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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貪勝 -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이창호 지음 / 라이프맵 / 2011년 8월
평점 :
어렸을 적엔 남들을 위해 살았다고 할 정도로 타인들을 의식했다.
내 주변에 있거나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이나 친척들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그들에게 간택받고자 했고,
간택받지 못 하면 버림받는 거라 생각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한동안 이런 성향은 이어졌으나,
버림받는 것이 간택받는 것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 내 삶은 달라졌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걸 인식하게 된 이후에,
나로 인하여 타인이나 상대방이 좀 불편해질지라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는 주의로 바뀌었다.
나를 우선으로 놓는다고 하여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예는 거의 없었던 걸 보면,
내가 우려하는 만큼 '남들이 내 삶에, 내가 남들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산다고 하여,
자아를 회복하고 정체성을 갖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요즘들어 마저 깨닫는다.
어떻게 보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얘기인데,
자아 정체성이란 것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연민을 갖고 들여다보는게 아니라, 한걸음 떨어져 관조적으로 객관성을 유지할때 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프로 바둑 기사가 쓴 이런 종류의 책을 몇 권 읽었다.
더 잘 읽혔던 것도, 덜한 것도 있었다.
그동안은 유명세를 내세워 일반론적인 얘기를 하며 삶을 대충 훑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제 아무리 내로라하는 바둑기사여도 글솜씨는 별로인가 보다 자위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창호의 이 책은 약간 달랐는데,
아내가 바둑사이트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 것인지, 손종수 님이 정리를 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것과는 뭔가 다른 울림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책의 후반 무렵 등장하는 일본의 거장 '후지사와 슈코'의 메시지를 읽은 후에,
그동안의 것들과는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멋진 구절들이 넘쳐나는데, 그 중 내가 감동받은 부분을 옮겨보자면 이렇다.
ㆍㆍㆍㆍㆍㆍ지금대로라면 뭐랄까, '정감이 없는 바둑'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적다. 바둑은 승부를 내는 동시에 음악이나 회화와 같이 개성을 표현하는 엄연한 예술이다. 예술이라면 우리들이 보고 감동하는 그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차원의 세계가 무르녹아 있어야 되는 것이다. 오직 이기기 위한 승부에 앞서, 자기표현에 충실한 바둑을 항상 생각할 일이다.
이 군은 넘버원이기 때문에 이제 그러한 임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러한 감동을 주는 바둑은 어떻게 하면 둘 수 있게 되는가? 이것은 어려운 경지의 것이기는 하지만 바둑의 공부만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높이는 공부가 바탕을 이루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수업. 일본에는 미야모토무사시라는 검호가 있었다. 생애불패의 그였지만 검의 수업만으 한 것은 아니다. 좌선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교제를 넓히면서 인간을 높인 것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그림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 수작이다. 인간을 높이는 것으로써 검의 도를 깊이 연구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130쪽)
바둑을 스포츠로 볼 것이냐, 예술로 볼 것이냐, 를 놓고 시시비비가 있는 상황이고,
이건 삶을 경쟁적으로 사는 것과 예술적으로 사는 것 쯤으로 치환시켜 볼 수 있겠다.
그동안의 나는, 예술적이라고 하면 뭔가 꾸미고 치장하는 것 쯤으로 생각했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니, 비우고 줄여 단출해지는 것도, 예술이 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자존심을 높이고,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는 그것이,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포함되지만,
비우고 줄여 단출해져서,
텅비고 소박한 그 조용함에 집중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걸 깨닫았다.
내면의 목소리가 아예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그걸 책에선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 모든 '느림'은 절대적인 느림이 아니다. 빠르게, 좀더 빠르게 질주하는 현대생활의 모든 사고방식에 대한 상대적 느림이다. 상대적 느림은 '감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둑의 속도는 외형으로 드러나는 행마의 속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감춰진 인식의 속도, 판단의 속도
가 중요하다. 몸에 맞는 옷과 같은 것, 바로 적정의 속도가 핵심이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면 '균형'이다.(138쪽)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만이 곧 패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스로 교만한 줄 모르는 것이 자만의 포석이고, 아예 겸손한 척하는 것이 자만의 중반전이며, 심지어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만의 끝내기다. 그것이 내가 30년 가까이 반상을 마주하며 수없이 많은 실전에 임하면서 비로소 깨닫고,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다.(153쪽)
자기가 가보고 싶었던 길을 가겠다는 의미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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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이이지만,
삶의 축소판인 바둑판에서조차 이들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라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항상 전의를 강렬히 불태우고 있거나, 너무 소란스러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