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학술 이론이 갖춰야 할 속성으로 흔히 단순성simplicity과 응용성robustness, 그리고 직관적 아름다움intuitive beauty을 든다. 이론 자체가 너무 복잡하면 우선 활용도가 떨어지고 의미 전달에도 어려움이 많다. 수식으로 표현되는 수학적 이론들이 지니기 쉬운 결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20쪽
지금은 생명 과학이 속된 표현으로 '잘 나가는' 분야로서 각광을 받고 있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기 전까지 과학의 꽃은 의심의 여지없이 물리학이었다. 수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이론과 실험 모두에서 이른바 '정확한 과학exact science', 혹은 '경성 과학hard science'의 표상으로 군림했던 물리학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그런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숨기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말랑말랑한 과학인 생물학이 물리학 사자들의 가장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잔뜩 주늑이 든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한때 '물리학 선망physics-envy'이라는 표현이 공공연하게 쓰이기도 했다.-25쪽
물리학자들이 생물학자들에게 던지던 힐난은 유치한 것으로부터 심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확인되지 않은 IQ 수치를 들먹이며 생물학자로 그들에 대적할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물리학자들의 유치한 집안 자랑에 생물학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보다 심각한 도전은 생물학에 진정 물리학처럼 자연 현상의 고유한 속성을 일반화하는 원리principle가 있기나 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온갖 수준의 원리들로 중무장한 물리학과 달리 생물학은 태생적으로 원리를 앞세워 사물의 특성이나 현상을 가지런히 정리하기보다는 다양한 관찰 결과들을 풍성하게 쌓는 걸 더 좋아한다. 생물의 세계는 서둘러 원리로 정리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하다.-25쪽
굳이 생물학에도 원리가 있다고 밝히려는 것은 아니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원리라고 일컫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기에 설명해 보고자 한다... 다윈은 진화가 일어나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 자연계의 생물개체들 간에 변이variation가 존재한다. 둘째, ... 어떤 변이는 유전heredity한다. 셋째, ... 먹이 등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competition할 수밖에 없다. 넷째,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형질을 지닌 개체들이 보다 많이 살아남아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 -25쪽
해밀턴은 우리에게 유전자의 눈높이 또는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렌즈를 제공했다... 나는 벌써 25년 이상 대학 강단에서 유전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마음을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 한복판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는 걸 느끼게 된다. 이 세상 모든 종교가 우리더러 마음을 비우라지만 그처럼 어려운 일이 어디 또 있으랴. 유전자를 받아들이면 저절로 비워진다. -213쪽
책 한 권이 하루아침에 인생관과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수 있을까? 내게는 '이기적 유전자'가 그런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가 해밀턴의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 준 책이다. 도킨스는 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개체는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고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바로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라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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