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타 씨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때 마요의 가방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잠깐만." 마요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고향 친구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앞부분을 읽어 보니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P16
겐타는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추어올렸다. "대놓고 하지는 않고 뒤에서 수군거렸지. 나랑 같이 있을때 나쁜 짓을 하면 가미오 선생님에게 일러바칠 테니까 조심하라고. 사람을 스파이 취급했어." "그건 너무하네.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도 있을 거 아냐." "몇 명은 있지. 지금 연락 준 것도 그중 한 친구야. 하지만지금은 거의 안 만나." - P17
"잠깐만. 다음 주면, 상황에 따라서는 가고 싶어도 못 갈지도 몰라." 겐타의 말뜻을 마요도 알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그래, 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 P17
"도지사가 감염 확산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가까운 시일 안에 모종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고 들었어." "스테이 인 도쿄, 한동안 도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될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들 한두 번 시달린 게 아니니까." 2019년에 최초 보고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이야기다.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완전히 수습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몇몇 치료약의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감염자 수 증가도 억제되고 있어서 현재는 일상생활에 그다지 큰 영향은 없었다. - P18
가령 ‘도쿄도에서 다른 현으로의 이동을 삼갈 것‘이라는요청이 발령되면,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제하는 건 아니지만, 따르지 않으면 주변의 따가운시선을 받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실명이 유출되어 인터넷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P18
마요가 혼자 사는 맨션은 지하철 신주쿠선 모리시타역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약 4.2평의 방과 부엌, 욕실, 화장실만 있지만, 월세는 10만 엔이 넘는다. - P19
반년 전에 프러포즈를 받았다. 코로나 확산세가 주춤해진무렵이었는데, 슬슬 이야기를 꺼내겠구나 예상했던 터라 의외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인 것은 분명했다. 이제 서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프러포즈는 승낙했다. 겐타도 거절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겠지만, 마요처럼 안도한 눈치였다. - P21
스마트폰을 들고 SNS를 확인하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혼마 모모코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이고 뭐고, 왜 메시지에 답이 없어?" 모모코는 중학생 시절부터 변함없는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좀 고민이 돼서." "왜? 일이 바빠?" "응, 그것도 있고." "그 말은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야? 아, 혹시 부녀가 같이 참석하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지?" - P22
"그러고 보니 지금 본가에 있댔지? 거긴 어때?" 모모코는 남편이 간사이로 단신부임하게 되어서, 지난달부터 두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다고 지난번 연락했을 때 말했다. 원래 살던 요코하마의 맨션은 지인에게 임대했다고 했다. "너무 편하지. 부모님이 아이 봐주시니까 내 시간도 생겼고. 너 내려오면 언제든 나갈게." "그거 좋네." - P23
감염 재확산이 빈번하게 일어나니 다들 대응 방식에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난 도쿄에서 못 나갈지도 모르겠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자제하라고 했지." "응, 괜히 이 시점에 고향 내려갔다가 돌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후후, 모모코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정부에서 이상한 소리 하기 전에 미리 내려오는 건어때? 걔가 그랬거든, 엘리트 알지?" - P24
"그리고 우리 지역이 낳은 영웅도 돌아왔다고 하더라고." 모모코의 말에 마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자세로 고개를갸웃했다. "영웅? 그게 누군데?" "너 몰라? 환라비 작가 구기미야 말이야." 아, 마요의 입이 벌어졌다. "그랬지." "마요, 동창을 넘어서 우리 모교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를어떻게 잊어 버릴 수 있어?" - P25
전화를 끊자 다양한 추억들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모모코와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그리운 이름들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쓰쿠미라……………. 또래 중학생들보다 다부진 체격, 남자다웠지만 아직 어른의 계단을 오르지 않은 앳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자, 달콤한 그리움과 함께 옛 상처를 쑤시듯 가슴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 P26
쓰쿠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6년이 지났다. 만일 그가 살아 있고, 동창회에도 참석한다면 아마 들뜬 마음으로 흔쾌히 간다고 했겠지. 마요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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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셔터 아래로 집어넣었다. 손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서늘했고, 틈새로는 찬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직 3월 초니까 당연하지만 - P28
하라구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전 8시였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점가였지만 활기는 거의 느껴지지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런 날들이 계속되는 것일까.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이웃의 도자기 전문점의 유리문을 열고 주인이 나오는 참이었다. 손에는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 P29
"오늘은 좀 어때요? 도자기 만들기 체험 예약은 좀 들어왔나요?" 하라구치가 물었다. (전략). "그럴까요? 도쿄에서 소규모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고듣긴 했는데, 현내에서는 아직 확진자가 없대요." - P29
도자기 가게 주인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상관없어. 조금 지나면 여기서도 감염자가 나올 거야. 도교하고 다소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그랬으니까. 그러면 또 관광이나 야외 활동은 삼가라고 하겠지. 다시 집콕 생활이 시작되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누가 도자기같은 데 관심을 가지겠어." "그렇게 되면 저희도 힘들어지겠네요." - P30
"아, 음식점은 당분간은 또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네. 그리고여관도 어제 마루미야에서 들었는데, 뉴스가 나오자마자 바로 예약 취소 건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역시 그렇군요." - P30
하라구치는 가게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된 낡은트럭 차체에 적힌 ‘하라구치 상점‘이라는 글자는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도색을 새로 할 여유가 없었다. 트럭을 가게 앞으로 이동시킨 뒤에 배달할 술을 싣기 시작했다. 오늘 거래처는 여관과 술집, 음식점 등이다. 평소에는열 곳 이상을 돌지만, 오늘은 겨우 세 곳이었다. 게다가 모두 주문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짐칸은 썰렁했다. - P31
도심 번화가에서는 상당수의 음식점들이 폐업으로 내몰렸다. 노포라 불리던 유명 가게, 긴자에서 수십 년간 영업해 오던 고급 클럽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확진자 수가 비교적 많지 않았던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지역의 타격이 컸다. 원래 인구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음식점이 수익의 절반을 타지역 방문객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 P32
신종 코로나에 의한 폐렴 치료법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유효한 백신도 개발 단계에 있다고 했지만 과거의 활기가 되돌아올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그것이 국민들의 공통된 생각이아닐까.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그랬다. 하라구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 P32
하지만 그런 날들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변화에 대응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도쿄 도지사가 ‘도쿄에서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라고 발표한 이튿날에는 관공서의 홍보 차량이 도로에 등장했다. 스피커에서는 ‘당장 필요하거나 시급하지 않은 일로 지역 간 왕래를 하는 것은 삼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 P33
(전략). 그리고 또다시 1주일 전에 도쿄에서 같은 내용의 지시가 내려왔다. ‘감염 확산의 조짐이 보인다‘라는 표현으로, 일기예보에 비유하자면 ‘주의보‘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이 금방 ‘경보‘ 수준으로 격상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이제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 P33
아, 그렇지. 순간 이 집에 뒷마당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라구치는 일단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 주택 외벽을 따라돌아갔다. 예전에 이 뒷마당에서 바비큐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모인 건 근처에 사는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5년도 더 지났을 때였다. 선물로 술을 들고 갔더니,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며 다들 돈을 모아 값을 치렀다. - P35
하지만 한눈에 봐도 기묘한 것이 있었다. 뒷집과의 사이에 담이 있는데, 그 앞에 찌부러진 종이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감추는 것처럼.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의 가미오 에이치 선생답지 않았다. (중략). 가장 위에 있는 상자를 잡고 당기자, 쌓인 상자들이 와르르옆으로 쓰러지면서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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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 주방 관련 쇼룸을 둘러봐야겠다는 마음에 회사를 나온 참이었다.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에 마요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국번은 익숙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남자 목소리가 가미오 마요 씨 되십니까?"하고 물었다. - P37
관광지라고는 해도 관광명소가 많은 건 아니었다. 지명의유래가 된 유서 깊은 사원이 최대 볼거리였고, 그곳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한 온천 마을이었다. - P38
"도쿄에서요." 마요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귀성하신 겁니까?" "네, 뭐." "그렇군요. 하긴 다시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니까요." 택시 기사는 납득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무엇 때문에 경찰서를 찾는지 궁금할 터였다. 마요는 물어보면 어쩌지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 P39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내용을 정리했다.
3월 8일 오전 10시경 시신발견 신고
-장소: 가미오 에이치의 자택 -신고자: 가미오 에이치의 자택에 방문한 사람 (남성/제자/이름은 불명) -사망 확인: 오전 10시 25분 -시신의 신원: 가미오 에이치- 사망 시각: 미확인 -사인: 미확정(타살 가능성이 큼) -가족: 전화기 통화 기록으로 추측 - P40
방문객은 에이치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옛 제자라고 해야겠지. 이름은 모르지만 경찰이 파악하지 못했을 뿐,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면 마요는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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