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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명 조식 2 - 남명 전기 자료,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ㅣ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남명학교양총서 14
최석기 엮음 / 경인문화사 / 2009년 6월
평점 :
남명 조식선생님은 당대의 현실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성리학적 분위기가 대개 고담준론이라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남명의 사회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민생의 문제를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했던 권력층 중에는 율곡 이이, 서애 유성룡, 그리고 잠곡 김육등이었다. 물론 서리들의 횡포가 국가의 존망을 뒤흔들고 있다고 소를 올린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영향력이 없는 직급의 인물들이 올린 소는 대개 위급한 사안으로 여겨지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싶다.
남명은 서리와 아전의 폐해에대하여 가장 곧고 직언을하여 명종의 노기를 일으키기도했다. 그만큼 급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소의 내용이라 보여진다. 중종대에서 시작한 사람의 화는 영정조대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고도 치열한 당파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조정에서는 피의 숙청이 다반사였으며 전국적으로는 서리들이 백성들의 피고름을 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안밖으로 국정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내외상황에서 관료들은 자기 목숨보전하거나 당리 당략및 사리를 탐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남명은 이러한 사회적 국가적 위기의식을 늘 감지하고 있었으며 현실주의 정신이 살아있었던 조선 최고의 사상가였다. 남명은 당대 살아있는 지성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진 퇴계 율곡이 남명과 견줄 수 있는 사상가로서 다소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야 남명과 다를바가 없었겠지만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임금에게 백성을 굽어 살피도록 날카로운 소를 올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분명 실천에 있는 것이었다. 공자의 거경이라는 가르침은 바로 자신의 수양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치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수기하고 치인하는 것이 성리학이 가지는 하나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는 대부분 순수학문을 연구하는데 그쳤으며 고담준론으로 정치하고 가르쳤다. 조선의 설리학적 분위기가 대게 이러했으니 과연 성리학의 본질과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남명 조식의 기절은 조선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던 것 같다. 충청지방에서는 물론 함경도에서도 소를 올려 남명 조식을 문묘에 배향하자고 주장하는 이가 많았던 곳을 보면 말이다. 얼마전 문묘 18현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절대로 문묘에 배향되기에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인물도 들어있다. 남명 조식이야말로 문묘에 배향되어야할 인물이 아닐까. 문묘란 공자를 받드는 묘우이다. 이 곳에는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를 배향하고 공문10철(孔門十哲) 및 송조6현(宋朝六賢)과 한반도의 명현(名賢)을 종사하는 곳으로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 500년에 걸쳐 가장 모범이되고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줄 수 있는 인물들을 종사하는 것이 마땅하다면 과연 현재 문묘에 배햔된 이들 중 부적합한 인물은 없는 것인지 재조명해야 할 것이며 문묘에 마땅히 배형되야 할 인물을 빼놓지는 않았는지 엄중히 살펴볼 일이다. 당시는 끊임없는 당파적 싸움에 휘말려 전 국토가 불안했고 사화와 환국으로 중앙정부는 혼란스러웠다. 이를 정확하게 직시하며 목숨을 건 상소를 올려 일깨우려 노력했지만 헛되었다. 백성이 있은 후에 국가가 있고 군왕이 있다는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절실한 시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고있는 퇴계마저도 남명과 같은 목숨을 건 상소를 올리지 못하였으니...아...조선의 운명은 그것으로 내리막길을 가야했다는 말이던가...과연 학문이란 무엇에쓰는 물건인고... 시대는 비록 다르다하나 요즘의 시대도 조선의 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그저 남명 조식선생이 그립고 그리울 뿐이다...남명 조식과 같은 정치인이나 학자는 이제 찾아 볼 수 없는 시대이던가....이황 같은 이는 많되 조식과 같은 이는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