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남명에 관한 서책들을 읽으며 독자로서 받은 감동의 물결은 말로다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상 좌도와 경상 우도를 각각 대표하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문과 생각을 견주어 비교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으며 사상을 이해하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남명의 일생을 다루다시피한 남명학 총서들을 차례로 읽어가는 즐거움은 비단 즐거움 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지에대한 지표로서의 역할을 올곳이 해주고 있다. 

아래의 책들은 남명학 연구의 서책들이므로 주로 남명을 중심으로 조명하고있지만 퇴계 이황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질수 있게하며 두 인물의 시대적 배경이 같았던 만큼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계기를 마련해주기도한다. 남명과 퇴계 이황, 어느 한쪽만 알게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에 사로잡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남명과 퇴계를 모두 공부하고 싶은 열망을 줄것이다. 

이 책은 남명의 일대기를 학문과 사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다룬 책이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남명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남명을 이 한권으로 마음에 채우기에는 남명에 대한 갈증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만큼 남명은 거대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남명과 관련한 책들을 찾게마련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남명의 사상이 잘 녹아있다. 남명이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던 2글자인 '경의'에 대한 설명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정말 감동스러워 여러번 읽게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님의 사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기절을 발휘하였고 위기의 나리를 구하는데 앞장서게된다.  학문과 사상이 제자에게 끼치는 영향이 그 얼마나 지대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왼 쪽의 이 책은 남명의 생애와 학문, 남명학파에 관하여 여러 연구자료들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에 이미 실학적 사상이 담겨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남명의 독자적인 주체성과 당시 사림의 정신에 대한 좋은 글들을 만날 수 있다. 남명은 유자이지만 불교에 대해서도 탄력적인 인물이었다. 퇴계는 남명에게 노장의 병통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과연 퇴계가 지적했던 남명의 사상적 병통은 무엇을 말함인지 그 진실을 알 수가 있다. 남명은 유, 불, 도를 넘나드는 사상가였음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남명은 왜 그런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자신 사상을 굽히지 않았을까. 그의 학문과 사상적 배경에는 오로지 백성을 위함이 있었다는 것을 그 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연 퇴계는 어떠했을까...궁금해진다.    

 

이 두 책은 제목 그대로 조선 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남명에 관련한 기록들을 소개하고있다. 이는 철저히 남명의 측근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써내린 기록들이므로 보다 객관적인 프리즘을 통해 남명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된다. 남명의 상소문을 좀더 세부적으로 알 수있고 시대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는 권력의 핵심및 백성들의 실태를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상소를 통하여 그 누구보다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겼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과연 군신의 예와 의리란 무엇인가, 강직하고도 결단력있는 남명의 상소문은 우리에게 군신의 의리를 가르치고 있다. 남명은 수차례에 걸친 관직을 제부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았다. 왜 남명은 출사하기를 거부했을까. 단지 사람으로서 출사를 거부하는 자만이 그 가치를 더욱 높여 차후에 활용하기 위함이던가? 그런 얄팍한 이기심에 의하여 출사를 거부했던 인물들도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남명은 결코 그러한 조무라기 선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인물이었다. 출사했다면 정승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남명에게는 철학이 있었다. 바로 출처관이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는 남명의 출처관을 알고나면 비로소 수긍이 갈 것이다.   

     

같은 성리학자로 사서를 읽고 주자를 공부했지만 두사람의 사상은 완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선비로서 추구하는 바에서는 공통점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학문의 목적이 서로다르며 그러므로 안과 밖으로 드러나는 사상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퇴계 이황은 퇴계학파을 아루었고 남명은 남명학파를 이루었다. 경상 좌우도의 두 거대한 학맥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백년신교, 천리신교라하여 경외하고 존중했다. 두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났으므로 한 시대를 고스런히 공유하게된다. 퇴계는 출사하지 않는 남명을 실득하기위해 대사성으로써 편지를 보내기도한다. 두사람은 사상이 달랐지만 상대방에대한 신뢰를 죽는 그날까지 저버리지 못했다. 현대의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하여 상대방을 비방하고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두사람은 상대방에게 기본적인 신뢰를 형성하면서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위의 서적들은 남명에 관련한 이야기들과 그의 인간관계를 잘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남명이 당대의 최고 선비로서 알려지게된 것은 비단 조정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백성들과 무관의 유생들도 그의 이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나명과 관련지어 전해오고있다. 남명과 이야기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감지해낼 수 있는 만민들의 남명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있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들이 많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한다. 나아가 남명의 인간관계를 아주 잘 엿볼 수 있는 서적이 바로 남명의 인간관계, 남명과 그의 벗들, 수우당 최영경이다.  

남명은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절도가 있었으며 벗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역시 그의 학문에 바탕을 둔 것이라하겠다. 남명은 사회관 및 세상에대한 대응을 철저히 학문에서 바탕을 두고있다. 이처럼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일치하여 일생을 살다 간사람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그러나 남명에게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과 의를 인생의 방향으로 설정한 남명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러기에 백성들의 삶에 그 누구보다 더 애착을 가지고 소를 올렸던 것이다. 수우당 최영경은 남명의 학문과 기절을 듣고 한양에서 진주로 찾아가 공부하기를 청한 인물이다. 과연 수우당 최영경은 남명의 학문을 배운 후에 어떻 인생을 살아갔을까... 

   남명의 적통을 이어받은 제자 중 정인홍이라는 인물이 있다. 곽재우과 마찬가지로 임진란을 맞이하여 거병하였고 국난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이바지 한 인물이다. 그 공로가 너무나 큰 나머지 광해군은 내암 정인홍에게 중책을 맞긴다. 정인홍의 학문은 그 어느 누구 못지않게 깊었으며 기절은 스승을 닮아 드높은 절의를 가진 인물이었다. 너무나도 강직하고 타협을 할줄 모르는 그의 성품은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키게되고 간신 이이첨에게 이용당하게된다. 결국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대역죄로 몰려 최후를 맞이한다. 정녕 정인홍과 같은 인물이 조정에 두어명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은 지금의 조선과는 사뭇 달라져있었을 것이다. 불의를 좌시하지 않는 강직함, 왕권과 국력을 강화시켜 조선을 일으켜보겠다는 일념으로 출사했던 정인홍, 그는 오직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열사요 기개의 정절이 꽃피운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 조선의 선비였다. 사욕을 채우려하지 않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그는 정녕 백성의 스승이자 군신의 의리를 아는 선비였다. 스승 남명 조식과 더불어 진정한 선비의 사전적인 의미에 가장  합당한 인물이 바로 정인홍이었던 것이다.    

 

 

  

 

 

 

 위의 책들은 남명의 제자들을 좀더 상세하게 알수 있는 서책들이다.  

 

 

 

 

 

 

 

 위의 책들은 남명 조식의 선비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책들이다.  

 

 

 

 

 

 

 선생님의 문집과....

 

남명의 학문과 문학을 통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서 백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위해 거병했다. 이는 스승님의 실천학문에 입각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퇴계학파와 더불어 조선의 학맥을 이어간 남명의 학문은 최근 많은 연구가 진행중인 듯하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독자들은 남명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문묘에 배향된 18현 중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격이 없는 인물도 있어보인다. 오히려 남명 선생님이야말로 그 어느 선비 못지않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당파적인 잇속때문에 결국 배향되지 못했다. 치열한 당파전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조선이 망하는 그날까지 지속되었고, 어쩌면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론의 영향력이 진행중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있어보인다. 이는 절대로 국민의 탓이 아니다. 국민들로하여금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하는 역사학자들의 책임이 훨씬 더 크다고 본다. 국민을 올바른 사관으로 이끌어야하고, 그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배울 수 있어야한다. 현재는 과거의 퇴적물이며, 그를 바탕으로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밝은 미래지향적 가치관과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자신이 서있는 근간을 모르고서는 정체성의 상실은 물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마저 불명료하게한다. 온 국민이 우리의 역사를 재인식하고 제대로 파악하여 올바른 사관을 가지는 그 날이 오기를 학수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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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2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4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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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에는 퇴계과 같은 이는 있으되 남명과 같은 이는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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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2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4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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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님은 당대의 현실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분위기가 대개 고담준론이라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남명의 사회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민생의 문제를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했던 권력층 중에는 율곡 이이, 서애 유성룡, 그리고 잠곡 김육등이었다. 물론 서리들의 횡포가 국가의 존망을 뒤흔들고 있다고 소를 올린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영향력이 없는 직급의 인물들이 올린 소는 대개 위급한 사안으로 여겨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싶다.  

남명은 서리와 아전의 폐해에대하여 가장 곧고 직언을하여 명종의 노기를 일으키기도했다. 그만큼 급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소의 내용이라 보여진다. 중종대에서 시작한 사람의 화는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고도 치열한 당파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조정에서는 피의 숙청이 다반사였으며 전국적으로는 서리들이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안밖으로 국정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내외상황에서 관료들은 자기 목숨보전하거나 당리 당략및 사리를 탐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남명은 이러한 사회적 국가적 위기의식을 늘 감지하고 있었으며 현실주의 정신이 살아있었던 조선 최고의 사상가였다. 남명은 당대 살아있는 지성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진 퇴계 율곡이 남명과 견줄 수 있는 사상가로서 다소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야 남명과 다를바가 없었겠지만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임금에게 백성을 굽어 살피도록 날카로운 소를 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분명 실천에 있는 것이었다. 공자의 거경이라는 가르침은 바로 자신의 수양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치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기하고 치인하는 것이 성리학이 가지는 하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는 대부분 순수학문을 연구하는데 그쳤으며 고담준론으로 정치하고 가르쳤다. 조선의 설리학적 분위기가 대게 이러했으니 과연 성리학의 본질과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남명 조식의 기절은 조선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 같다. 충청지방에서는 물론 함경도에서도 소를 올려 남명 조식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던 곳을 보면 말이다. 얼마전 문묘 18현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절대로 문묘에 배향되기에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인물도 들어있다. 남명 조식이야말로 문묘에 배향되어야할 인물이 아닐까. 문묘란 공자를 받드는 묘우이다. 이 곳에는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배향하고 공문10철(孔門十哲) 및 송조6현(宋朝六賢)과 한반도의 명현(名賢)을 종사하는 곳으로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 500년에 걸쳐 가장 모범이되고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줄 수 있는 인물들을 종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과연 현재 문묘에 배햔된 이들 중 부적합한 인물은 없는 것인지 재조명해야 할 것이며 문묘에 마땅히 배형되야 할 인물을 빼놓지는 않았는지 엄중히 살펴볼 일이다. 당시는 끊임없는 당파적 싸움에 휘말려 전 국토가 불안했고 사화와 환국으로 중앙정부는 혼란스러웠다. 이를 정확하게 직시하며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려 일깨우려 노력했지만 헛되었다. 백성이 있은 후에 국가가 있고 군왕이 있다는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절실한 시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고있는 퇴계마저도 남명과 같은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으니...아...조선의 운명은 그것으로 내리막길을 가야했다는 말이던가...과연 학문이란 무엇에쓰는 물건인고... 시대는 비록 다르다하나 요즘의 시대도 조선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그저 남명 조식선생이 그립고 그리울 뿐이다...남명 조식과 같은 정치인이나 학자는 이제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이던가....이황 같은 이는 많되 조식과 같은 이는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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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1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3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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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조선의 氣節之最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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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1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3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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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에 관한 글을 읽다보니 점점 그의 학문과 사상에 빠져들게된다. 이는 요사로운 기운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홀리는 그런 심취가아니다. 건중(健仲)을 알면알수록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우러나 스스로 그의 고매함과 기절지최(氣節之最)의 의미를 더더욱 가슴깊이 느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재목그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남명에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책이다. 남명을 관직에 천거했던 인물들의 평과 사직소를 통하여 투영되는 남명의 사상 다시한 번 직시할 수 있다. 또한 사관의 매우 통찰력있으면서도 냉정한 평가들을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학문 그리고 사상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남명이 출사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 백성들의 복이 적은 탓이라는 성호 이익의 평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남명이 출사하기를 바랬던 사람들은 군왕을 비롯하여 퇴계 황 그리고 이몽량과 기대승등이다. 그러나 남명이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살펴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남명은 19에 이미 관직에 나서지 않기로 결심한다. 출처관을 가지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인 듯 보인다. 그만큼 남명은 어린 아니에도 불구하고 학문은 물론 국내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남명이 19세가 되던 해는 기묘년으로 정암 조광조의 부고를 접하게된다. 조광조가 누구던가. 사림 최고의 선비로 오직 백성을 위한 왕도를 펼치기를 일생의 숙원으로 삼았던 분이셨다. 그런 정암선생이 역모로 몰려 사사되는 불운을 격게된 것이다. 바로 기묘사화가 그것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신하로 거느리기에는 부족한 임금이었다. 신하의 그릇이 너무 큰 탓이련가... 더불어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세력의 후예들은 이를 몹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중종 사후 중중의 맏아들이었던 인종이 등극하여 기묘사화에 희생된 선비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복원하는 등 선정을 펼치려 했으나 병약한 탓에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8개월만에 붕어한다. 조선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운했다. 제대로 된 임금을 만날라치면 그만 일어 터지곤한다. 인종에 이어 윤원형일파와 문정왕후는 나이어린 명종을 등에 업고 학정을 일삼게된다. 바로 대윤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며 선비 200여명에게 죽음을 내리거나 먼 귀향을 보내게된다. 조선의 정부는 어린 명종을 앞세워 썩을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일이 이지경이면 임금이라도 좀 현명해야 하겠지만 명종 또한 어리숙하여 정치의 정자로 잘 모르거니와 문정왕후의 치마바람에 힘을써보지 못한다. 그러나 내직의 관료들은 바짝 엎드려 비위 맞추어주기에 급급하며 외직의 관료들은 부정 축재에 혈안이되어 매관 매직은 말할 것도 없고 업자들과 짜고 방납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대는데 급급했으니...나라의 꼴은 말할나위 없이 부패하고 있었다. 

남명은 이러한 국내 정세에서는 제 아무리 관직에 나가도 소용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의 눈과 귀는 멀어있고, 신하들은 사리을 밝히기만하며 세월을 축내고있고 죽어가는 것은 백성이요 방납의 폐단으로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마을은 전국적으로 셀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다. 과연 이러한 국내 정세에 제대로된 그 어떤 선비가 출사하여 선정을 펼수있을 것인가...백성을 그토록 사랑했던 퇴계 이황마저도 신하된 도리로 예만 갖추어 관직을 제수받기가 무섭게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남명은 비록 은거하여 참봉과 주부2회의 관직을 받았지만 고사했고 단성 현감직을 받지 않았다고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놓았던 것은 결코아니었다. 단성현감 사직소를 보면 그가 얼마나 군왕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 것을 주장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다른 선비가 같은 소를 올렸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명이 순수하고도 사심이 없으며 고매한 유일의 조선 선비라는 점을 온 세상은 물론 군왕도 잘 알고 있기에 4년이라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남명이 이처럼 70평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직을 고사하고 은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시대의 불운이요 백성의 불운이라...거대한 고목이 100여년 동안 벌레가 좀먹어 그 진액이 다 빠져버렸으므로 언제 어느 바람에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조선의 위기 의식을 끊임없어 일깨우는 상소를 올려봤지만 군왕들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군왕의 불행인가, 백성의 불행인가, 신하의 불행인가...조선은 그렇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조식은 끊임없이 나라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제자들을 길러냈다. 차후에 있을 국란을 대비한 조식은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 죽유 오운, 이로, 이정, 조종도등의 빛나는 의병장들을 길러냈다. 약포 정탁은 일제와의 결전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거부되고 화친하자는 중론에 다다르자 그만 활복으로써 항의했다. 그들의 활약이 없었던 들 조선의 백성들의 안위는 훨씬 더 위태로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승부는 바로 의병장들의 활약과 수군 이순신장군의 선전에 힘입은 바이다. 이순신 장군이 모진 고문으로 병이들어 죽음이 이르르기 직전 그를 구명하여 다시금 수군 통제사로 활약하도록 한 사람은 바로 정탁이었다. 그결과 이순신은 12척의 군선으로 왜적 250척을 맞아 물리치고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처럼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란 승리의 주역들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학문을 하는 것이 남명의 철학이었다. 그의 학문은 실천에 있었던 것이다. 고담준론이 아니라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그는 이상향으로 삼고 학문에 정진했던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명의 사상은 현대에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당대의 조선이나 현대의 우리가 지향해야할 덕목은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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