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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평점 :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공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책을 저술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동양의 역사학은 한문에 통달해야하고 더구나 사상가에 대한 저술활동은 상당한 깊이의 한학적 소양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에게는 통하는 분야기기도 하다. 공자를 언급하자면 중국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논어, 대학, 역서(易書)는 물론 시경에까지 다다르는 사회문화와 문학적 필수 요소, 그리고 각각의 경서들에 대한 집주들에도 매우 밝아야 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노력은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 싶어 우선은 긍정적이다. 또한 저자의 공자에 대한 접근에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공자관련 참고자료들을 이용한 저자의 의도와 목적은 상당부문 잘 해냈다고 평가하고 싶은 책이다.
그렇다고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저자가 가능한 한 공자에 대해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심원한 부분을 미처 다루지 않아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는 한계점이라 는 발견도 가능한 출간물이다. 어쩌면 강신주의 저술이 보여주는 치밀한 연구와 사유들을 이 책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각 저자의 의도가 서로 다른 저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게감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과연 철학자들이 가지는 안목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의 사상가에 대한 첫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지 싶다.
때 마침, 이 책의 읽기를 마친 지금은 개인적으로 약간은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던 차였다. 최근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에 내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내 자신이 이토록 옹졸한 생각들을 자주하게 되었는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스스로를 넓게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하도록 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상에 있어왔다. 살다보면 누구나 주변의 인물들에게서 기쁨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을 얻기도 하며 가끔은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조이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정도가 심화되면 분노를 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십 수 년을 함께 해온 주변인을 내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러나 그 주변인의 지속적인 행위들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지난 날의 내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내 스스로가 무너지는 모습을 어떻게 내 보일 수 있을까...이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각별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던가... 이런 생각이 들자 이것 또한 커다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나는 결국 심적으로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옹졸한 생각들을 멈추기로 했다. 인간은 애초에 완벽하기를 바랄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동양 고전에는 심지어 공자님마저도 제자를 돌려보내 놓고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기록되어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그토록 외치던 진정한 보수주의의 선봉인 공자님 마저도 부인과의 이혼이라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고 간 인물임에랴... 공자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준 ‘자로’라는 제자를 두었던 공자는 자신의 허물들을 제자 자로로부터 지적받고 있는 장면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경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자로도 공자가 유랑하던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 인물 하나였다.
이렇듯 조선의 유림들에게 무결점의 인간으로 추앙을 받던 공자로 사실은 불완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매한 공자의 사상은 25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현대에까지 살아 있지 않던가... 공자는 최근의 형편없는 나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주면서 동시에 깊은 사유를 안내해준다. 하여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과거의 내 모습을 되찾기로 굳은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그 지인에게서 나는 초월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괴로움이 사실은 적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백하고 싶다. 그러나 그로인해 내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게 각별한 사람은 그 얼마나 안타까워 할 것인가...하여 지금의 나는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 내가 보여줄 예의(禮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만나며 지내는 가까운 사람에게 흔히 깜박 잊고 지내는 것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허물이 없는 사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하는 예의(禮儀)의 상실이다. 가까운 사이라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태도이건만 그 반대로 쉽게 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해주겠지’ 라는 생각이 때로는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낳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덩치 큰 스노볼이 되어 굴러간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라고 해석한다. 이 때의 락(樂)은 각자 자신의 대인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 을 뜻하는 樂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 공자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비가시적 의미를 첨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멀리에서 뜻이 맞는 친구가 찾아와도 그토록 즐거운데, 하물며 가까이에 있는 친구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잘 대하라는 뜻을 부연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예의에 벗어나며 간혹 홀대할 수도 있는 부분을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각별한 사람에게 내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상대방을 유쾌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나 스스로의 작은 자긍심에도 상처를 내는 일이다. 결국 어느 모로 보나 그 폐해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나를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그 지인의 언행에 대해 새로운 자세로 임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곧 나 스스로의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기도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지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예의라는 것은 비단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이를 지켜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고 걱정하게 할 수가 있다. 이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 흔들린 자신을 가다듬고, 바로 하는 일 또한 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인(知人)이라는 용어가 있다. 매우 광의의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범주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관계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知人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는 매우 필요한 관계의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관계의 의미가 비록 찬차 만별이라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예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상대방의 지인인 내가 그 상대방과 충분히 어울 릴 수 있는 예의를 갖춘 사람임을 보여주는 일이기도하다.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하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는 그 각별한 나의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렇게 오늘은 내 자신을 돌아본 하루였다. 그 각별한 나의 지인은 ‘오늘의 나’ 보다 ‘내일의 나’가 훨씬 더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소중하고 각별한 나의 지인을 지켜가는 일은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로부터 출발 할 수 있음을 깨달은 뜻깊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