체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연주가의 이야기가 가미된다면 그 어느 음반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요인들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꼭 명반이 아니어도 애호가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음반들은 서로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굳이 연주에 점수를 매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두 각자의 기호와 사연이 다르니 애청반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이 음반은 이런 점에서 애호하고 저음 반은 저런 점에서 애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외에도 좋은 음반들이 수없이 많으나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제르킨과 발터의 음반도 소개하고 싶었으나 알라딘에서 그 이미지를 찾지 못해 서운하기 이를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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