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통보감정해 명문역학총서 8
최봉수 외 / 명문당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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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강망(欄江網) 또는 조화원약(造化元鑰)이라고도 하는 이 책 궁통보감(窮通寶監)은 말 그대로 窮과 通을 일깨우는 고전이다. 명학의 기초가 되는 틀이며 명의 모든 것은 이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견해이지만 궁통보감이 없는 명학은 이빠진 동그라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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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리요강 - 정통명리학의 교과서
박재완 지음 / 역문관 / 197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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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用忌病藥을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으나 혹 구하고자하는 분이 계시다면 다독을 권해드립니다. 특히 실관을 여러차례 보시기 바랍니다. 지대하지는 않으나 그 바탕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 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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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적천수천미 - 수정증보판 명문역학총서 62
김동규 지음 / 명문당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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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그 아름다움을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책이다.
세차례 정독후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한 줄 남긴다. 喜用忌病藥을 구하시는 분이라면 필독서라고 여기는 바이다. 吉凶은 바로 이 다섯가지에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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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의 우두머리 오두인을 오늘 밤 삼경내로 친국하고,
나머지는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라!' 상의 명이 떨어졌다.
승지가 아뢰었다, '80여명을 귀양보낸 적이 있습니까?'
'100명이라도 죄가있으면 그렇게할것이다', 상이 답했다.

박태보공은 오두인에게 말하기를,  '이 상소를 짓고 쓴 것은 진실로 제가 한것이니 , 
상께서 물으시거든 바른대로 아뢰소서', 했다.

집필했다는 박태보를 잡아들이고, 형구를 준비하라!' 
상이 불호령을 내리니 내관이 숨이 차도록 뛰어와 아뢰기를,
'밤이 늦어 준비가 불가하옵니다.' 하였다.

'내 친히 국문하겠다!' 
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보가 잡혀오자,
'네가 어찌 임금을 없신여기는가? 전에도 나를 거스르고 힘들게 해던 놈이 네가 아니더냐?', 상이 소리쳤다.
'저는 임금을 없신 여기지 않았사옵니다. 중궁을 위한 것이 곧 전하를 위한 것이옵니다', 태보가 답했다.
'이런 독한 물건은 바로 베어도 안될것이 없다. 원정을 받지 않을 것이니 바로 엄형에 처하라!!'  상이 일갈했다.
'그리하오시면 폐단이 클것이옵니다!' 
우의정 김덕원이 아뢰었으나 임금의 불호령에 장 치는 소리가 향교동에까지 들렸다.

 골육이 깨지고 유혈이 낭자했으나 태보공은 신음소리 한마디 내놓지 않았다.

'이런 독한 물건이 무슨 일은 못하리오!!' 태보공은 안색하나 바뀌지 않았는데 상은 노발대발했다.
이 날, 태보는 날이 새도록 장을 맞았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자 숙종은 압슬형을 명했다. 
무릎을 망가트릴 요량이다. 
무릎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태보는 의연했다. 
뼈가 깨어지는 순간에도 태보는 비명 한마디를 내놓지 않았다. 
이미 태보는 죽을 작정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이는 형을 받는 태보가 아니라 형을 가하는 숙종이었다. 
지친 숙종이 형벌의 강도를 높이고자 말했다, '낙형을 가하라!!.'
'네가 오늘 살것같으냐, 온 몸을 두루 지져라!!' 
숙종의 독기가 오를대로 올라있었다.

 조선의 형법에 낙형을 발바닦만 지지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박태보를 거꾸로 매달고 옷을 찢은 후 맨살을 지지게했다.
숙종은 박태보 몸의 한 쪽만 지지면서 나머지 한쪽도 지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태보는 의연했다.

불에 달군 인두를 번갈아가며 전신을 지지니 살이 타는 냄새가 국문장을 가득메웠다. 
그 누구도 과연 눈을 뜨고는 차마 보지 못할 순간이고 참혹한 장면이었다. 
상대가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라도 말이다. 

 태보의 전신을 빈틈없이 지지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한 나장이, 
'법에는 발바닦만 낙형하는 줄 아뢰옵니다' 라고 주저주저 아뢰자,

'그럼 두 발을 두루 지지라!'
숙종은 자신의 명이 초법적인 형벌이라는 점을 몰랐을리 없다. 
끝내 태보를 죽일 작정이었다.

 숙종은 태보의 전신을 26 차례 지지고 압슬을 가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숙종은 또 장을 치라 명했다.
(여기서 26차례라 하는 것은 전신 지지기를 26차례 했다는 뜻이다. 전신에 인두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장을 받자
태태보는 신음을 참으며 견디고 있었으나 살가죽은 견디지 못하고 터져 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래도 태보는 안색을 바꾸지 않았다. 
태보가 의연할 수록 숙종의 분노는 더욱 고조되었다. 
'나장은 무엇하는가, 장을 더 세게 치라!!!! 숙종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그 혹독한 매질에 결국 태보의 정강이 뼈가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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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 己巳年, 潘南 朴, 태보는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를 직접 작성하여 승정원에 제출했다. 
연합 상소였다. 
오두인은 벼슬이 가장 높았고 상소 대표자가 되었다. 

 상소를 올린지 꽤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는 해질녘 황혼이 깃드는 시각,
숙종은 갑자기 승지 이서우를 불러 상소를 읽게했다.

 상소는 '전 판서 신 오두인~ ' 으로 시작하여 '신 등은 서러워 울며 아뢰옵니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상소의 내용은 인현왕후의 남편이 되는 숙종에게 본 처인 인현왕후를 내치지 말아달라는 읍소였다.
즉, 당신의 마누라를 당신께서는 내치지 말아주세요~~ 하는 상소였던 것이다. 

 
물론 이는 숙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밀려나는 상징적 사건이기에
서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중대 사안이었고,
자신들을 위한 집단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중전을 폐서인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태클을 걸기에 그만한 명분이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참고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에 관한 괴이하고도 믿기 어려운 사건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말그대로 믿을 것들은 아니다.
폐서인을 해야하거나 사약으로 죽일 작정을 한 마당에 어찌 그들에대한 아름다운 전설들이 남아 있겠는가.
없는 죄도 만들어 덥어 씌워야 그 죄를 물어 단죄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경우에 따라 없는 죄도 있게되고 없던 미담도 생겨나는 법이다. 박태보를 죽이기위해 죄가 만들어진 것 처럼말이다. )

숙종은 11세 되던 해에 혼인을 했는데 부인은 광산 김씨 인경왕후였다. 
김만기의 딸로 숙종에게 시집와 딸을 둘 낳았으나 모두 생존하지 못했다.
 인경왕후는 자신이 천연두를 앓다가 자식없이 일찍 유택에 들었다. 
하여 숙종은 15세에 여흥 민씨 유중의 딸 인현왕후를 맞이했다.
 인현왕후 역시 오래도록 자식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바로 인동 장씨 희빈이다. 
숙종실록은 희빈 장씨를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라고 쓰고있다. 
실록이 조선의 왕비중 유일하게 외모를 언급한 대상이 희빈 장씨였다. 
그 미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숙종은 여인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건들을 만들어낸 주인공이다. 
숙빈 최씨와의 로맨스는 드라마로 제작될만큼 극적이었다. 
아니, 숙종의 여인들은 거의 극적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었던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숙종은 여러 비와 후궁을 두었으니 권력을 쥔 자의 이점을 마다하지 않은 임금 중 하나였다.
어째거나 남인의 여인인 희빈 장씨와의 로맨스가 달달한 만큼 서인의 여인인 인현왕후와의 서먹함은 깊어갔다.
때마침 장씨 희빈이 회임을 하더니 떡 하니 불알달린 사내를 출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간 서인들의 권력에 염증을 느끼며 이자쉭들을 어떻게 손봐줘야하나 하고 있던 찰나였고 숙종은 옳커니 했다. 
대권주자를 생산한 희빈을 중전으로 들이고 
그 아들을 세자에 책봉하여 서인들의 힘을 싸그리 잘라버려야겠다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정치 권력의 판도를 다시 뒤집어보기로 작심한 숙종은 정실부인을 내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털기로 작정하면 먼지 없는 자가 어디있겠는가. 
중전 민씨는 그렇게 티끌이 쌓여 태산이 되었고 결국 폐서인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바로 그 시점과 사건을 국사교과서는 기사환국이라고 칭한다.

 그 기사 환국의 불씨를 당긴 것이 바로 이 상소였던 것이다. 
죄인을 잡아들일 때는 흔히 야밤에 이루어진다. 
사극을 봐도 야밤에 군졸들이 죄인의 집안에 들이닥친다. 
요즘도 그 습성이 남아있는 것인지 검찰들은 흔히 깊은 야밤에 쳐들어가 구인(拘引)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날도 깊은 야밤이었던 것이다.

 1654년 태생인 반남 박, 태보는 모든 것이 다 좋았으나 시대를 잘못, 
아니 주군을 잘못 만났다고 할수 있는 인물이다. 
아버지는 소론의 영수이고 뭇 선비들의 존경을 받는 세당이었다. 
세당은 학식이 남달랐으며 절의가 있었고 무엇보다 그 품이 넓었다. 
태보는 그런 아버지 아래에서 그 아버지 못지 않은 절의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태보가 35세가 되던 어느 날, 멀쩡하던 그가 하룻 밤 사이에 운명을 달리하니, 
온 세상이 함께 울었다.
태보의 주군은 숙종, 그 이름이 등골을 서늘하게 하며, 
냉정하고도 혹독하여 신하들도 벌벌떨게 하던 바로 그 임금이었다.
숙종은 환국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정권을 통제했다. 
그야말로 신하들을 생선 굽듯이 앞뒤로 맘대로 잘도 뒤집었던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인 선대 현종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며 매가리없고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었던 점을 잊지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송시열은 임금을 생선굽듯 다루었던 것이다. 후에 숙종이 끝내 송시열을 죽인 것을 보면 벼르고 별렀던 일인지도 모른다.) 

 숙종은 일이 이지경이 되는 것을 좌시할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임금이 되기만 해봐라 니들은 다 죽었어!' 뭐 이런 강인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태보가 상소를 올린 시기도 숙종이 또다시 정권을 바꾸려고 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으니, 
또 누군가를 희생시켜야하는 바로 그 시점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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