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을 맞댄 연인



호리키 히카루 1

시작은 아주 사소한 핸드폰 알림이었다.
대학교 2학년 6월 초, 취업 활동이라는 막연히 어두운 구름 같은 건 아직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그렇다고 학업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도 그저 적당한 선에서 하는 정도다. - P59

6월치고는 날씨가 서늘했다. 창밖에서는 아주 칙칙해 보이는 쟂빛 하늘 아래 딱히 거세지도 않고 추적추적하지도 않은 보통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 P59

같이 사는 한 살 어린 여동생은 1교시 수업이 있는지 두 시간쯤 전에 쾅, 하고 현관문을 시끄럽게 여닫고 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손해를 보면서까지 밖에 나갈 마음이 들지 않아 막무가내로 두 상의나 연속 자율 휴강을 하고 밖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P60

(전략)
그 알림은 ‘당신을 친구라고 말하는 사용자가 있습니다‘라는 식의, 어느 SNS에나 꼭 존재하는 오지랖 기능 알림이었다. 이런 것도 보통은 무시한다.
(중략)
화면을 봤다. 내 친구라고 주장한느 이는 drizzle이라는 처음보는 계정이었고, 프로필 사진은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솜구름 사진이었다. - P61

한가한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별생각 없이 drizzle의 프로필에 들어가 봤다. 나이와 성별 외의 정보는 일절 없고, 자세히 보니 아주 장대하여 눈길을 끄는 구름 사진 밑에 ‘사진이 취미인 학생입니다‘라는 간결한 소개문과 미니 블로그의 주소만 적혀 있었다. - P62

그나저나 게시된 사진은 전부 다 아름다웠다. 사진은 평균 하루에 한 장꼴로 두 달쯤 전부터 꾸준히 갱신되어 나름대로 양이 많았다. 서너 장에 한 장은 "오!"하고 감탄할 만한 사진이었고, 그중에서 다섯 장에 한 장은 단순히 아릅답거나 발상이 재미있거나 구도가 세련되어서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저장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진이었다. - P63

히라미쓰 시오리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학생이라고 한다. 평일 낮에 찍은 듯한 사진도 많으니까 고등학생은 아닐 테고, 희학부나 교직 과정을 이수하는 등 바쁜 학생도 아닌 듯 했다. - P64

그리고 다른 사진을 보다가 또 알아차렸다. 어디에든지 있을 법한 연립주택의 벽면인데, 이 벽도 실제로 본 기억이 났다. 연립주택 이르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 근처에서 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 학생인가." - P65

물론 금세 ‘찾아서 뭐 어쩌려고?‘ 라고 스스로에게 되묻기는 했다. 하지만 본인을 한 번 보고 싶었다. (중략)
요컨대, 친구는 웃을 테고 여동생은 어처구니없어 하겠지만, 이건 분명히 ‘사랑‘이었다. - P66

히라마쓰 시오리 1

이건 분명히 ‘사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른바 첫눈에 반ㄴ했다는 데 가깝다는 점이다.
현대 일본에서 ‘첫눈에 반했다‘는 현상은 대체로 경박하고 유치한 것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첫눈에 반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 P66

나는 원래 남들과 대화하는 데 서툴고, 그중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한군데 모여서 인사와 자기소개를 하는 일이 제일 거북했다. - P67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초면인 타인에게 저리도 가볍게 말을 걸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이좋게 지내죠"하고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가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여기면 어쩐단 말인가. - P67

이런 식으로 고민하는 인간을 시쳇말로 ‘커뮤증 환자(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형성되는 과정이 원활하지 못해 해당 능력 발달에 현저한 문제가 발생한 탓에, 인간 관계를 구축하는 데 보통 사람 이상으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물)‘라고 한다 - P68

나한테가 아니라 계산대 부근에 있던 다른 남학생한테.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생협 서점을 떠돌고 있던 남학생이 있었다. 우리 학교 선배인 듯한 남학생과 "신입생이에요?" "네""교과서 판매소를 찾는 거죠? 그거, 이쪽이에요.""가, 감사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나눈 후, 나처럼 남과의 대화가 서툴러 보이는 남학생을 데리고 생협 서점을 나섯다. - P70

나는 감탄하는 동시에 선망의 눈빛을 선배의 뒷모습에 던졌다. - P71

(전략)
나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들 추적하며 그때 일을 생각했다. 선배가 그때의 오빠와 조금 닮아서 좀 더 자세히 보고 싶기도 했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은 사람은 빛이 나므로 똑바로 보면 위험하다. - P72

(전략)
그리하여 단지 그만한 일로 호리키 씨의 존재가 내 대뇌 피질에 깊이 새겨지고 말았다. - P73

냉큼 ‘뒤솜습을 사진으로 찍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건 완전히 ‘도를 벗어난‘ 행동이기에, 꺼낸 카메라로 위치 관계가 재미있는 일반교양 학부 건물 옥상의 모서리와 하늘의 뭉게구름을 역광으로 담는 데 머물렀다. - P74

호리카 히카루 2

히라마쓰 시오리 씨가 우리 학교 학생인 걸 알고 나서 어쩐지 캠퍼스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게 됐다. 얼굴도 모르는 이상, 뜬금없이 찬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 P75

히라마쓰 시오리 씨의 블로그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건 이제 완전히 내 취미 중 하나가 됐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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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정신분석적 신화 해석의 경이로움신화의 숨겨진 의미는 무엇인가? 이 주제로 신화학자들과 2년간 공동 연구를 진행했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고대의 신화를 현대의 정신분석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 P7

이런 유사성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문명인이 믿는 고등 종교의신화와 미개하다고 생각했던 원시 민족들의 신화가 이토록 유사하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P7

신화 이해를 위한 근본 개념들

신화학자들은 각자 자신이 연구해온 신화들을 소개하면서, 시간적·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서로 다른 민족의 신화들 사이에 공통성이 있다는 말을 마치 신기한 발견을 한 듯이 뱉어냈다. - P8

당시에 나눴던 대화 속의 의미들이 종합되고 비로소 입체적으로 인식된 것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roge Frazer의 ‘황금가지‘를 읽고 난 뒤 였다.
(중략)
더 나가 프레이저는 세계 도체에서 목숨 바쳐 지키고 떠받들던 대상을 어느 순간 살해하는 ‘왕 살해‘, ‘신 살해‘ 풍습이 원시 시대부터 근세기까지 지속되어왔음에 주목하고 그 원인과 의미를 인류학 관점에서 묻고 추적한다. - P9

프레이저, 프로이트, 융의 관저은 각각의 타당성과 함께 한계를 지닌다. 우리의 시야를 현대정신분석학의 개념과 관점으로 확장한다면 원시 인류의 정신서에 대해 그들이 밝히지 못했던 요소들을 보충하고 이해할 수 있다. - P9

꿈과 신화, 무의식에 이르는 통로

신화를 해석하느데 필요한 정신분석의 근본 틀은 이미 프로이트와 융이 상당 부분 제공한 상태다. 이는 일차적으로 무의식에 접근하는 방법, 그리고 꿈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 P10

(전략)
이에 비해 신화는 최근에 꾼 꿈이 아닌 수천수만 년 전 각 민족의 정신이 각인된 강렬한 체럼들이 언어로 구현된 서사다. - P11

가령 신경증자들은 중년이 된 후에도 유년기에 경험한 강한 흥분 자극과 감정에 반복해서 휘둘린다. 그로 인해 솟구치는 욕망과 불안은 증상으로 변장되어 표출된다. - P11

신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란 우리 정신의 밑바닥5에 있는 태곳적 민족무의식·인류무의식과 ‘지금, 여기‘에서 교류하는 경이적 사건이다. - P12

신화에서 인류의 보편 상징을 읽는 법

신화 속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류학적·민속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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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타 씨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때 마요의 가방에서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잠깐만."
마요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고향 친구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앞부분을 읽어 보니 예상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P16

겐타는 뜻밖이라는 듯 눈썹을 추어올렸다.
"대놓고 하지는 않고 뒤에서 수군거렸지. 나랑 같이 있을때 나쁜 짓을 하면 가미오 선생님에게 일러바칠 테니까 조심하라고. 사람을 스파이 취급했어."
"그건 너무하네. 그래도 친하게 지냈던 친구도 있을 거 아냐."
"몇 명은 있지. 지금 연락 준 것도 그중 한 친구야. 하지만지금은 거의 안 만나." - P17

"잠깐만. 다음 주면, 상황에 따라서는 가고 싶어도 못 갈지도 몰라."
겐타의 말뜻을 마요도 알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그래, 겐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 P17

"도지사가 감염 확산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가까운 시일 안에 모종의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고 들었어."
"스테이 인 도쿄, 한동안 도쿄에서 나가지 못하게 될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들 한두 번 시달린 게 아니니까."
2019년에 최초 보고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의이야기다.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완전히 수습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몇몇 치료약의 효과가 확인되었으며, 감염자 수 증가도 억제되고 있어서 현재는 일상생활에 그다지 큰 영향은 없었다. - P18

가령 ‘도쿄도에서 다른 현으로의 이동을 삼갈 것‘이라는요청이 발령되면, 웬만한 사정이 아니고서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제하는 건 아니지만, 따르지 않으면 주변의 따가운시선을 받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실명이 유출되어 인터넷상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P18

마요가 혼자 사는 맨션은 지하철 신주쿠선 모리시타역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약 4.2평의 방과 부엌, 욕실, 화장실만 있지만, 월세는 10만 엔이 넘는다.  - P19

반년 전에 프러포즈를 받았다. 코로나 확산세가 주춤해진무렵이었는데, 슬슬 이야기를 꺼내겠구나 예상했던 터라 의외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인 것은 분명했다. 이제 서른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프러포즈는 승낙했다. 겐타도 거절하지 않으리라 예상했겠지만, 마요처럼 안도한 눈치였다. - P21

스마트폰을 들고 SNS를 확인하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혼마 모모코였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오랜만이고 뭐고, 왜 메시지에 답이 없어?"
모모코는 중학생 시절부터 변함없는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좀 고민이 돼서."
"왜? 일이 바빠?"
"응, 그것도 있고."
"그 말은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야? 아, 혹시 부녀가 같이 참석하는 게 불편해서 그런 건 아니지?" - P22

"그러고 보니 지금 본가에 있댔지? 거긴 어때?"
모모코는 남편이 간사이로 단신부임하게 되어서, 지난달부터 두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다고 지난번 연락했을 때 말했다. 원래 살던 요코하마의 맨션은 지인에게 임대했다고 했다.
"너무 편하지. 부모님이 아이 봐주시니까 내 시간도 생겼고.
너 내려오면 언제든 나갈게."
"그거 좋네." - P23

감염 재확산이 빈번하게 일어나니 다들 대응 방식에도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데 난 도쿄에서 못 나갈지도 모르겠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은 자제하라고 했지."
"응, 괜히 이 시점에 고향 내려갔다가 돌이라도 맞으면 어떡해."
후후, 모모코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정부에서 이상한 소리 하기 전에 미리 내려오는 건어때? 걔가 그랬거든, 엘리트 알지?" - P24

"그리고 우리 지역이 낳은 영웅도 돌아왔다고 하더라고."
모모코의 말에 마요는 스마트폰을 귀에 댄 자세로 고개를갸웃했다.
"영웅? 그게 누군데?"
"너 몰라? 환라비 작가 구기미야 말이야."
아, 마요의 입이 벌어졌다. "그랬지."
"마요, 동창을 넘어서 우리 모교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를어떻게 잊어 버릴 수 있어?" - P25

전화를 끊자 다양한 추억들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모모코와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그리운 이름들을 들었기 때문이리라.
쓰쿠미라…………….
또래 중학생들보다 다부진 체격, 남자다웠지만 아직 어른의 계단을 오르지 않은 앳된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자, 달콤한 그리움과 함께 옛 상처를 쑤시듯 가슴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 P26

쓰쿠미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6년이 지났다.
만일 그가 살아 있고, 동창회에도 참석한다면 아마 들뜬 마음으로 흔쾌히 간다고 했겠지. 마요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27

2

허리를 굽히고 두 손을 셔터 아래로 집어넣었다. 손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서늘했고, 틈새로는 찬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아직 3월 초니까 당연하지만 - P28

하라구치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전 8시였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점가였지만 활기는 거의 느껴지지않았다. 게다가 오늘은 월요일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런 날들이 계속되는 것일까.
바로 옆에서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이웃의 도자기 전문점의 유리문을 열고 주인이 나오는 참이었다. 손에는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다. - P29

"오늘은 좀 어때요? 도자기 만들기 체험 예약은 좀 들어왔나요?" 하라구치가 물었다.
(전략).
"그럴까요? 도쿄에서 소규모의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고듣긴 했는데, 현내에서는 아직 확진자가 없대요." - P29

도자기 가게 주인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상관없어. 조금 지나면 여기서도 감염자가 나올 거야. 도교하고 다소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그랬으니까. 그러면 또 관광이나 야외 활동은 삼가라고 하겠지. 다시 집콕 생활이 시작되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누가 도자기같은 데 관심을 가지겠어."
"그렇게 되면 저희도 힘들어지겠네요." - P30

"아, 음식점은 당분간은 또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네. 그리고여관도 어제 마루미야에서 들었는데, 뉴스가 나오자마자 바로 예약 취소 건이 나왔다고 하더라고."
"역시 그렇군요." - P30

하라구치는 가게 옆에 있는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된 낡은트럭 차체에 적힌 ‘하라구치 상점‘이라는 글자는 흐릿해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도색을 새로 할 여유가 없었다.
트럭을 가게 앞으로 이동시킨 뒤에 배달할 술을 싣기 시작했다. 오늘 거래처는 여관과 술집, 음식점 등이다. 평소에는열 곳 이상을 돌지만, 오늘은 겨우 세 곳이었다. 게다가 모두 주문량이 얼마 되지 않아서 짐칸은 썰렁했다. - P31

도심 번화가에서는 상당수의 음식점들이 폐업으로 내몰렸다. 노포라 불리던 유명 가게, 긴자에서 수십 년간 영업해 오던 고급 클럽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확진자 수가 비교적 많지 않았던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지역의 타격이 컸다.
원래 인구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음식점이 수익의 절반을 타지역 방문객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 P32

신종 코로나에 의한 폐렴 치료법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유효한 백신도 개발 단계에 있다고 했지만 과거의 활기가 되돌아올 날이 과연 올 것인가. 그것이 국민들의 공통된 생각이아닐까.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그랬다. 하라구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 P32

하지만 그런 날들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변화에 대응하는 데에도 익숙해졌다. 이를테면 도쿄 도지사가 ‘도쿄에서 감염이 확산되고 있다.‘라고 발표한 이튿날에는 관공서의 홍보 차량이 도로에 등장했다. 스피커에서는 ‘당장 필요하거나 시급하지 않은 일로 지역 간 왕래를 하는 것은 삼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 P33

(전략).
그리고 또다시 1주일 전에 도쿄에서 같은 내용의 지시가  내려왔다. ‘감염 확산의 조짐이 보인다‘라는 표현으로, 일기예보에 비유하자면 ‘주의보‘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이 금방
‘경보‘ 수준으로 격상할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건 이제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 P33

아, 그렇지. 순간 이 집에 뒷마당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라구치는 일단 현관에서 밖으로 나가 주택 외벽을 따라돌아갔다. 예전에 이 뒷마당에서 바비큐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모인 건 근처에 사는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5년도 더 지났을 때였다. 선물로 술을 들고 갔더니,
공짜로 받을 수는 없다며 다들 돈을 모아 값을 치렀다. - P35

하지만 한눈에 봐도 기묘한 것이 있었다. 뒷집과의 사이에 담이 있는데, 그 앞에 찌부러진 종이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감추는 것처럼.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의 가미오 에이치 선생답지 않았다. (중략).
가장 위에 있는 상자를 잡고 당기자, 쌓인 상자들이 와르르옆으로 쓰러지면서 그 아래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 P36

3

월요일 오후.
주방 관련 쇼룸을 둘러봐야겠다는 마음에 회사를 나온 참이었다. 스마트폰이 울리는 소리에 마요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하지만 국번은 익숙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번호였다.
전화를 받자 남자 목소리가 가미오 마요 씨 되십니까?"하고 물었다. - P37

관광지라고는 해도 관광명소가 많은 건 아니었다. 지명의유래가 된 유서 깊은 사원이 최대 볼거리였고, 그곳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평범한 온천 마을이었다.  - P38

"도쿄에서요."
마요는 일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귀성하신 겁니까?"
"네, 뭐."
"그렇군요. 하긴 다시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니까요."
택시 기사는 납득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무엇 때문에 경찰서를 찾는지 궁금할 터였다. 마요는 물어보면 어쩌지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 P39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여러 항목으로 나누어 내용을 정리했다.

3월 8일 오전 10시경 시신발견 신고

-장소: 가미오 에이치의 자택
-신고자: 가미오 에이치의 자택에 방문한 사람 (남성/제자/이름은 불명)
-사망 확인: 오전 10시 25분
-시신의 신원: 가미오 에이치- 사망 시각: 미확인
-사인: 미확정(타살 가능성이 큼)
-가족: 전화기 통화 기록으로 추측 - P40

방문객은 에이치의 제자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은퇴했으니 정확히 말하면 옛 제자라고 해야겠지. 이름은 모르지만 경찰이 파악하지 못했을 뿐,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면 마요는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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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Ai가 훔쳐간 상상

Ai는 추상화를 그릴 수 있을까?

AI와 추상화

AI는 그림을 잘 그린다. 정확하게는 구상화를 잘 그린다. 구상화는 모양을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와 달리 추상화는 물체의 형상에서 본질을 뽑아내 그린 그림이다. - P160

추상화의 본질

칸딘스키는 추상화non-objective art의 선구자다.⁴⁷ 그는 "그림은 분위기mood를 나타내는 것이지 물체object를 나타내는 게 아니다."라고말했다.


47 월간조선 "이규현의 ‘아트토크‘-‘그린 것 없이 그린‘ 추상화". 2014.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409100052 - P162

그림이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는게 아니라면 뭐하러 그림을 그릴까? 추상화를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또 다른 오브제가 보인다. 캔버스, 물감, 붓 자국 같은 것이다. 미술 용어로는 물성物性이라 한다. - P162

48프로그래밍의 본질적인 의미는 시뮬레이션simultation이다.⁴⁸ (중략). 그런데 실제 세계가 워낙 복잡해서 바로 컴퓨터 내부로 반영할 수 없어서 추상화와 구체화 과정을 거쳐야한다. (후략).

48 바람돌‘s Life, "객체지향 프로그래밍 1화 - 개념,  추상화,     클래스", 2015, http://moen,tistory.com/27 - P163

피카소의 뜨개질

피카소가 그린 화가와 뜨개질하는 모델>에는 뜨개질하는 여인을 그리는 피카소가 나온다. 하지만 캔버스에는 여인의 형체가없고 여러 개의 둥근 선과 직선이 마구잡이로 그려져 있다. 피카소는 지금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을 하는 중이다. - P164

카이스트에서 뇌과학을 연구했던 정재승 교수는 인공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특화되어 있고 인간은 문제를 정의 내리는 데 탁월하다고 말한다.  - P165

서울대 철학과 김상환 교수도 비슷하게 말한다.⁴⁹ "일상 대화나상식 수준의 생각 교환 아이디어 교환은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잘할 겁니다. 인공지능이 정확하고 간결하고 경제적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딥러닝은 거대한 빅데이터를 기반으로공통점을 추출하고 개념화합니다. 인간 사고의 단계에서 놓고 보면 초보적 수준이죠. 인간은 공통점을 추출한 다음 개념화하고 적당한 이름을 붙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 개념으로는 분류가 안 되는 것들이 생깁니다. 기존 체계에 속하지 않는 것들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가설을 만듭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상상想像입니다. 창의성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데 딥러닝, 다시 말해 인공지능이 아직까진 쫓아올 수 없습니다."


49 중앙일보, "AI는 없어 인간 지배 못해..... 생각의 주도권 잡아야" 2016. hip://news.joins.com/artcle/2023430 - P166

구글 딥마인드

구글은 딥마인드를 스타크래프트 2 게임에 적용하겠다고 2016년 11월에 발표했다. 스타크래프트 2는 실시간 전략 게임이다. 세종대 컴퓨터공학과 김경중 교수는 현재 인공지능이 프로 선수를 이기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⁵⁰


50 바둑신문 "너흰 아직 준비가 안됐다. 스타크래프트 판 ‘인간 vs 인공지능‘ 대결 승자는?", 2017. http://baduknews.com/news/view.php?idx=630 - P167

스타크래프트 2는 바둑이나 포커처럼 명확한 규칙이 없다. 공격준비를 다 했다고 선포하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마린 몇 개만 생산해서 쳐들어가기도 한다. 상대가 뭘 하는지 전혀 모르는데도 자신감만으로 적진에 밀고 들어가기도 한다. - P168

알파고는 싱글 에이전트Single Agen다. 사람과 1대 1로 승부한다. 스타크래프트도 밖에서 보면 1:1로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수많은 인공지능의 집합이다. 사람이 게임할 때 마린의 행동은 마우스 클릭으로 결정한다. - P168

인공지능이 스타크래프트를 하려면 알파고의 싱글 에이전트 학습 방식을 쓸 수 없다. 다른 에이전트의 행동으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에 학습이 어렵고 기존의 경험을 활용할 수 없다. - P169

알파고가 사람과 바둑을 둬서 이긴 이유는 바둑의 환경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바둑은 명확한 규칙과 정해진 상황에서만 작동하므로 알파고는 거의 모든 경우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 P170

상상하고 계획하는 인공지능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인공지능이 선택한 것이 바로 상상想像이다. 2017년 7월 20일 구글 딥마인드는 회사 홈페이지에 ‘상상하고 계획하는 인공지능Agents that imagine and plan‘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다.⁵³


53 DeepMind. "Agents that imagine and plan", 2017, https://deepmind.com/blog/agents-imagine-and-plan - P171

발생 가능한 미래를 상상해서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행동을 계획하는 이 인공지능은 3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중략).
둘째, 상상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적절한 경로를 상상해서 문제에 적합하게 조정한다. 또한 보상과 상관없이 모든 상상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어낸다. (후략). - P172

상상하고 계획하는 인공지능에게 이 일을 시켜 보자. 그러면 그는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어떤 경로로 가서 어떤 저글링부터 공격해야 하는지 상상한다. 자신이 왜 움직이지는 해석한다. 자기가 저글링에게 다가가면 저글링이 어떻게 행동할지도 상상한다. 이제 인공지능은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찾는다. - P173

AI에게 숫자가 중요할까?


(전략).


파라미터와 방정식

ChatGPT의 기반 모델인 GPT-3의 파라미터 매개변수는 무려 1,750억 개다. GPT-1은 1억여 개, GPT-2는 15억 개니까 앞선 모델의 10배가 넘는 파라미터를 사용했다. GPT의 파라미터 개수가엄청나게 늘면서 이전 모델과 달리 ChatGPT가 사람처럼 말한다는 것에 모두 놀랐다. - P175

생각지 못한 무려

만약 파라미터가 무려 1조 개, 100조 개를 넘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무려 1조 개, 무려 100조개 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무려‘라는 단어를 엄청난 숫자 앞에 쓴다. - P179

 한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속담 8,197개 중에서 숫자가 표현된 속담은 984개였다.⁵⁴ 그중에3이 표현된 것이 가장 많아서 287개 2%를 차지했다. 그다음은 1이 표현된 것이 170개.3%였다. 유독 3이 많은 이유는 홀수를 선호했던 우리 정서와 함께 3이 자연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이기 때문이다.


54 박은하, "한국 속담에 표현된 수의 의미", 2009 - P182

아주 큰 숫자와 구글


속담에서 쓰는 숫자는 "세 닢짜리 십만 냥짜리 흉본다"에서 쓴 십만이 한계다. "저승길이 구만리", "앞길이 구만리 같다"처럼 보통은 구만까지 센다. 구만이면 아주 먼 숫자다. 옛날에 보통 살림에서는 이 정도 숫자면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은 훨씬 더 큰 숫자를 쓴다. - P183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고 아는 거대한 숫자 이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구골이다. (전략). 구골은 1940년에 발행된 《수학과 상상Mathematics and theImagination》이란 책에 나오는 용어로 10의 100승을 말한다. - P185

거대한 깨달음

우리의 생각은 숫자와 뗄 수 없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숫자를 이해해야 한다. - P185

(전략).

아주 큰 숫자는 아주 큰 깨달음을 준다. 숫자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문화를 만드는 도구이자 목표였다. AI에게파라미터의 개수도 그런 의미가 되지 않을까? 어떤 숫자를 뛰어넘으면 AI가 거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 P189

제1부 ai가 훔쳐간 감정


AI도 개과천선할까?

AI의 후회

후회는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친다는 말이다. 후회를 하려면 첫 번째로 이전의 잘못이 존재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 잘못을 깨쳐야 한다. - P35

그런데 만약 코드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일반적으로 개발자가 테스트 서버에서 코드를 입력하고 실행했을 때 오류가 생기면 오류를 수정한다. - P35

(전략).

마지막 단계는 AI가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끼는 것이다.
ChatGPT가 가책을 느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최소한 사용자에게 사과는 한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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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수께끼 풀이 방식을
시도한 작품입니다.
덕분에 작가 수명이 조금 더 늘었을지도.
한국 독자들도 새 히어로
블랙 쇼맨과 함께 모쪼록 이 책을
즐겁게 읽어 주시길.


2020년 11월, 히가시노 게이고

프롤로그

샤쿠하치(일본의 전통악기로, 대나무로 만든 수직형의 피리) 소리가흐르는 가운데 새카만 무대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중략). 하지만 이곳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 라스베이거스였다. - P7

남자는 다시 검 끝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무대 가장자리에서 새카만 복장의 3인조가 나타났다. 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닌자 복장이었다. 복면을 뒤집어써서 머리부터 얼굴까지 모두 가렸다. - P8

두 번째 기둥으로 다가간 남자는 이번에는 숨도 쉬지 않고검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절단된 기둥이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남자는 세 번째 기둥으로 달려갔다.
정적 속에서 남자는 검을 가로로 크게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멍석이 갈라지는 소리가 뒤섞여 장내에 울려 퍼졌다. 절단된 기둥 윗부분이 스르륵 기울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랫부분은 여전히 서 있었다. - P9

소복의 남자가 서서히 관객들 쪽을 돌아봤다. 팔을 더욱 활짝 벌리더니, 남자는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P10

1

모니터에 뜬 이미지를 본 순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둘이 찍은 사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찍었던 기억이 난다.
"이 사진은...... 빼야겠어." - P11

"네, 저희도 자주 그랬어요." 여자의 눈에 웃음기가 번졌다.
"옛날 생각나네요."
"그렇죠. 겐타 씨 때는 이런 거 없었어?"
겐타는 마요보다 일곱 살 많은 서른일곱이다.
"어땠더라.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리고 난 남학교였거든." - P12

남녀는 호텔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웨딩숍을 나섰다. 그뒷모습에는 행복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왜 그래?"
겐타가 물었다.
"아니・・・・・・ 방금 나간 사람, 배가 불러 있더라고."
"그랬어? 난 못봤네." - P13

"요즘은 저런 분들도 많나요?"
직원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1년에 몇 분은 계신 것 같아요."
"이제 혼전임신 같은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죠."
"글쎄요. 그렇지도 않아요. 역시 남들 눈을 의식하세요. 그래서 드레스를 고를 때, 잘 티가 나지 않게 이런저런 조언을 드리기도 하고요."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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