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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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리는 그동안 여러 권의 대중과학서를 냈는데, <Helgoland>가 원제인 이 책에서는 하이젠베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자신이 생각하는 양자역학의 의미와 특히 '관계론적' 해석에 대해 논의한다. 그가 주장하는 관계론적 해석에 따르면 세상은 상호작용을 할 때 그 속성이 결정된다. 하지만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그 속성이 전혀 결정되지 않으며, 이는 극단적 반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운 주장임에는 틀림없지만, 곱씹고 생각해봐야 한다. 


책은 '-습니다'체로 번역이 됐는데, 비교적 잘 읽힌다. 양자역학과 로벨리의 생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책 속 멋진 문구를 하나 옮겨 놓는다.


과학은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라, 진리의 담지자 같은 것은 없다는 자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164페이지)


영역본은 위의 문장을 다음처럼 적고 있다.


Science is not a Depository of Truth, it is based on the awareness that there are no Depositories of Truth. (p. 137)


'담지자'라는 말은 depository를 좀 더 의인화했다. depository는 원래 '저장고'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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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마흐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과학철학자이다. 물리학자로도 충격파 연구에 기여하여 물체의 속력을 음속에 대비한 마하 수(Mach number)라는 것이 쓰인다[1]. 그는 특히 과학철학자로 큰 영향을 남겼는데, 물리학이란 경험만을 기술해야 하며 그 이면의 실재에 대한 가정을 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원자는 당시 이미 화학자들이 활용하여 화학반응을 설명하는 매우 유용한 개념이었다. 같은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은 원자의 운동으로 열역학의 법칙들을 설명했는데, 마흐는 볼츠만의 방법론에 대해 볼츠만과 큰 논쟁을 벌였다. 압력, 온도, 부피 등의 거시지표를 이용한 열역학 법칙은 그 자체로 충분하며 여기에 원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이 법칙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마흐의 입장이었다. 경험으로 관찰가능하지 않은 개념—원자—를 물리학에 도입하는 것은 형이상학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1900년대 초까지 이어져 볼츠만은 결국 우울증으로 인해 1906년에 자살을 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경험비판론(empirio-criticism)’은 철학과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철학적으로는 논리실증주의와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영향을 끼쳤고, 물리학에서는 20세기 초의 젊은 물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상대성이론과 양자이론의 탄생에 기여했다. 로벨리는 마흐가 물리학에 끼친 과학철학적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마흐가 논쟁의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은 18세기 기계론이었습니다. 즉, 모든 현상은 공간 속을 이동하는 물질 입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생각이죠. 마흐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물질’이라는 개념이 정당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가정이라는 사실이 밝여졌다고 주장합니다. 기계론적 물질관은 한동안 유효한 모델이었지만, 그것이 형이상학적 선입견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거기서 벗어나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흐는 과학모든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은 오로지 ‘관찰 가능한 것’에만 근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

  마흐는 감각 너머에 있는 가상의 실재를 추론하거나 추측하는 것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감각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려는 시도야말로 지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흐가 보기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세계는 감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각의 ‘배후’에 있는 것에 관한 그 어떤 가정도 모두 ‘형이상학’으로 의심받습니다. (148~149 페이지)


로벨리는 마흐와 마흐의 뒤를 이어 경험비판론을 제기하는 러시아의 보그다노프,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레닌의 얘기까지 풀어놓으며 마흐의 철학에 대해 논의한다. 위의 인용에 나온 대로, “모든 현상은 공간 속을 이동하는 물질 입자에 의해 발생한다”는 “18세기 기계론”의 타파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흐는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의 <소년 퇴를레스의 혼란>과 <특성 없는 남자>를 로벨리는 언급한다. 무질은 마흐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읽어보고 싶은 책 리스트에 무질을 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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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 초음속 비행기의 속력을 얘기할 때 마하 1.5와 같이 쓰인다. 비행기의 속력이 음속(약 340 m/s)의 1.5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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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리는 양자역학 코펜하겐 해석의 반실재론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관찰자가 관찰할 때 양자 계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파동함수의 붕괴를 통해 가능한 여러 상태의 하나가 실현된다. 이 책에서 로벨리는 양자 계가 고립 상태를 벗어나 외부 계와 상호작용을 할 때 파동함수가 붕괴된다고 말한다. 즉, 파동함수의 붕괴에 필요한 것은 특별한 ‘관찰자’가 아니라 단 하나의 미시 입자여도 된다. 이런 식으로 로벨리는 관찰자라는 특수한 존재를 제거하여 물리학의 ‘객관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관찰자라는 ‘인간’을 전제하지 않는 로벨리의 관계론적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보다 좀 더 객관성을 띠는 것처럼 보이며, 실재의 ‘본성’에 접근하는 느낌을 준다. 


이 해석의 문제는 이렇다. 상호작용(‘관계’)이 파동함수를 붕괴시키므로 A라는 양자 계가 B라는 입자와 상호작용을 하면 A의 파동함수는 붕괴한다. 하지만 아직 상호작용을 하지 않은 C라는 입자에게 A와 B가 결합된 양자 계의 파동함수는 붕괴하지 않았다. 책에 있는 예를 들어보자(내가 살짝 변형한 예이다). 로벨리 버전의 슈뢰딩거 고양이는 양자 계가 야기한 독극물 병의 깨짐/안 깨짐에 따라 죽어있거나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수면제 병의 깨짐/안 깨짐에 따라 잠들어있거나 깨어 있다. 자, 이제 내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관찰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잠들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해보자(수면제 + 고양이 양자 계의 파동함수 붕괴가 일어났다). 하지만 아직 고양이를 관찰하지 않은 내 친구에게는 수면제 + 고양이 + 나로 이루어진 양자 계의 파동함수 붕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양자 계는 ‘수면제 병 깨짐/고양이 잠듦/내가 관찰함’과 ‘수면제 병 안 깨짐/고양이 깨어 있음/내가 관찰함’, 이 두 양자 상태가 중첩된 상태이다. 나에게는 파동함수가 붕괴하여 잠든 고양이 또는 깨어 있는 고양이 둘 중의 하나가 실현된 상황이지만, 내 친구에게는 아직 둘 다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친구에게 나는 두 명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로벨리가 얘기하는 관계론적 양자역학 해석은 극단적 반실재론이다. 로벨리의 설명을 옮겨본다. 


대상 A의 속성이 대상 B에 대해서 실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꼭 대상 C에 대해서도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속성이 한 돌에 대해서는 실재할 수 있지만 다른 돌에 대해서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103 페이지)


차라리 관찰자를 상정한 후 물리학은 자연과 관찰자의 상호작용을 기술한다는 코펜하겐 해석이 훨씬 더 성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로벨리는 관찰자를 제거함으로써 좀 더 객관적인 양자역학을 만들고자 의도했지만 내겐 이러한 자연이 이상해 보인다. 사실 예전에는 로벨리의 해석이 그럴 듯하다고 여겼었는데, 다니엘손의 <세계 그 자체>를 읽은 후인 지금은, 물리학이 실재 자체를 다룬다는 착각에 로벨리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렇다. 모형을 다루면서 그 모형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모형은 실재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모형이 실재는 아니다. 한물 간 것처럼 생각됐던 코펜하겐 해석이 심오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다음은 책에 인용된 보어의 글이다. 


  양자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떤지 기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다룰 뿐이다. (55 페이지) 


스몰린은 로벨리와는 반대로, 완전히 실재론적인 해석을 밀고 나갔다. 아직 물리학자들 간에 합의는 없고, 나도 더 생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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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3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벨리의 양자역학 이야기 <Helgoland>를 번역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출간됐다. 세어보면 국내에 번역된 그의 여섯 번째 책이니, 나름 그의 생각이 잘 알려졌다고 볼 수 있겠다. 각각의 책은 비교적 짧지만,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은 일반인들이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그의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 책은 그가 생각하는 양자역학 해석과 세상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양자역학은 세상의 본질이 물질과 실체가 아니라 '관계'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그는 믿는다. 불교에서 비슷한 관점을 표했던 인도의 나가르주나(龍樹, 2~3세기 인물)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을 옮겨 놓는다. 


  나가르주나 사상의 매력은 현대 물리학의 문제를 넘어섭니다... 그것은 고전적 철학이든 현대의 철학이든 최고의 서양 철학과 공명합니다. 흄의 급진적 회의주의와도, 잘못 제기된 질문의 가면을 벗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상과도 공명합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많은 철학들이 잘못된 출발점을 가정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설득력이 없게 되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실재와 그것의 복잡성과 이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궁극적인 토대를 찾겠다는 개념적 함정에 우리가 빠지지 않도록 막아줍니다.

  나가르주나의 주장은 형이상학적으로 과도하지 않으며, 냉철합니다. 그는 모든 것의 궁극적 토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그저 말이 되지 않는 질문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탐구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게 되죠. 나가르주나는 세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실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회의론자도 아닙니다. 현상의 세계는 우리가 탐구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일반적인 특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의존성과 우연성의 세계이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부터 도출해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181~18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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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최선을 다하다가, 언젠가 닥쳐올 피할 수 없는 일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이 영웅이다. 이런 역사의 한 장면이 어제 바둑에서 펼쳐졌다. 


한국은 제25회 농심신라면배에서 앞에 나선 4명이 1승도 거두지 못했고, 신진서 9단마저 진다면 전패로 탈락할 위기였다. 부담감이 엄청났을 텐데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두었다. 


만약 패했다고 해서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었을까.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 하지만 그는 승리했고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신진서 9단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낸다. 


관련 기사: https://cyberoro.com/news/news_view.oro?num=53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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