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다.
滿山紅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 산에 단풍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풍이 꼭 붉게 물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행잎은 노랗게, 느티나무는 갈색으로...물든다.
그래도 우리는 '온산에 울긋불긋 단풍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이걸 대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잘못 학습된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뿌리박힌 생각을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믿음이 너무 강하면 믿음의 원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그 믿음들이 뒤엉켜 고집이 된다.
이쯤되면, 나이들어 갖게 되는 '올곧음'은 '고집'으로 비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나보다...생각할 즈음,
이런 구절을 발견했었다.
신앙은 어리석을 수 있으나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고집'과 '신앙'의 공통점은 '올곧음'일까, 아님 '융통성 없음'일까?
어찌됐든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다.
부러지거나 꺾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낭패이다.
올 가을 마지막 단풍 구경이 될듯하여 주말에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 가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라 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겸사 겸사 다녀오면 좋을 듯 하다.
근데, 난 아무래도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 타입은 아닌듯,
'데이비드 호크니'관련 책으로 모자라서,
단풍도 '강판권'의 '나무열전'을 들추고 앉았다.
거기 '바람 타고 열매가 날아가는 단풍나무(楓)'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재밌다.
가을 단풍을 보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단풍을 노래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최신명(崔信明)도 「풍락오강냉(楓落吳江冷)」, 즉 '단풍이 찬 오강에 떨어지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세익은 이 시를 보고 명성이 높았던 최신명에게 실망했습니다. 정세익은 최신명의 시가 높은 명성과는 달리 보잘것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보는 바가 듣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고사성어 같은 일이 흔합니다. 단풍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가을에 유명한 곳을 찾아갑니다만, 실제 가보면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때론 단풍보다 사람만 구경하고 오지요. 그러니 멀리 가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단풍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죠.
('강판권'의 '나무열전'280쪽)
암튼, 가을 단풍을 봐서 였는지 어쨌는지...여기 시인이 아닌 시인이 한명 탄생했다, ㅋ~.
친구가 나에게 보내준 시인데(얼쑤~♬),
시어를 고른 품이나 생각의 깊이 따위,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단풍
붉을 단 丹, 단풍나무 풍 楓
단풍이라고 다 붉기야 하랴마는
오롯이 우듬지에 홍조띤 잎새 매달고
찬연한 햇살 누리는
가을 한낮
이 한 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그토록 사무치면
이렇게 붉어질 수도 있음을 끄덕이리라
소나무 숲
단풍이 아니올시다
제선충 먹어
제 몸 태운 병마조차도
겉보기엔 화르르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그리 보인다
가을이면 마지막 기운을
모두 모두어서
붉게 물들인 낙엽
가슴에 남기지 않고 뚝뚝 떨구는 우듬지 그 마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구나
다 벗어버리고도
너에게로 벋어있는 짧은 팔들로도
사랑을 보여줄 수 있구나
사랑은
단풍처럼.
사진의 단풍은 또 딴 친구에게서 업어 왔다, ㅋ~.
가을 단풍마저도 나 혼자의 힘으론 즐길 수 없는 것인가, 정녕~--;
손철주의 <사람보는 눈>이란 책이 나와주셨다.
당근 설레발을 치며 구입했으나, 11월5일 배송 예정이다.
내가 딴건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서도,
'사람보는 눈'은 '쫌' 있는것 같다.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어...
앉아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걸 보니,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