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가능성 없는 무모한 시도였지만, 도널드는 그러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중략).
비행기가 착륙하자 그는 중서부의 여름밤 속으로 걸어 나와 외딴 푸에블로 공항으로 향했다. (중략).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먼 홈스 판사 힐사이드 Hillside 3194번. - P27

가는 길에 도널드는 아까 전화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공항에 있다‘는 말만으로도, 자신이 여전히 상류 중산층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낸시가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은, 혹시 그녀가 친구도 없고 그저 나이만 들어버린 매력 없는여자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 P29

"기퍼드 부인?"
(중략).
"도널드, 정말 너구나. 우리 둘 다 많이 변했네. 정말 반가워!"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며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랜 세월‘이라는 말도 오갔다. - P30

"하이볼 마실래?" 그녀가 물었다. "안돼? 날 술꾼이라고 생각하진 말아줘. 그냥 좀 울적한 밤이라서 그래. 남편이 오늘 올 줄 알았는데, 이틀 더 늦어진다고 전보가 왔거든. 도널드,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주 매력적이고, 너랑 분위기도 비슷해. 생김새도 닮았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뉴욕에 남편이 관심 있어 하는 여자가 있는 것 같아. 잘 모르겠어." - P31

도널드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썰매 타던 날이었다. 그는 짚이 깔린 썰매 구석에 앉아, 차가운 하얀 별을 올려다보며 웃는 그녀의 차가운 뺨에 입을 맞췄다. - P33

"네가?" 그가 외쳤다. "약국에서 나찼던 거 기억 안나? 혀까지 내밀면서 약 올렸잖아."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기억 안나. 내 기억엔 네가 나를 찼던 것 같은데." 그녀의 손이 위로라도 하듯 가볍게 그의 팔에 닿았다. "위층에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은 사진 앨범이 있어. 가져올게." - P34

도널드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말을 꺼냈다.
"우리가 다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까?" - P36

"네가 도널드 바워스잖아!" 그녀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아니야. 난・・・ 도널드 플랜트야."
"전화로 말했잖아." - P37

낸시는 방 건너편에서 말했다.
"이 얘긴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든 소문이 나는 법이니까." - P38

공항으로 가는 길, 도널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야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방금 겪은 일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 P39

도널드 역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의 몇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란 결국,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려가는 긴 여정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 경험도 그리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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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입을 연다.
"버크 사회복지 사무소에 연락해봤어요. 상담 프로그램이 있는데 아주 비싸지도 않고.....
(중략).
도대체 몇 명일까? 마저리가 자주 찾는 곳이 몇 곳이나 될까? 모르긴 해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시빅을 팔아버렸으니 치과의사인가? 카니 박사? 하얀 가운 걸치고 설쳐대는 그 얼간이? 콜라병 같은 안경을 쓰고, 병적으로 손을 씻어대는 그 친구? 아니면, 뉴 버라이어티 극장의 그 자식이름이 뭐였더라? 머리는 벗어지고, 단정치 못한・・・・・ 파운틴 맞아, 그 친구. 그럼 파운틴일까? 아내가 다니는 곳에서 일하는 누군가일 것이다. - P130

순간 나는 돈이 없는 건 아내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실업 보험 수당이 끊어진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상태다. - P131

"알았다고."
아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본다.
"알았다고요?"
"같이 상담을 받으러 갈게."
나는 말한다. 막상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든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카운슬러가 누구이든 나는 나에 대한 많은 부분을 숨겨야 한다.  - P132

16

세 시간 후 나는 내 사무실에 들어와 있다. 이번에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이를 표적으로 삼기로 한다. (중략).
마저리는 거실에서 소설을 읽고 있다. 나는 말한다.
"드라이브 좀 하다 올게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이야."
아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사이는 굉장히 어색해진 상태다. - P134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았다고? 이런 개자식. 내가 영원히 쉰 살을 넘지못하게 해주지. - P136

뉴 헤이븐 가로 내려와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내 차 옆에 세워진 주경찰관의 순찰차가 눈에 들어온다. 젊은 주 경찰관이 번뜩이는 눈으로 보야저 앞부분의 흠집을 살펴보고 있다. 내가 다가가자 그가 나를 돌아본다.
"이게 선생님 차 맞습니까?"
(중략).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난주에 뉴욕 킹스턴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 P140

그가 내 면허증과 등록증을 돌려주며 말한다.
돌아서는 그의 등에 대고 나는 말한다.
"이봐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습니까? 벌써 두 번째라고요."
그가 잠시 나를 쳐다본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입을 여는 타입인듯하다. 내 집요함은 결국 그를 무너뜨리고 만다.
"며칠 전 뺑소니 사건이 있었습니다. 뉴욕 북부에서요. 용의 차량이 선생님의 밴과 비슷합니다. 저희는 용의 차량의 왼쪽 앞부분이 손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P141

"뉴욕 북부에서요? 난 빙엄턴에서 사고가 났었는데요. 뭐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는 말한다. - P142

17

매번 일을 벌이고 나서 보면 목요일이다. 일부러 그렇게 계획한 건 아니다. (중략). 처음 세 명의 표적을 각각 목요일에처치했고, 다이어스 에디로 향하고 있는 오늘도 목요일이다.
과연 오늘 계획대로 케인 에이쉐를 제거할 수 있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더 이상 문제될 건 없다. 차 수리도 마쳤다. - P143

"250달러 공제 조항이 있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보험증을 들여다보았다. 내게 보험증을 돌려주며 그가 말했다.
(중략).
"제리, 내 상황 잘 알죠? 250달러는 내게 엄청난 액수예요." - P144

"요즘 다들 어려울 때 아닙니까, 데보레 씨. 우리 집사람도 얼마 전에병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가 동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중략).
"오하이오의 큰 의료회사가 병원을 인수했거든요. 인수 직후 대대적인 인원 감축을 시작하더군요. 적자가 어쩌고 하면서."
(중략). 지금껏 병원을 법인처럼 마음껏 사고팔 수 있는 상업기관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놀라운 일이다. 병원은 성당이나 소방서와는 또 다른 모양이다. (후략). - P144

"엑스선 기술자는 아홉 명에서 여섯 명으로 줄었습니다. 여섯 명이 아홉 명의 일을 하게 된 거죠." - P145

"지금 이 순간에도 정비 센터의 서비스 관리자를 셋에서 둘로 줄이려는 임원들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잘릴 걱정이 없잖아요, 제리."
(중략).
"누구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데보레 씨." - P145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하는 얘긴데... 견적을 두 개 내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챙길 것, 그리고 보험회사에 제출할 것"
(중략).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리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보았다. 제리에게 잘리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나머지 서비스 관리자들 중 하나를 죽이면 된다고 그의 아내도 잘리기 전에 동료 엑스선 기술자 세 명을 제거해버렸다면 아마 지금쯤 아무 걱정 없이 병원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 P146

카운슬러와의 첫 상담은 화요일로 잡혔다. 마저리는 주정부가 아닌 성처당을 통해 상담을 준비해왔다. 11년 전 서스튼 신부와 상담을 가졌을 때럼. - P148

그가 책상에 놓인 문서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갔다. 그리고 펜을 집어들며 말했다.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넘어가죠."
그 기본적인 것이 거의 한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 P150

우리는 매주 화요일, 같은 시간에 상담을 갖기로 했다. 그는 보험회사가 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게 될 거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20퍼센트의 공제 금액만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 P151

마저리와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나는 군말 없이 따를 각오가 돼 있다. 아내의 남자 친구를 죽이고, 새 일자리를 찾게 되면 모든 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 P152

18

(전략). 하지만 그들은 내 기대를 저버린다. 그들은 아예 밖으로 무선전화기를가지고 나왔다. (중략).
하지만 그들은 통화를 할 때도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집으로 들여보내야 한다. - P154

갓길에 차를 세워놓은 나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다. 하지만 우편함으로 다가오는 그들은 내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만큼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 P155

마저리와의 비참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도 있다. 더 이상 내 목적지를 밝히지 않아도 된다는 점. 우리 사이에는 대화가 많이 줄었다. 오늘 아침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보야저에 몸을 싣고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목적지를 꾸며낼 필요도, 면접을 보러 간다거나 일자리 검색을위해 도서관에 간다고 둘러댈 필요도 없다. 나름 큰 부담을 덜게 된 셈이다. 덜어내야 할 부담은 아직 많이 남긴 했지만 - P156

19

오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마저리와 나는 서로에게 많이 정중해졌다. - P158

생각이 많은 게 문제다. 아카디아의 일자리, 신원이 확인되자마자 죽여버릴 아내의 남자 친구, 나를 이런 괴로운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사정들, 그리고 밀레니엄. - P158

밀레니엄은 생산적인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버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식을 부추기고 있다.
단지 2000년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실직한 이유도 인류가 미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欢극심한 공포에 눈을 뜨게 된다. - P160

20

오늘 하루는 늦게 시작된다. 힘겹게 잠이 든 만큼 깨는 것도 힘이 든다. 9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집을 나선다. - P161

그래서 에이쉐 부부의 애정 행각은 더 이상 지켜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서로로부터 떨어져주지 않는다면…………… 그의 아내까지 죽여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 (중략).
그래서 오늘 아침, 다이어스 에디로 차를 몰며 결심을 굳혔다. 남자 친구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쉽고 유쾌한 결정은 아니었다.  - P163

요즘 사람들은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연쇄살인범이 우르르 몰려나오는 수많은 영화와 소설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무슨 부족이나엘크스 같은 사교 클럽 회원이라도 되는 듯이. - P166

그렇게 10분쯤 기다리자 그가 나타난다. 그는 작은 상자와 흰색 비닐봉지들로 가득 찬 쇼핑 카트를 밀고 다가오고 있다. (중략).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작은 상자와 봉지들을 속속 옮겨 싣는 그의 머리는트렁크 안 깊숙이 박혀 있다.
나는 그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간다.
"혹시 케인 에이쉐 씨 아닌가요?"
그가 돌아보며 호기심에 찬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요?"
"난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 P167

총알은 그의 눈에 박히지 않는다. 총알이 파고든 그의 오른쪽 볼이 너덜너덜해져버린다. 레인코트가 내 팔을 살짝 끌어 내린다. (중략).
나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보야저로 돌아온다. 차에 오르자마자 시동을 걸고 후진해 차를 뺀다. 무릎에 얹어놓은 루거는 레인코트 자락으로 덮어놓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한산하다. - P168

21

(전략).
네 명이 제거됐으니 세 명이 남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무거웠던 마음이모처럼 가뿐해졌다. 이 길고 고된 레이스도 이제 반만 더 가면 끝이 난다.
마저리와 나 사이의 벽도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것 같다. 아주 뚜렷하지는 않지만 나는 집안 공기에서부터 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하찮은 것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화가 늘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 P169

장기간의 실직 상태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해고된 직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중산층에 가해지는 타격이 특히 크다는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의 입장에서는 나는 아직도 중산층에 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중이다) 우리가 최대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 P170

나는 이력서들을 유심히 훑어본다. 남은 두 표적, 둘 중 누구부터 제거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게 결정되면 내일 당장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표적의 집을 살펴보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작전을 짜야 한다. - P172

22

자고 있을 때 전화가 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대부분 술에 취해 번호를 잘못 돌린 주정뱅이들이다. (중략). 아직도 잠에 잔뜩 취한 상태다. 마저리가 웅얼거리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중략). 1시 46분. (중략).
서서히 마저리의 통화 내용에 집중해본다. 애써 소리를 죽이려는 걸 보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인 듯하다.
"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고마워요"
아내가 말한다. - P173

내가 해고된 후로는 마저리가 한밤중의 전화벨을 처리해왔다. 더 이상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건 내가 아닌 아내다. - P174

마저리가 전화를 끊고 나를 돌아본다. 아내의 표정이 어둡다.
"빌리 문제예요."
아내가 말한다.
(중략).
"체포됐대요, 빌리랑 또 다른 애가."
아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한다.
"체포? 체포?"
나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하마터면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 P174

"가게를 털러 들어갔대요. 경찰에 쫓겨 도망치다가 잡혔다네요 지금 래스킬의 주 경찰국 유치장에 갇혀 있대요." - P175

이런 부담스러운 공간에서 형사에게 집중하는 건 쉽지 않다. 그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빨리 빌리를 보고 싶을 뿐이다.
마저리는 나보다 훨씬 노련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 아내는 쉴새 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답을 받아 적는다. 아내는 형사만큼이나 조용하고 차분하고, 교감적이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 P176

경찰은 모든 걸, 거의 모든 걸 확보한 상태다. 빌리의 친구가 한 자백. 강도질을 모의하고, 문에 손을 써두었다는 증거. 그들은 충동적으로 범행을 벌였다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게다가 경찰은 그들이 장물이 가득 담긴 가방을 매고 나오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한다. 도주 시도도 분명히 있었고.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 확보하지 못한 한 가지는 지난 세 차례의 강도질 역시 두 아이가 벌인 짓이라는 증거다. - P177

나는 말한다. 내 멍한 눈이 형사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게 빌리의 첫 범행이라면 판사는 집행유예를 내릴 겁니다. 이게 네 번째 범행이라면 그 앨 감옥으로 보낼 거고요. 하지만 우리 아들은 감옥에가지 않을 겁니다. 이게 첫 번째니까요."
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온다.
"데보레 씨,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P178

(전략). 형사를 쳐다보는 아내의 시선에서는 더 이상 공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아내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서류를 내놓는다. 피해 갈 수 없는 서류. (중략).
"빌리를 집에 데려가도 되나요?"
"죄송하지만 오늘 밤은 곤란합니다."
그가 말한다. 동정 어린 어조이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다. - P179

예상 가능한 질문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뜨끔한 질문도 하나 있다.
"데보레 씨, 지금 무슨 일을 하십니까?"
"실직 상태입니다."
(중략)
"실직하신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데보레 씨?"
(중략).
"리드에 있는 할시온 밀스에서 생산 라인 감독으로 일했습니다."
"아, 그 부도난 회사 말씀이군요" - P180

"20년간 일했습니다."
"인원 축소 바람에 휩쓸리신거군요."
(중략).
그가 수줍은 듯 피식 웃는다.
"범죄는 성장 산업이거든요."
그가 말한다.
"왜 그런지 궁금하군요."
나는 말한다. - P181

형사가 말한다.
"10분 드리겠습니다. 오전 중에 풀려날 테니 못다 하신 말씀은 댁에 가서 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마저리가 말한다. - P182

나는 말한다.
"빌리, 네가 이런 일을 벌인 건 태어나서 이번이 처음이야. 그 가게에 불법 침입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나는 눈썹을 추켜세우고 손가락을 뻗어 아들을 가리킨다  대꾸하라는신호다.
"네."
아이가 내 손가락을 쳐다보며 말한다. - P184

"날이 밝으면 변호사부터 알아봐야죠."
"날이 밝기 전에 할 일이 있어.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 날이 밝는 대로 변호사부터 알아봐야지. 우리가 집을 살 때 고용했던 변호사가 누구지?
그 친구 이름 기억해?"
나는 말한다.
"앰곳. 내가 연락해볼게요." - P185

아내는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곧장 빌리의 방으로 들어간다. 깨끗이 정돈된 방을 보니 아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쇼핑을 못했는지 짐작이 된다. (중략).
"이걸 다 없애야 해. 지금 당장, 오전 중에 그들이 수색영장을 들고 찾아올지도 몰라."
나는 아내를 위로하려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 P186

단지를 둘러보면서 커다란 초록색 쓰레기 컨테이너들을 차례로 살핀다. 슈퍼마켓의 쓰레기 컨테이너가 가장 마음에 든다. (중략). 상자, 봉지, 썩은 양상추들. 토요일 밤까지 치워가지 않아 쓰레기로 넘쳐나고 있다.
나는 봉지들을 차례로 컨테이너에 던져 넣는다. 봉지들은 다른 쓰레기들에 파묻혀 사라진다. 더 이상의 소프트웨어 쇼는 없을 것이다. - P187

23


집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경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후 3시가 다 된 시간이다. 오전 내내 수화기를 붙들고 있었지만 변호사는 찾지 못했다. 일요일 오전이라 더욱 힘들었다. 10시까지 기다려도 소득이 없자 나는 주 경찰국에 연락해 법원의 위치를 물었다. - P188

나는 그녀에게 내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돼주지 못했다. 그녀가 갑자기 나, 또는 피고에게 관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있는지 물었다.
(중략).
"지난 2년을 실직 상태로 보냈습니다. 실업 보험 수당을 다 써버렸어요. 수입도 없고요." - P188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빌리의 죄상 인부 절차는 오늘 아침에 진행됐어야 한다. 죄상 인부, 너무나도 생소한 단어다. 꼭 고문의 한 종류인 것처럼 들린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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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한동안 공상 과학 소설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중략).
하지만 스푸트니크가 우리 세대의 관심을 공상 과학물에서 떼어놓기 전 우리는 ‘자동화‘라고 불리는 무언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해왔었다. 머지않아 자동화가 지능이 필요 없는 일터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했다.  - P79

나는 아직도 일본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치과의 엑스선 촬영기계처럼 생긴 로봇이 분주히 움직이며 용접하는 뉴스 영상을 처음 봤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자동화였다.  - P80

그건 오래전 일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육체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영향에 무뎌져갔다. 요즘 공장 노동자들은 회사가 싼 노동력과 관대한 환경법을 찾아 아시아 등지로 이동할 때만 산발적으로 파업을 벌인다. - P80

하지만 컴퓨터가 도입된 후로는 중간관리직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물론 그 단계에 약간의 인력이 필요하긴 하다. 컴퓨터를 다루고, 특정 작업을 맡아 처리해줄 사람들. 하지만 수백, 수천 명의 관리자는 너무 많다.
나 같은 사람들. - P81

서랍에서 꺼낸 이력서 여섯 통의 주인들도 내 경쟁자다. 이 뚜렷한 변화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 중간 관리직을 맡고 있는모든 이가 내 경쟁자가 된 것이다. 이제 곧 굶주린 수백만 개의 얼굴들이 몰려들 것이다. 학력 좋은 중년의 중산층 사람들.
홍수가 나기 전에 내 자리를 확고히 지키는 수밖에 없다. - P82

13

뉴욕 고속도로의 통행료는 꽤 부담스럽다. - P85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이 없다. (중략). 다인스가 보란 듯이 베트남참전 경력을 이력서에 적어놓았다는 사실이 거슬린다. 그래서 어쩌라고? 25년이나 지나서 무슨 보상이라도 받아내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특별한 참작 사항이라도 돼? - P85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특별 방송을 본 적이 있다. 진행자는 ‘과도적 기술‘에 대해 설명했다. 철도 시설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과도적 기술은 쉽고 상식적인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쓰이던 성가신 기술이다. 미봉책 치고는 개발에 들인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엄청난 것으로 이를테면 철도 교량, 운하 등.
하지만 모든 것이 과도적 기술이다.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닫기 시작한다. - P87

이 동네 집들은 독립형 차고를 하나씩 갖추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집의 옆이나 뒤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 날씨 탓에 집과 차고를 이어주는 통로를 만들어 놓은 곳도 간간이 목격된다.
264번지의 차고는 통로 없는 독립형 차고다. - P89

말. 과도적 기술.
나는 264번지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지점에 차를 세워놓고 있다. 바로옆에는 매물로 나온 집이 우뚝 서 있다. 앞뜰 잔디에는 ‘매물‘ 표지판이 박혀 있고, 창문에는 커튼이 달려 있지 않다. 오늘은 집을 보러 온 연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의 누군가가 블라인드 뒤에 숨어 의심에 찬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 P91

내가 기름을 넣고, 공중전화를 썼던 주유소는 8번 국도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주유소의 대각선 맞은편에는 식당이 하나 서 있다. 
(중략). 그는 여전히 신중한 모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목적지는 있지만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중략).
. 나는 교차로의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춰 세운다. - P94

4시 50분. 그가 안으로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안에 여자 친구라도 있는 건가?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대낮에 식당에서 월하길래? 그는 신문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포츠 재킷 주머니에 문고판 소설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대청소 중인 아내를 위해 및시간 집을 비워주기로 했는지도 모르고 - P95

차문을 걸고 식당으로 들어가본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 P95

하지만 대체 왜? 아까 추측한 대로 여자 친구와 밀회를 즐기러 사라진걸까? 아니면 새 일자리를 구하기 전에 은행이라도 털려는 걸까? (물론 그건 나 역시 생각해본 적 있다.)혹시 날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전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보나마나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 P96

그가 카운터 뒤에 있는 스윙 도어를 열고 불쑥 튀어나온다. 초록색 앞치마를 두른 그는 피쉬 앤 칩스 접시를 들고 있다. 그가 내 왼쪽에 앉은 손님앞에 접시를 내려놓는다.
그는 여기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 P96

중간관리자 출신이 동네 식당에서 일을 하다니. 여기서 버는 돈으로는 세 블록 떨어진 집의 융자금도 제때 갚지 못할 것이다. - P97

그들과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면 안 돼. 이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세워뒀던 방침이었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다짐해온 내용이었다. - P97

하지만 이제 난 어찌 해야 하나? 그는 언제까지 여기서 일을 할까? 주차장에 세워놓은 보야저에서 여덟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닌가?
여섯 시간! 열두 시간? - P98

(전략).
나는 맞장구친다. 부디 이것으로 불편한 대화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그가 팔짱을 풀고 내 오른쪽을 가리킨다.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본다. 지금손에 루거가 쥐어져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볼일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8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2.5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도슨스 모텔이 있습니다. 거기서 묵어본 적은 없지만 나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 P99

드디어 궁금증을 풀 기회가 왔다. 나는 묻는다.
"여기서 풀타임으로 일하십니까?"
"거의 풀타임이죠.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합니다. 일주일에 네 번 나오고요 오후 4시부터 자정까지." - P100

그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젓는다.
"제 전문 분야와는 거리가 멀죠 전 페이퍼 업계에서 25년간 일했습니다."
그가 말한다.
나는 모르는 척하며 묻는다.
"신문 말씀입니까?"
"아뇨. 제지업 말입니다." - P101

나는 말한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이 주문하신 게 다 된 모양입니다."
벨 소리가 난 주방을 돌아보며 그가 말한다. 그리고 다시 스윙 도어 안으로 사라진다.  - P101

(전략).
"메모지, 주문서, 회계 문서, 뭐 그런 것들을 취급했죠. 중간관리직으로, 생산 라인을 감독했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킬킬 웃는다.
"그러니까 선생 쪽으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왔던 거죠."
"저희 쪽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흰 산업용 특수 용지만을 취급했거든요."
그가 씨익 웃으며 말하곤 이내 다시 고개를 젓는다. - P103

"요즘 벌어지는 일들 말입니다. 범죄나 다름없어요."
"대량 해고 말씀이죠?"
"인원 삭감, 직원 줄이기. 그들이 어떤 완곡어법을 쓰든 범죄는 범죄죠." - P103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보스들이 이러도록 내버려두는 사회가 문제죠. 아시아 어떤 나라의 미개한 부족들은 신생아들을 산허리로 데려가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들을 먹일 필요도, 돌봐줄 필요도 없어지니까요. 먼 옛날 에스키모들은 나이 든 부모를 빙산에 놓아두고 왔다죠? 그렇게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죽도록 말입니다. 더 이상 부양이 힘들어지면 그런 방법을 쓴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 이 사회는 가장 생산적인 사람들, 한창때의 사람들, 인생의절정에 다다른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폐기 처분시키고 있습니다. 이게 미친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 P104

비치 보이스의 <굿 바이브레이션스>가 흘러나온다. (중략). 꿈에서 깨보니 나는 도슨스모텔에 누워 있다. 맞춰놓은 대로 밤 11시 30분이 되자 라디오가 켜진것이다. (중략).
도슨스 모텔은 고풍스럽게 꾸며진 곳이다. (중략).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나이 든 남자는 간만의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내민 현금을 보자 그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난 신용카드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겠죠." 그가 말했다.
현금, 과도적 기술. - P106

모텔 문도 구식이다. 나갈 때마다 열쇠로 일일이 잠가야만 한다. 다행히 지붕이 돌출돼 있어 문을 걸어 잠그는 동안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  - P106

왼편의 주유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오른편의 식당은 아직 영업 중이다. 내 바로 앞 교차로를 건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스포츠 재킷에 모자. 빗속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터덕터덕 걸음을 옮기고 있는 남자. 에버릿 다인스다!
젠장! 빌어먹을! 이렇게 일찍 나올 줄이야! 일부러 시간을 정확히 맞춰왔건만! - P107

나는 헤드라이트를 끈다. 그렇게 차는 밤의 어둠 속에 파묻힌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기가 무섭게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조금씩 속도를 내본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차의 왼쪽 좌석에 앉은 채 오른쪽 창밖으로 총을 쏘는 것 말이다. - P108

나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보야저가 미끄러지며 앞으로 돌진한다. 밤의 어둠 속에서 그는 그저 검은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게 비에 젖어 반짝인다. - P108

브레이크를 더 세게 밟아 차를 세운다. 그런 다음, 헤드라이트를 켜고후진 기어를 넣는다. 후진등이 들어오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룸미러, 왼쪽 백미러, 그리고 오른쪽 백미러로 그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는아직 움직이고 있다.
오, 맙소사, 안 돼. 그냥 쓰러져 죽어버리라고. 이걸로 부족해? 그는 몸을 굴려 일어나려 하고 있다. - P109

이번에 확실하게 끝내야 해 나는 다시 기어를 주행에 넣고 천천히 전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리를 가는 채로 쿵, 왼쪽 앞 타이어 중 왼쪽 뒤 타이어 됐어나는 차를 멈춘다. 후진 기어를 넣자 다시 후진이 들어온다. 나는 세 개의 백미터로 그의 상태를 다시 확인한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 P110

모텔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흐느껴 운다. 모텔에 도착해서도 흐느낌은멈추지 않는다. 기운이 빠져 핸들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 지경이다.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제대로 밟을 힘도 없다. - P110

흐느낌은 멎어 있다. 하지만 극심한 피로는 여전하다. 침대 옆 라디오 시계는 12시 47분을 알리고 있다. 에버릿 다인스를 죽이러 모텔을 나선지 딱 한 시간 만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천 년도 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침대로 들어가 불을 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머릿속에서는 비와 어둠과 보야저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뒤덮인 네더 가의 풍경이 계속 아른거린다. - P111

미쳐가고 있는 걸까? 어떻게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허버트 에벌리, 에드워드 럭스와 불쌍한 그의 아내, 그리고 에버릿 다인스. 그는 나와 같은 처지였다. 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 P112

지금까지 총 네 명을 죽였다. - P113

내 마지막 이력서.
서명은 하지만 날짜는 적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일 내가 무슨 일을 꾸미게 될지 알 길이 없다. 저기 옷장 속 파이프막대에 걸린 레인코트에서 루거를 꺼내와 자살을 하거나 다시 리치계에트로 돌아가 자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 P114

14

모처럼 푹 잤다. 눈을 떠보니 개운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며칠 굶은 곰처럼 배가 고프다. 일부러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정말로 원 없이 잘 수 있었다. 라디오 시계는 9시 27분을 알리고 있다. 원래 7시 30분이면 가뿐히 일어나던 나였다. 오늘 이런 모습은 나답지 않다. - P115

나는 테이블에 앉아 어젯밤 적어놓은 고백의 내용을 다시 읽어본다. 오싹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는다. 어젯밤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긴장고 불안했고 겁에 질려 있었다.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이 고백의 글 덕분에 모처럼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 - P116

 운전을 하는 내내 차에 남은 살인의 흔적을 걱정한다. 우선 수리를 해야 할 것이다. 보험회사에 보고도 해야 할 거고. 물론 공제액을 넘을 가능성은 적지만. 마저리에게도 차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이다. - P116

경찰이 이 밴을 찾아 나설 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장 살인으로 단정 짓고 수사를 벌이지는 않겠지만 뺑소니 역시 과실치사로 꽤 중한 범죄다.
그들이 어떤 단서를 잡았을까? 보나마나 타이어 자국이 전부일 것이다. - P117

도로 왼편으로 재목 저장소가 보인다. 그 앞에는 차가 몇 대 세워져 있다. 차들은 전부 도로를 등지고 있다. 갑자기 소형 오픈 트럭 한 대가 뒤를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맹렬히 후진해 나오기 시작한다. (중략). 오히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 트럭과 충돌하게 만든다. 내차의 왼쪽 앞부분과 트럭의 왼쪽 측면이 스치면서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 P118

그중 하나가 트럭으로 달려가 운전자에게 시동을 끄라고 한다. 남자는 시키는 대로 한다. 시동이 꺼지자 요란한 음악이 뚝 멎는다. 또 한 명이 내게 말한다.
"경찰을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저 친구가 뒤도 안보고 튀어나왔다니까요."
나는 말한다. - P119

모두가 내 잘못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트럭 운전사조차도 음악을 크게 튼 채 뒤를 확인하지 않고 튀어나온 자신을 탓한다.
주 경찰은 선량한 피해자 대하듯 나를 다룬다. 젊은 트럭 운전사는 졸지에 나쁜 놈이 돼버린다.  - P119

15

마저리와 나는 아직도 일요일을 특별하게 여긴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남아 있지 않음에도. - P121

"버크! 버크!"
마저리와 나는 가운 차림으로 거실에 앉아 식은 커피를 홀짝이며 일요일판 『타임스』를 훑고 있는 중이다. (중략). 마저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왼쪽 소파에 앉아 있다.  - P122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눈 밑에는 흰색의 작은 얼룩이 나 있다. 광대뼈 바로 위에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말한다.
"일 때문에 그래, 여보, 지금 내 정신이......" - P124

그녀가 말한다.
"곧 그렇게 될 거야. 우린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 우린 충분히 강하다고"
"우린 강하지 않아요. 난 강하지 않아요. 이젠 지쳤어요. 더 이상 비참해지긴 싫다고요. 이런 절박함도 싫고 마치………… 마치 덫에 걸린 마멋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서식하는 설치류 동물로 오소리와 비슷하게 생겼음)이 된 기분이에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이미지다. 아내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왔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낌새도 채지 못했다. - P125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 나는 말한다.
"마저리, 우리 사정을 들어줄 제삼자는 필요 없어. 그냥 우리끼리 대화로 풀면 된다고, 그동안 우리 잘해왔잖아.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도......"
"당신이 날 버리고 떠나려 했을 때 말이죠?"
그녀가 말한다. - P126

"마저리, 일에 대한 문제라면 얼마든지 대화로 풀 수 있잖아."
"당신과는 대화가 안 돼요."
아내가 말한다. 아내의 시선이 전망창 쪽으로 돌아간다. 아내는 많이 진정된 상태다.
"그게 문제라고요. 당신과는 대화가 안 된다는 거 말이에요."
"내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지금부터 달라질게. 확 달라질 거라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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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 책은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콘란과 디자인 비평가 베일리가 쓴 일종의 백과사전식 디자인 역사서다. 디자인 분야의 실무자와 경영자. 이론가가 함께 책을 쓴 드문 경우인 만큼 책의 성격도 특별하다.
대부분의 사전류 또는 용어 해설집의 경우. 다른 글을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되는 참고서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앞부분의 디자인 사적인 고찰과 뒷부분의 사전식 설명이 상호 보완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독립적인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 P-1

좋은디자인에 대한 단상

테렌스 콘란 Terence Conran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나 흔하지만 여기에 명쾌한 답을 제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사실 답은 간단하다. 좋은 디자인이란 사물 그 자체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 P10

나는 좋은 디자인 또는 사려 깊은 디자인이란 98퍼센트의 상식과 2퍼센트의 신비한 요소, 즉 우리가 흔히 예술 또는 미학이라고 지칭하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 P10

혁신성은 좋은 디자인의 결정적 요소다.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디자이너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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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물리학의 객체 개념



물리학은 일반적으로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해우리 주변의 실재를 설명한다. (중략). 이번 장에서는 물리학의 객체 개념에 대한 우리의 표상을 더 엄밀하게 규정하고자 한다. - P181

1. 이상화

우리 주위의 실재는 완전무결하게 서술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중략). 그러나 앞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 물리학은 입자에 의한 합성(Zusammensetzung aus Teilchen)이라는 개념을 폐지했다.  - P181

엄밀히 말해, 물리학적으로 관찰된 것이 "실재"는 아니지만, 모든 물리학 이론은 이상화된 물리적 ‘객체(Objekt)‘를 다룬다. 게다가 그것은 두 가지 관계에서 이상화(Idealisierung) 하고 있다.

1. 실재 전체에서 개별 사물이나 객체를 따로 분리하는 것은 결코 실재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이상화이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물리학은 각각의 사물에서 "물리학적으로 적절한(physikalischrelevant) 소수의 속성들만을 관찰할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논할 것이다.
- P182

. 이것은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양자역학과 모순되는 전제이다. - P183

도대체 이때의 객체란 ‘누구에 대한(fürwen)‘ 객체란 말인가? - P183

물론 객체의 외부에는 항상, 예언된 측정값을 기록하고, 그 객체를 서술하는 관찰자가 존재해야 한다. 엄밀한 의미의 전체로서의 세계는 ‘그 누구에 대한‘ 객체도 아니다.  - P183

 객체 개념에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도식에 따라 구분되는 단계들로 나타난다. - P183

a) ‘자유 객체(freies Object)‘: 하나의 객체는 주변 세계로부터 따로 분리되며, 주변 세계의 특별한 속성들과 전혀 상관없이 관찰된다. (후략).

b) ‘외부 장에 있는 객체(Objecte im äußeren Feld)‘: 이 근사 단계(Naherungsschritt)에서는 객체에 대한 주변 세계의 영향이 관찰되며, 이러한 영향이 어떻게 객체의 상태에 의존하는가가 관찰된다. (후략).

c) 상호작용(Wechselwirkung): 객체(A)의 주변 세계에 대한 영향도 많은 경우에 중요시된다. (중략)., 그것을 앞서 말한 객체(A)와 연결해 새로운 객체(A&B)로 결합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서술을 "(부분)객체 A와 B의 상호작용"이라 부른다. - P184

2. 추상적 객체 개념

우리가 세계 속의 개별 사물들을 성공적으로 격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사물‘은 무궁무진한 속성을 소유한다. 반면 물리학 이론의 ‘객체‘들은 몹시도 빈약하다. - P185

우리는 그러한 객체들의 "본질"에 대해, 예를 들어 "질점 자체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 P186

질점은 많은 경우, 실제의 사물에 대한 근사적 서술로 적합하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가령 물체의 ‘회전 위치 (Lage)‘와 그것의 ‘회전 운동량‘을 추가로 제시함으로써, 더 정확히 서술해야 한다.  - P186

이론에 등장하는 객체는 항상 그것의 일시적 상태를 표시하기 위해 반드시 진술해야 하는, 우연적 속성(양)에 의해 정의된다. (중략). 그 기준은무엇일까? 우리는 그 대답을 ‘객체 개념의 정의‘로 파악하고자 한다. - P188

이와 같이 정의된 객체 개념은 19세기에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한 ‘장(Feld)‘의 개념도 포함하는 것이다. 가령 전자기장의 개념은 어떻게 얻게 된 것일까? - P189

역장(場)은 무엇보다 물체들 간의 힘을 통일하는 보조 구성체(Hilfskonstruktion)이다. 장은 "원인이 되는" 객체의 변화가, 예를 들어 운동이 다른 장소에서는 조금 뒤에야 알아챌 수 있게 되면서 독자적인 수명을 유지한다.²



2 유한한 전파 속도", 3장 1절 참고. - P189

양자역학적 객체를 관찰할 때는, 객체 개념의 이러한 추상 단계(Abstraktionsstufe)를 기억해야 한다. - P191

양자역학적 객체를 관찰할 때는, 객체 개념의 이러한 추상 단계(Abstraktionsstufe)를 기억해야 한다. 전자(Elektron)는 작은 핀머리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P191

양자역학적 객체에는 단지 추상적 객체 정의만이 들어맞는다. 어떤 시간의 상태에서 다른 시간의 상태가 예언될 수 있다. 즉 가능한 측정을 위한 확률이 제시될 수 있다. - P191

3. 아 프리오리한 물리학

(전략). 우리는 어떤 자연법칙의 타당성에 대해, 그 자연법칙이 타당하지 않다면 ‘일반적인 경험‘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파악할 때, 아 프리오리하게, 즉 각각의 구체적 경험 이전에 알 수 있다(2장 참고). - P193

지금까지 자연과학은 다섯 개의 큰 분야로 이루어져 있다.


1. 양자역학: 임의의 객체들에 대한 일반 이론(8장 참고).
2. 열역학: 다양한 근사 조건하에서 실재하는 객체를 기술하는 이론(6장 5절 참고).
3. 상대성이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론(3장과 4장).
4. 소립자론: 현재 알려지지 않은 객체의 가능한 종류에 대한 이론(이하 참고).
5. 우주론: 실재하는 객체 전체에 대한 서술(4장 5절 참고). - P193

경험 일반의 가능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연과학으로서의 "경험"을 엄밀하게 규정해야 한다. - P194

 그런데 ‘경험 일반‘이 자연과학을 토대로 엄격한 규정을 함으로써 어떤 제한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 도대체 여기서 경험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 P194

(전략). 무엇보다 개념의 형성이 이에 속한다. 우리가 이러한 "올바른 길을 찾는 일(Sich-zurechtfinden)"을 엄격하게 규정한다면, 우리가 앞서 인용했던 자연과학의 개념에 정확히 도달하게 된다. 경험을 근거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구나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과 법칙을 근거로 예언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 P195

여기서 "양자역학"이라고 지칭된 것은, 원래는 양자역학의 "힐베르트 공간 구조", 즉 가능한 예언들 상호 간의 확률 관계의 일반적 구조일 뿐이다. - P196

4. 공간


특수상대성이론의 푸앵카레 대칭은 공간과 시간 좌표에서도 대칭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의 기초를 설명할 때 시간이 지닌 특별한 역할을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추상적 논의의 테두리 내에서 공간이란 무엇일까? - P197

(전략).
따라서 공간은 존재하며, "우연하게도" 상호작용이 바로 공간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우연"은 어떤 숨은 관계를 나타낸다. 혹시 공간을 그것에 모든 객체의 상호작용이 의존하는 매개 변수들의 약칭(Zusammenfassung)으로 ‘정의‘할 수는 없을까?  - P198

우리는 ‘상호작용‘을 객체 개념의 접근 과정 속의 한 단계로 알고 있다(7장 1절). 그것은 객체들을 합성하고 분해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도 매우 추상적인 형식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 P198

(전략). 양자역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A의 (어떤 상태의) 속성과 B의 속성에 대한 진술이 객체 A&B의 속성을 진술한다는 것은 여기서도 타당하지만, 전체적 객체 A&B가 훨씬 더 많은 속성을 소유한다.⁸


8 이것은 수학적으로, 두 상태 공간의 ‘직접곱(direktes Produkt)‘과 ‘텐서곱‘ 간의 차이다. 첫 번째집합을 구성하는 원소 V와 두 번째 집합의 원소 U가 있을 때, 두 집합의 직접곱은 모든 (V, U)인쌍들의 총체이다. 반면 두 벡터공간의 텐서곱은, 막말로 하면, 각각 하나의 벡터공간에서 나온 벡터의 모든 쌍 이외에, 그러한 쌍들의 모든 선형 조합(Linearkombination)도 포함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텐서 1계산에 대한 입문서들, 예를 들어 Halmos 1958을 참고할 것. 8장 1절 d항도 참고. - P199

바이츠제커(1971)는 양쪽의 생각을, "모든 객체는 각각 하나의 이차원 상태 공간을 갖는 가장 단순한 "원초적Ur")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 하는, 그의 ‘원초-객체 (UrObjekt)들의 가설‘로 연결시켰다. 이것에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왜냐하면 모든 개념이 매우 추상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 P199

. ‘원초적 존재(Ur)‘의 속성들은 하나의 이차원적 상태 공간을 형성하는데, 측정에서는 항상 "그렇다/아니다", "+" 따위의 ‘두 가지‘ 가능성만을 구분할 수 있다. 구분 가능한 속성을 갖는 더 작은 객체는 생각할 수 없다. 원초적 존재는 예를 들어 위치를 가질 수 없다.  - P199

원초적 존재의 가설이 주장하는 것은 ‘각각의‘ 상태 공간이 그와 같이 합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주장이다. - P200

앞에서 설명했듯이, 공간은 (비상대론적으로) 상호작용의 매개변수로서 도입되는데, 이때 원초 존재-가설로부터 이러한 공간이 삼차원적이며 닫혀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상대론적 사고는 이에 대해 등각군 KonformeGruppe[SO(4, 2)]을 근본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등각군은 도형이나 어떤 양의 각이나 변화 비율만을 보존하는 변환들로 이루어지는 군이다. 어떤 군의 원소의 부분집합이 그 군과 같은 연산에 대해 특별히하나의 군을 이루면, 그것을 부분군이라 하는데, 이때 S를 붙여 어떤 군의 특별한(Special) 부분집합으로서의 군으로 표시한다. 괄호 안의 숫자들은 연산이 사차원이며, 어떤 변환에서 다른 변환으로의 행렬식의 값이 2라는 것, 즉 사차원 시공에서의 ‘동일한 거리‘를 갖는 등각변환들의 집합이라는 뜻이다.-역주). 그러나 이것은 수학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아직 유동적이다.⁹ - P201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물리학 이론으로서는 이미 "낡은" 것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 최근 몇 년 동안 현저한 발전을 이룩한 양자역학을 살펴보자. 앞서 다룬 이론들이 서로 차이를 보인다고 해도 이점에서는 강한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다. - P202

5장 양자론

1. 양자가설


1875년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물리학 공부를 시작할 때, 그의 스승인 졸리(Jolly) 교수는 그에게, 물리학이 아주 재미있는학문이긴 하지만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타날 수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 P125

플랑크가 다룬 문제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보인다. 빈(Wien, 1864~1928)의 스펙트럼 방정식은 "흑체[swarzer Körper. 모든 파장의 복사를 완전히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이상적 물체.-역주]"의 스펙트럼 분포를 다루는 것으로, (후략). - P125

막스 플랑크는 전자기복사의 열역학에 몰두해 있었으며, 특히 자외선 파국을 고전 이론의 피할 수 없는 결과로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 P127

(전략). 1911년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는 양자가설이 자외선 파국을 피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 P128

드디어 아인슈타인은 양자가설을 심화시켜, 빛의 에너지가 플랑크의 양자로 방출되고 흡수될 뿐만 아니라, 결국 빛은 그러한 양자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² - P-1

(전략). 따라서 빛은 파동과 입자라는 수수께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파동-입자 이원론‘은 8장 3절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 P129

2. 원자물리학

1896년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이 우라늄에서 천연 방사능을 발견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방사선을 집중 실험하고 그 특성을 분석하다가, 1911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원자핵을 발견했다. - P129

역시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으며, 원자핵을 발견한 지 얼마 후에러더퍼드의 연구진에 들어온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26)는 그러한 원자 모델을 고전물리학에 입각해서 설명하려는 것은 ‘가망 없는‘ 짓이라는 점을 재빨리 알아챘다. - P130

(전략). 양자역학을 발견하기까지 수년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성과들이 새로운 난점으로 이어지면서 제공되었다.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두 개의 주제, 즉 대응 원리 (Korrespondenzprinzip)와 슈테른게를라흐(Stern-Gerlach)실험만을 언급해 보자. - P131

보어의 ‘대응 원리‘란 원래 자명한 정합성의 요구(Konsistenzforderung)다. 즉 고전물리학이 확증되는 영역에서 양자론의 서술은 (실제로)고전 이론과 같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 P131

오토 슈테른과 발터 게를라흐는 1921~1922년 특별한 방법으로 양자론의 특성을 설명하는 실험을 했다. 한쪽 끝에 화로(Ofen) 속에서은의 원자(은증기 Silberdampf)가 흘러나오는 진공그릇을 상상해 보자(그림 5-1).
이 흐름은, <그림 5-2>와 같은 형태의 극편에서 발생하는 매우 이질적인 자기장을 통과한 후 유리판에 부딪힌다. - P-1

실험 결과는 이러한 기대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실제로 은 증기의 흐름은 두 가닥으로 ‘갈라졌다‘. - P133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은 처음으로 전자기 복사 이외의 전형적 양자효과를 보여 주었다.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후에 증명되었듯이, 은의 외각 전자의 ‘스핀‘(Spin des äußeren Silber-Elektrons)이라는 특히 전형적인 양자역학적 양을 확증했다. - P133

3. 양자역학

1923년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1987)는 빛의 기묘한 이중성을 전자에 부여했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갖는 것으로 보이듯이, 전자도 지금까지 확인되어 온 입자성과 함께 파동성도 가질 수 있다는것이다. - P134

(전략).
결국 양자역학은 1. "입자의 운동은 확률 법칙을 따르지만 확률 자체는 인과율과 일치하여 분포한다"라는 막스 보른이 공식화한 "통계적 해석"에 의해, 그리고 2. P. 요르단과 P. 디랙이 추상적으로 형식화한 W. 하이젠베르크와 E. 슈뢰딩거의 이론에 대한 수학적 등가성의 증명에 따라, 그리고 마침내 J.V. 노이만의 "통계적 변환 이론"에 따라 수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 P136

역사를 참고해 보는 것도 철학적인 물음을 위해 흥미 있는 일이다. - P137

 이에 따라 오늘날도 양자역학의 해석과 관련된 두 개의커다란 집단이 존속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보어와 "코펜하겐 학파처럼 고전물리학의 수정을 환영하고 물리학 이론으로서의 양자역학에 만족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집단은 드 브로이, 아인슈타인 그리고 슈뢰딩거처럼 양자역학이 고전역학이 수행하는 것과 같이 실재 자체의 객관적 인상을 제공하지 않는 한, 양자역학에 대해 불만을 크게 느끼는사람들이다.⁷


7 A 아인슈타인과 N. 보어 간의 토론은 이러한 논쟁의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쉴프(P. A. Schillpp)가 편집한 아인슈타인 선집과 N. 보어의 책(1958)에 나와 있다. B. Hoffmann/H. Dukas도 참고 - P137

두 가지 전혀 다른 근본 입장에서 발전되어 나온 서로 다른 이론들이 수학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동형적인 isomorph") 것으로 밝혀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배후에는 분명 매우 일반적인, 단일한 근본 구조가 숨어 있을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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