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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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사진을 보고 주로 인물들을 따라 그린다.

내 실력은 취미라고 얘기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사진을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은 내가 좋아서 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 사물들은 지속된다. 살아가는 것은 조금씩 퇴보하지만.(16쪽)

난 이 문장을 내 마음대로 해석했는데,

고인물은 썪게 마련이지만 구르는 돌에 이끼가 낄 새가 없다.

나는 조금씩 퇴보하더라도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을 택하겠다.

다시말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사르고 쇠퇴하는 것까지도 살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에 머무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가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기실 나의 그림 솜씨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 그림은 사실화라기 보다는 상상화에 가깝다.

하지만 사진처럼 찍는 그 순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면서 그림에 애정을 쏟는만큼 온기를 내 마음대로 가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은 빛과 그림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을 생략하거나 강조할 수도 있는 것이,

얼마든지 그리는 사람의 시점에서,

심지어 빛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대상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여러단계의 음영으로 가감할 수 있는 것이어서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이 책 '바다'를 읽었다.

250쪽 안팎의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이었지만, 이 책이 쉽지는 않았다.

글자들을 읽었다기 보다는 그림을 봤다고 해야할 정도로 회화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이다.

ㆍㆍㆍㆍㆍㆍ나는 햇빛이 쏟아지는 텅 빈 오후에 스테이션 로드를 따라 걸어갔다. 산 기슭과 맞닿은 해변은 쪽빛 아래 담황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바닷가에서는 모든 것이 수평선으로 납작해졌다. 세상은 땅과 하늘 사이에 눌린 긴 직선 몇 개로 줄어버렸다. 나는 빙 둘러서 시더스로 다가갔다. 어린 시절에는 어째서 내 관심을 끄는 새로운 것마다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것인지? 권위자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것이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알라진 것이 다른 형태로 돌아온 것이라던데. 유령이 된 것이라던데. 그러나 대답할 수 없는 그 많고 많은 것 가운데 이것은 가장 하찮은 것이다.(17쪽)

 

나는 애나에게 브랜디 잔을 주었다. 그녀는 잔을 쥐고 서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내 뒤의 창으로 들어온 빛이 그녀의 쇄골 옆에 걸린 안경의 렌즈 위에서 반짝여, 마치 또하나의 애나, 축소판 애나가 눈을 내리깔고 큰 애나의 턱밑에 바짝 붙어 서 있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27쪽)

아주 정교하게 묘사해내고 있는데, 직접 상황을 보고 글로 옮기는게 아니었다면 이런 문장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다.

 

맥스는 아내를 암으로 잃고 딸 클레어에게 '과거 속에 사시네요' 라는 말을 듣고도 그래, 그렇다 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미술사학자와 사진작가 부부의 대비를 통하여,

찬란하고도 처연한 생의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려고 했다는데,

그래서일까, 나도 그런걸 읽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책은 겉으로는 자기 계급에 대한 불만과 거기서 탈출하기 위한 욕망으로도 읽히지만,

이 책의 끝에 또 다른 반전이 도사리고 있는데, 내겐 그게 더 충격이었다.

일반적이고 구태의연하게 생각하다가, 그러면 그렇지, 뭐 별게 있겠어 했다가 허를 찔린 느낌이다.

 

번역도 한몫했다.

정영목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만 옮겨보자면,

의사의 이름은 토드였다. 이것은 여러 나라 말을 아는 사람의 운명에서 보자면 악취미의 농담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디애스De'Ath라는 이름도 있으니까. 중간에 예쁘장하게 대문자를 쓰고 귀신을 쫒는 아포스트로피까지 찍어놓았지만. 아무도 속이지 못한다.

**'토드(Todd)'는 독일어에서 죽음을 뜻하는 'Tod'와 철자가 비슷하다.(20쪽)

같은 것들이다.

디애스라고 할때는 '뭐지?' 했었는데,

아포스트로피(')를 빼고 이어서 발음해보니 Death(죽음)이다.

이런 번역은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이다.

 

언젠가 프랑스어로 엄마가 '메르'라는 얘기를 들은적 있다.

그런데 엄마 뿐 아니라 '바다'도 '메르'라고 해서 참 아름다운 발음이고 의미도 중의적이다 싶었었다.

 

이 책은 글쎄, 아름답다고 하지만 좀쓸쓸하고 우울함을 전하는 그런 철지난 바다 같은 소설이다.

그러고보면 삶이란 바닷가의 밀물과 썰물처럼 때론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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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2-11 22:22   좋아요 1 | URL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사르고 쇠퇴하는 것까지도 살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최근에 다시 읽은 <상실의 시대>에 말씀과 비슷한 문구가 있어서 적습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살짝 의미가 통하는 구석이 있는가요?^^;;

양철나무꾼 2016-12-12 11:44   좋아요 2 | URL
상실의 시대 속 좋은 문구를 일부러 찾아...이렇게 적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전 언제부턴가 산다는 건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시니컬 한듯 하지만, 겸허해지는덴 그만입니다~^^

2016-12-11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12-12 11:59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일곱권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라는 책과 더불어 어제가 리뷰 추첨 한권 이벤트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제가 리뷰대회라면 욕심 부리지 않았을텐데, 리뷰 추첨 이벤트라고 하여 부지런을 떨어봤습니다, ㅋ~.

전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 소설의 남주 맥스가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 아주 아름다웠을 것 같고,
그리고 그걸 정영목 님이 번역하신 덕분에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서,
나름 만족하며 읽었습니다~^^

2016-12-12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6-12-13 14:58   좋아요 2 | URL
버스 시간 맞게 타셨어요?^^

전 예전에 아는 출판사 사장님께 정영목 님에 대한 일화를 들었어요.
보통 물오를때 반짝이라는 생각에, 작업할게 들어오면 일단 받고 보자꾸나 할텐데,
그런데 이 분은 속도가 좀 늦더라도 완전 꼼꼼하게 작업을 하셔서, 이름이 났었대요.
요즘도 이 분의 작품들을 보면 다른 건 몰라도 바르고 성실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러고 보니, 바르고 성실하기로 치면...님도 둘째가라하면 서러울 것 같은데, ㅋ~.
그렇게 쌓아올린 신뢰는 쉽게 무너지지 않죠~^^

cyrus 2016-12-12 18:02   좋아요 1 | URL
리뷰 이벤트에 당첨되길 바랍니다. 저도 응모할려고 했었는데, 예전에 문학동네 출판사를 잘못 오해한 댓글을 써서 알라딘 계정을 쓴 직원에게 발각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포기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12-13 15:06   좋아요 2 | URL
당첨 됐으면 좋겠어요~^^
책이 상품인것 같던데, 좀 탐나더라구요~^^

그러게요, 알라딘 서재 이곳엔 그러고 보면 알게 모르게 출판 관계자들, 작가들이 많더라구요.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오해는 바로 잡으면 이해가 되는 거니까요.
문학동네 측에서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거예요, 분명~!

어쨌거나, 님처럼 좋은 글을 쓰시는 분이,
책을 사 읽어보고 싶게끔 리뷰를 쓰는 분이,
포기하셨다는 건...문학동네 입장에서는 큰 손실일거예요.
다음 번을 기약하시자구요~^^


cyrus 2016-12-13 17:04   좋아요 1 | URL
방에 더 이상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서 요즘은 적립금이나 상금을 주는 이벤트를 선호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6-12-13 17:29   좋아요 1 | URL
적립금도 좋지요,
상금은 받아봤는데, 제세 공과금 어쩌구 하는게 머리 뽀글거리더라구요~^^

저는 방이 아니고 집구석에 더이상 책을 보관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꾸준히 사들이는 걸 보면, 병이지 싶습니다~ㅠ.ㅠ
환자로 치면 중환자고, 병으로 치면 불치병이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