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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 삶의 역풍도 나를 돕게 만드는 고전의 지혜
이상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9월
평점 :
그랬다.
옛 선인들이 너나 없이 읽은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동안 그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하니까 내 자신을 이해시킬 수 없었고,
그러니 아무리 잘 쓰인 주역서를 읽어도 책이 재미있을리 없었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이 운명이라는 것을 왜 점 따위에 의지해야 하느냐 하는 거였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생각하고,
차라리 내 자신에게, 내 자신의 가능성에 미래를 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였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상수 님, 이분께서 이 책에서 천기를 제대로 누설해 주셨다.
이 책은 그러니까 별 다섯개, 열개 따위로는 부족한 책인 것이다.
이분이 주역을 공부해온 과정은 주역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를 깨달아 오는 과정이었단다.
주역을 만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미래를 주도할 수 있는 덕과 지혜였지만,
그렇다면 왜 덕을 쌓고 지혜를 기르라는 책을 쓰지 않고, 점치는 책 '주역'을 편찬했을까?
그것은 부정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어차피 점을 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란다.
그럴바엔 애먼 거북을 죽이고 정인들을 괴롭히는 대신 '주역'에 담긴 덕과 지헤의 틀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을 했을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점의 형태를 띄었다 뿐이지,
주역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행이나 요행을 조장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들어있지 않다.
64가지 경우의 수가 나와 있는데, 이게 항상 좋은 얘기만은 아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탁상공론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하면 길할 것이다' 뒤에 숨은 얘기는, 그렇게 못했을때는 흉할 것이라는 경고가 숨어 있는 셈이지만,
그래도 저 짧은 구절을 읽고 안도하게 되는 것은,
길하면 더 없이 좋지만,
흉하더라도 그게 나혼자만 감당하는 흉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도 한번쯤은 흉함을 당했었다는 무언의 동료의식, 동료애,
내지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하나 임을 짐작할 수 있어서,
사람 사는 세상 다 그렇게 그렇게 '지지고 볶고' 임을 알 수 있어서,
안도하고 위안을 얻게 되는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흉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심기일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제시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인지, 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간단히 얘기했지만,
주역에서 유사한 맥락을 찾자면 '동인괘'라고 하여 네가지나 등장한단다.
* 피붙이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어려워질 것이다.
*문잒에 나서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교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후회할 일이 없을 것이다.
*벌판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형통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길함에서 흉함까지 낱낱의 상황을 하나하나 보여주는 것일까?
위에서 주역은 인간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고 했듯이,
어떤 실천이 길하고 흉한지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해서란다.
내가 이 책이 좋다고 설레발 치는 것은 이 같은 발상의 전환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발상의 전환만 보인다고 하여,
'내 인생은 나의 것'내지는 '냅둬, 이대로 살다죽게~(,.)' 이랬던 내가 이 책에 혹했을 리는 만무이다.
일단 이 사람이 인용한 '순자'를 나도 인용해 보겠다.
자기가 힘써야 할 일에 힘쓰고 씀씀이를 아끼면 하늘도 그를 가난하게 할 수 없고, 몸을 잘 돌보고 때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은 하늘도 그를 병이 나게 할 수 없으며, 길을 따라 오로지 한 마음으로 걸어가면 하늘도 그에게 재앙을 내릴 수 없다. 장마와 가뭄도 이런 사람은 굶주리게 할 수 없고, 모진 추위와 모진 더위도 이런 사람은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요괴 잡신도 이런 사람은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순자>의 <천론>
이상수 님은 글을 쓸 줄 아는 분이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다'라고 하지 않고,
'나의 운명을 경정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행동이다'라고 해서,
독자를 책에 적극적인 사유와 행동, 실천의 주체로 끌어들일 줄 안다.
암튼, 이책을 통하여 깨닫게 된 주역이란 이런 것이다.
점을 부정한다는 것, 미래는 점괘에 달려있는게 아니라는 것과,
점은 비록 한번 치는 것이 원칙이지만, 최고통치자가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다시 칠 수도 있었단다...
주역점이라는 것이 만방을 잠 재우고 포용하는 도구일 때는 원칙에서 벗어나 재차 점을 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길한 것과 흉한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주역' 책에는 실제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도 있는데,
땅 속에 산이 파묻혀 있는 <겸괘>라든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 있는 <태괘>같은 것들이다.
자연계라면 이 둘은 아무런 교감도 생기지 않는 불통이겠지만,
'주역'에서는 상징이기 때문에 이런 뒤죽박죽의 상황도 가능하고,
위에 있을것이 위에 있고 아래에 있을 것이 아래에 있다고 하여 길한 것도 아니고,
위와 아래가 뒤바뀌었다고 해서 흉한 것도 아니다.
미래가 상반상성과 물극필반의 동그라미 운동을 깨닫게 되면,
공짜로 길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무조건 흉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변화의 조짐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복을 짓고, 덕을 쌓는 '행함'으로 까지 이어져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끝으로 왕이라면 어떻게 점을 쳐야 하는지 <상서>에 중요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임금님께 큰 의문이 있거든 먼저 임금님의 마음에 물어보고, 귀족과 관리들에게 물어보고, 백성들에게 물어보고, 거북점과 시초첨에 물어보십시오...그렇게 해서
(1)임금님의 마음에 좋고, 거북점이 따르고 시초점이 따르며, 귀족과 관리들이 따르고, 백성들까지 따른다면 이를 일러 크게 하나됨(大同)이라고 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안락하고 자손들은 창성하게 되니, 길합니다.
- '상서'홍범'
라고 되어 있단다.
갑자기 그니는 어떨까 궁금해졌다.
수첩에게 물어보려나나?
그렇다면 수첩을 소셜 네트워크 기능이 빵빵하고 가벼워서 들고 다니기 쉬운 걸로 하나 선물해야 하려나?
그럴거 없다.
알라딘 램프의 지니를 선물하면 되겠다, 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