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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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애초에 느낀 것이지만  고미숙은 골수분자라는 느낌이다. '열하일기---' 에서도 고미숙은 온전한 연암이 되어있었다. '네가 나이고 내가 너이다'라는 우정론과 맞아떨어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고미숙의 열정과 몰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에서 그녀는 온전한 연암이되어 있었고, 그러므로 열하일기를 마치 연암과 마주하는 느낌으로 접할 수가 있었다. 연암과 독자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혀준 매체, 아니 독자를 다이렉트로 연암을 만나고 있다는 착각을 일이킬 정도로 그 역할은 대단히 컸다. 이 점은 고작가가 아니었더라면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부분일 것이라 느낀다. 고작가는 정말 몰입형이며, 완벽한 골수분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골수분자가 마음에 든다. 비록 몰입한 나머지 그 옆을 바라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해도 나는 그 몰입이 좋다. 그리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 골수분자가...

 골수분자의 원심적 시각이 남기는 한계...그러나...그 가능성...  

고작가는 임꺽정에서도 몰아일체의 형식을 보여준다. 이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미 출판 협회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임꺽정]의 안내서이니 말이다. 이처럼 몰입의 골수분자가 되다보니 안에서 원심력만을 발휘하게되는 측면이 없지 않아보인다. 그 예로는 고작가는 청석골을 추방된 아니 이탈한 마이너들, 결국 도망자들의 막다른 거점이자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지극히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막다른 골목에는 고작가가 말하는 거점이 없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대학을 가기위해 죽어라 공부하고, 대학에서는 학점에 목숨을 걸며, 그리고는 백수가된다. 이게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이다'  --13쪽--   

'고로 우리시대의 마이너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마이너라는 낡은 습속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 할 수 있어야 한다.' --56쪽-- 

임꺽정의 시대적 배경은 사실상 요즘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빈부의 격차가 매우 크며, 지배자(기득권)와 피지배자(농공상), 즉 요즘으로 말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역사적 판박이나 다름이 없던 시대였다. 이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막다른 골목이 문제가 된다. 임꺽정의 시대는 막다른 골목에서도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다시말하면 고작가의 말대로 타자를 수용하는데 거부감이 없던 시대였다. 그들은 타자를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의 방식은 생각과 행동의 급간차이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현대는 사고와 행동간의 시간차가 너무크며 그러므로 온갖 생각이 들어차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이질적 문화의 변화속에서 현대의 마이너들이 만나는 막다른 골목은 당시의 골목과는 거리가 너무나 요원하기만 하다. 

우선 꼬뮌을 형성할 수 없다. 우선 자본의 시대적 성질이다. 당시의 시대는 자본을 따로이 필요로하지 않았다. 꼬뮌을 형성하는데 웬만한 기술을 보유한 마이너의 인물들을 청석골로 데려오기만하면 된다. 시대적 조건으로는 전혀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마이너들은 철저한 단독이다. 그러므로 꼬뮌을 형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88만원 세대이거나 아니면 백수들로 꼬뮌을 형성할 수 있는 여력도 없다. 가장 요긴한 자본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로는 마이너들의 미래이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본디 가진 것이 없었다. 게다가 희망도 없다. 어찌어찌해서 한밑천 확 잡아서 신분 상승도하고 권세가들 부럽지 않게 잘먹고 잘 살아보겠다는 야심을 가질 수 있는 시대적, 사회적 여건이 애초에 되어주질 못했다. 신분 자체의 제약이 그것이다. 그러니 사고와 행동 사이에 시간차가 없어도 되는 좋은 조건을 갖춘 것이다. 현대와의 차이점이라면 큰 차이점이 될 수 있다. 현대는 쿵푸를 하면 그것이 곧 부를, 지위를 약속하는 사회이다. 그에 대한 제약적 신분사회도 아니니, 그 가능성은 두령들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에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오히려 꼬뮌을 형성하는데 장애물이 되어주고 있는 사회가 현대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은 조선의 마이너들과는 다르다. 조선의 마이너들에게는 미래가 없으며, 필요에따라 3일 잔치를 벌이고 먹어줘도 되는 마이너들이지만 현대의 마이너들은 이루기 힘든 희망의 불씨가 그나마 남아있기에 꼬뮌을 형성하기 어렵다. 온전한 포기, 즉 가장 밑바닦으로 내려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골수분자 고미숙의 희망을 찾으시라...

그렇다고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비록 외형적으로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고는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밀폐되어있는 막다른 골복이 아니냐고 말한다면 너무나 자괴적인 생각이다. 고작가가 이 책을 통하여 말하고 싶은 부분도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고 있다. 너무 골수분자라 잘 안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고작가의 핵심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사람의 독자인 나는 고미숙이라는 골수분자의 한계속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을 말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사고를 좀 바꾸어주기만 하면된다. 자본도, 단독적 추진형태도 모두 바꾸어주면 가능한 일이 된다. 그리고 쿵푸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마이너들이 쿵푸를 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작가처럼 말이다. 사실 고작가도 알고보면 마이너였다. 그런 마이너가 이제는 메이저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이너로서 꼬뮌을 형성하고, 몸으로 부딪히면서 앞길을 헤쳐간 대표적인 마이너가 고작가이다. 사고의 전환이란 무형에서 유형의 본질속으로 탐구해가는 것이다. 무엇을 탐구하는가? 바로 자신이다. 자신의 쿵푸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저기저...두령들이 그러했듯이...그리고 마이너들끼리 뭉치고 뭉치는 사회적 성향을 가꾸어가야 한다. 현대의 사상적 배경을 고려할 때 대단히 엄청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반드시 결실은 오고야 말것이다. 고작가가 마이너였지만 메이저가 된 것 처럼...마음먹고 이제 찾아 나서면 된다.  내가 뛰게될 마이너 리그의 거점을 행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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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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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웃음은 덤이다. 고미숙과 연암이 잘 버무린 지혜를 우리의 도가니에 담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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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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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는 열하일기와 박지원에 대해서 배우고 그의 작품인 '허생전, 양반전, 호질'등은 대수능에서도 문제로 출제하는 텍스트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인지도는 어느 인물이나 작품에 뒤지지 않는다. 가히 국민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막상 "열하일기를 읽어보신 분?" 하면 딱히 손을 번쩍 들어올릴만한 독자가 몇이나 될까...그러는 당신은 읽어보았소라고 묻는다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수 밖에 없는 한 사람임에랴... 

열하일기를 읽어보야에 겠다고 생각하게된 동기는 오직 작가 '고미숙' 덕분이다. 이 장을 빌어 고미숙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고미숙님의 TV강연을 시청하게 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겠다. 어찌나 강연을 재미나게하던지...그녀가 써내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하는 매력덩어리 고미숙님~. 우리의 고전이 이토록 멋지게 강연해주다니... 우리의 것을 늘 소중하게 생각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진 한 사람으로 고미숙은 내게 충분한 동기를 주었다. 정말 유익한 그녀의 강의였다.  

프롤로그에서 나타나는 현학적인 고미숙

드디어 고미숙의 책을 집어들었다. 책의 껍데기부터 웃기기 시작하는 양반이다. 연암을 닮아가고 있나? 이 책을 읽고나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부록부터 읽으면 더 재미있다나...고미숙은 '프롤로그'에서 지극히 현학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한다. 고미숙의 공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표현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 이런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 고미숙은 정말로 표현력이 풍부한 작가이다. 한마디로 고미숙은 '정말 글을 잘쓰는 작가' 중 한사람이다. 그러나 그토록 현학적인 표현들은 앞으로 이 책을 읽어가야하는 독자들에게 깊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고미숙의 현학적 표현들을 계속해서 만나게되면 어쩌나...하는 절망감 말이다. 마치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압박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도 이점을 걱정하면서 읽어갔던 것이다. 푸코와 들뢰즈를 공부한 사람이라서 그런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미숙과 연암의 잘 버무려진 웃음과 진지함

그러나 결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암과 동행하게되면서부터 고미숙의 흥미진진한 문체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고도 열하일기를 읽지않는 사람이있다면 이상하다 생각하리만치 그녀의 필체는 독자를 사로잡는다. 책을 읽다가 할 일도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발생한다. 고미숙의 언어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언어는 본디 상상력을 제한하는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가?? 언어의 본질에 의심을 품게하는 작가...고미숙이다. 무엇보다도 고미숙은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의 글 안에서는 그런 따스함이 배어있다. 이 책을 그토록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고미숙과 연암의 유쾌한 웃음의 미학 때문 만은 아니다. 고미숙의 따듯함과 연암의 웃음이 잘 버무려진 탓이다. 아니, 고미숙이 바로 연암 박지원인 것이다. 고미숙안에는 연암이 들어와 있던게 분명하다. 이런걸 두고 빙의라던가? 고미숙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연암의 빙의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누가뭐라고 한다해도 이런 나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미숙은 생철학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다. 연암의 사상과 고미숙의 이해가 함께 잘 버무려지면 이토록 흥미로우면서도 뜻깊은 인문학을 탄생 시킬 수 있단 말인가...연암이라는 한 사람의 위대함을 고미숙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연암이 그 얼마나 재기넘치며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사람인지...연암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꼼짝없이 연암에 의하여 포착되어 연암의 사상과 결합하면 바로 통찰력으로 변모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자연이든...

 

연암에 대하여... 

연암에 대해서 잘 알고싶다면 위키백과에서 연암 빅지원을 치거나, 박지원을 치면 바로 알 수 있다. 위키백과는 빅지원이라는 인물의 백과 사전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좋은 정보가 또 있을까? 그러나 백과사전의 설명으로는 연암을 알아낼 길이 없다. 절대로 말이다... 그러나 고미숙의 이 책과 함께라면 연암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 '연암' 이라는 인물의 역사적 기치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의 인간 박지원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열하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 박지원의 우정론에서 출발하여, 사건과 사물로부터 확장해가는 사유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다. 고미숙은 이런 박지원을 노마드라고 했다. 노마드는 구속을 원치 않는 존재이다. 한마리의 야생마와 같은 존재이다. 길들일 수도 없고 길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노마드는 육체만 노마드인 것이 아니다. 사유의 방식도 노마드이다. 그러나 사건과 사물을 통하여 그는 정확하게 시대 통찰하고 있다. 그의 빛나는 웃음의 미학과 함께 말이다..    

자...옆의 사진을 보시라. 연암 빅지원의 초상이다. 우선 연암의 체구를 먼저 감상해보시길... 떡벌어진 어깨와 육중한 몸통,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팔뚝도 무척 굵어 보인다...체중이 상당히 나감직하다. 그러면 이제 연암의 얼굴을 살펴보시라. 체구를 감안한다면 결코 살이 많이찐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체구와 비교했을 때 얼굴이 무척 작아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연암이 비만은 아니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렇다. 연암은 무척 체력이 단단하고 강단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는 이제 연암의 눈매를 보시라. 첫 인상치고는 너무 매서운 눈초리이다. 옆으로 쭉-찢어진 눈이 더구나 위로 치켜뜨고 있다. 영락없는 장군깜이다. 당장에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연암의 눈매, 호걸 무인의 기질마지 엿보이는 연암의 초상화... 그리고 이제는 연암의 수염을 살펴볼 차례이다. 서릿발같은 연암의 수염들이 아주 힘차게 가슴까지 내리뻗어있다. 한 가닥 만져보기라도 할라치면 꿈틀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은 수염...강철로만든 가는 철사가 아래로 뻗어 내려온 느낌이다. 눈매와 수염은 연암의 강렬한 미이지를 전달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히 누구도 연암 앞에서는 머리를 꼿꼿히 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추상같은 기상이 엿보이는 초상화이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는 정밀하기로 유명하다. 흔히 빠르게 그린 단조로운 일반 초상화도 있지만, 연암의 그것은 확연히 구분되는 조선의 초상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극세사진을 보는 듯 하다. 연대가 오래되어 초기의 현장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겠으나 연암의 내외적 모습을 100% 보여주는 좋은 초상화라 생각한다. 연암의 초상화만 떠올려도 웃음이 실실 새어나오니 말이다... 더욱이 연암은 정말 배꼽 잡는 양반이다. 그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니...허참...

 고미숙은 이러한 연암의 초상화가 주는 이미지와 열하일기속에서 나타나는 연암의 웃음을 동시에 떠올리며 글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저 얼굴의 개그' 라니...언뜻 개그를 상상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얼굴인데 막상 저 얼굴로 개그를 하는 장면과 클로즈업을 시키면 그야말로 더없이 우스운 개그를 연출하게되는 것이다. 고미숙은 초상화에서 드러나는 연암의 이미지가 연암의 개그와 혼합되어 변화 무쌍한 표정들로 바뀌게되면 그야말로 개그의 극치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읽는 실제로 저 얼굴의 개그를 생각하면 웃음을 참을 수가 없게된다.  

더 중요한 것은 연암의 개그가 개그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개그는 언제나 동반하는 깊은 통찰이 등장한다. 그의 통찰은 바로 사상가로서의 연암을 느낄 수 있게한다. 자...웃음과 통찰력, 그리고 그의 사상의 조합...고미숙에 우리에게 전해주려고하는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육체적인 노마드가 소유하고 있는 사상적 노마드를 고미숙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였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연암의 글과 통찰력, 그리고 그의 사상을 감지하게될 독자들이 느낄수 있는 충격...연암이라는 위대한 인물에대한 단순한 이해를 뒤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이 반성하게하는 인간 연암을 그동안 너무나 몰랐다는 반성을 하게만든다.   

 

연암의 소중한 가르침

연암과 무딪히는 모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고정된 표상의 말뚝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게 변이하면서 그 무엇의 경계에 서있는 연암, 그래서 고미숙은 그를 경계인이라 칭한다. 경계인이란 이방인 이라는 의미를 가지기도하지만 넘나드는 의미를 함축하고있다. 고미숙은 후자를 뜻하고자 경계인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열하일기를 읽다보면 연암의 생각이 들려온다. 연암은 우리에게 계속 묻고, 다층사고를 하라고 권하기 때문이다. 표상의 말뚝이란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그 말뚝에 매어있는 한 우리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것들의 성질을 볼수없게된다. 인접한 것들과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할 수가 없다. 옳고 그름의 가운데에 진리가 있고 도가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우리가 배워야 할 노마드 연암의 모습이다.  

노마드 연암은 매우 창의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억매이지 않기때문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창의적이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자유로운 탐구의 기회를 주어야 하는 자명한 이치를 고미숙은 연암을 통하여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고미숙이 의도했던 안했던 간에....연암은 사물이든 사건이든 이면에 숨겨있는 본질을 보라고 권한다. 본질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상태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가치이다. 미지의 수를 구하려면 올바른 태도를 필요로한다. 미리 정해진 고정값으로는 대입이 불가능하다. 유기적인 상황속의 X값을 어떻게 고정된 수치로만 대입을 할 것인가. 번번히 오답일 수 밖에....연암은 우리의 고정값을 벗어던지라고 말한다. 아니 고미숙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가 말하고 있다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연암이 고미숙이고 고미숙이 연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과 연암

 연암과 같은 인물이 과연 우리의 선조였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우리의 고전 속에 살아 숨쉬는 선조들의 정신과 얼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모르고있었나보다. 고미숙과 연암의 유쾌한 한마당은 독자인 나를 사로잡았다. 연암을 고미숙이라는 사람이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고미숙이 아닌 다른 사람이 연망을 만났더라면...어쩔뻔한건가...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게하는 것은 바로 연암과 고미숙이 서로 버무린 감동을 독자의 도가니 속에 담아두고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암에게서 배우고 우리의 귀중한 기치를 부여하는 순간 연암은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도 일조할 것이다. 우리의 선조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기르는데 일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보다 더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것으로 스스로의 자긍심을 길러주는 것보다 우리를 강인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의 정신 자산으로 우리의 정신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대는 비록 다르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연암에게서 수많은 지혜와 재치 그리고 통찰력을 배울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웃음의 던지는 개그는 덤인 것이다. 비록 웃음이 이 책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결코 그 웃음 뒤의 역설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그 웃음은 바로 허공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숨은 연암의 통찰력이야말로 우리가 꼭 붙들어두어야할 소중한 자산이다.

 고미숙이 만난 연암은 바로 "나- 이런 사람이야~",  고미숙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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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2-01-3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은 어떻게 읽으셨나 궁금해서 찾아봤어요. ^
흠뻑 빠지신 것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이 책 읽고 저도 박지원에겐 흠뻑 빠졌으니
고미숙님이 저를 잘 안내해주신거죠?

요 책 보면서 알게된 [비슷한 것은 가짜다]가 전 더 좋았어요.
정민선생님처럼 단정한 글을 더 좋아하나봐요. 제가...^^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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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 7년 해놓고...그가 여러분과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 함께 하실분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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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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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사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OK 하실 분은 얼마나 될까... 나는 NO!

다수의 사람들이 대기업 삼성의 진실을 용기있게 파헤쳤다고 찬사를 보내마지 않는다. 어떤이는 글로벌 삼성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어떤이는 양심의 선언이라고도 말한다. 저자의 폭로를 그 무엇이라 생각해도 좋다. 삼성이 비리가 많았고 권력과 타협했으며 부패한 기업이라는 것도 좋다. 그 무엇이든 다 좋다. 그러나 저자에게 끈임없는 의문이 든다... 왜 그는 그렇게 추악하고 더러운 삼성의 거대 기업의 밥을 먹으며 삼성의 더러운 짖거리를 해주는 견공 노릇을 7년씩이나 해온 것일까... 

그 렇게 양심적이고 세상의 추악한 모습에는 치를 떨며 참을 수 없는 강직한 사람이었다면 왜 그는 7년씩이나 섬성이라는 주인이 주는 밥을 받아먹으며 그 주인에게 7년씩이나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충성을 한 것일까... 그리고는, 그렇게 7년간의 충성을 바친 삼성을 되돌아 사납게 물어뜯는 이유는 무엇일까...그럴줄은 모르고 입사를 하고보니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이 권력과 영합하여 세상의 온갖 더러운 짖을 다하는 기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러한 천인공노할 사실들을 온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생각하여 만 천하에 모든 것을 폭로하노라고 말한다면...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는 삼성에 7년씩이나 몸을 담았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삼성의 비리 담당 고문으로 채용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7년씩이나 걸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양심적이며 정의에 불타오르는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는 인물이었다면...과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만 천하에 폭로하는 그의 양심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불의라는 것을 알았다면 애초에 발을 들여 놓지 말던가, 아니면 처음엔 몰랐지만 나중에라도 알았다면 그 순간 바로 양심 선언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녕 정의로운 일이며 양심이 있는 자가 할 일인 것이다. 마음껏 녹을 먹고나서 되돌아서서는 비리를 폭로하는 것은 배신 행위에 불과한 짖이다. 책에 의하면 삼성은 조직 폭력집단을 능가하는 그 무엇을 가진 더러운 기업이다. 그는 이를 잘 알고서도 삼성에서 녹을 먹었다. 조직 폭력 집단에서도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배신은 어쩔 수 없이 배신일 뿐이다.  

양심선언과 배신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양심선언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상대의 가치관이 다르다고 판단되고 상대방에 의하여 부당한 요구를 받을 때, 그에 항거하는 하나의 저항권이다. 그리고 그 집단에 일시적으로 동조하여 행동하지만 그것을 즐기지 않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온갖 수많은 것들을 즐겼다. 자신은 절대로 즐기지 않았노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삼성에 몸담고 있었던 7년은 그가 분명 즐거워했다는 것을 방증해주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팽된다고 느끼는 순간 배신감에 사로잡혀 폭로를 하게된 것이다. 배신이란 이럴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것이 어찌 양심 선언의 성립에 전제가 되어주는 상황이란 말인가... 

배신에대하여 똑같은 배신으로 앙갚음하는 것을 양심선언이라는 포장지로 둘둘말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 아니라면 이를 달리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개인적으로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은 믿을 수가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신뢰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다. 상호 신뢰는 그것이 조직 폭력배끼리의 신뢰이든, 현자들 끼리의 신뢰이든 그 자체로 지켜야하는 것이다. 나쁜 짖을 함께 해놓고 불리한 상황에서 자신만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독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나와 나쁜 짖을 함께한 친구가 나를 배신하고 자기만 쏙 빠져나가면서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해버린다고 생각해보시라...그런 친구가 있다면 독자들은 그 배신에 아마도 치를 떨고 말것이다... 

삼성은 마치 비리 덩어리이고 너무나 추악한 집단이며 자신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삼성의 더러운 모습을 만 천하에 고발한 용기있는 지성인으로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함께 온갖 나쁜 짖은 다해놓고 자신만 살아보겠다고 꽁무니를 뺀 인사이고 신뢰라고는 한푼어치도 없는 정말 믿음을 줄 수 없는 인사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할술 더떠서 그는 그 배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수익을 잘도 챙기고 있다. 배신의 책으로 돈벌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정말 더 나쁜 배신이다. 흔히 배신자는 스스로 자책하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배신을 하기는 하지만 배신을 했다는 스스로의 자책에 괴로워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렇듯 돈벌이까지 나서다니...  

그는 삼성을 위해 스스로의 손에 그 더러운 피를 기꺼이 뭍힌 인물이다. 그것도 빤히 알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그 댓가로 삼성이라는 주인이 주는 달콤한 밥그릇을 챙기며 즐겼다. 7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말이다... 그리고는 폭로를 한 것이다... 

나는 결코 삼성이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뢰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인사의 배신이란 저런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저런 인사와 그 어떤 일을 기꺼이 함께 하고싶은 독자가 있다면 서평의 별를 마음껏 눌러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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