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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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이었다.

그전에 고된 육체노동을 해주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긴 한 상태였다.

아들이 침대에 누워 컴 모니터로 뭔가를 보고 있길래 잼나보여 꼽사리를 꼈다.

"뭔데~?"
"응당하라일구구칠"

"그게 뭔데?"
"장년에 인기짱였던 드라마 있어."

아들이 하는 말이 유음화되고 연음화 되어 들릴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어야 하는데,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너무 방심했다.

"근데 아들아, 쟤네들 분명 은지원이랑 서인국이랑 신봉선 같은데...

 저 사람들 왜 외국말 하고 있냐? 외국말은 언제 배워 저렇게 잘한대냐?"

울아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엄마, 고마워.

 엄마 칠순때는 해외 여행 멀리 갈거 없이, 부산으로 가면 되겠네.

 어차피 엄마한테는 외국이나 부산이나 꼭 같이 외국말로 들릴텐데,

 뭐 힘들여 돈들여 외국 갈거 있어?"

이러는 것이다.

 

헐~--;

같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사는데,

어쩜 사투리가 그렇게 진하냐?

근데 실은 사투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게 1997년의 상황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말 그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츄에이션 되시겠다.

 

울아들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자기의 지금 현실을 비관하며...

1997년의 고딩 현실을 엄청 부러워 했는데,

 

아들아, 미안하다.

198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닌 엄마로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란다.

그러니 그 사이에 시대가 살짝 진보와 퇴화와 진보를 거듭했거나,

아니면 부산과 서울의 현실이 달랐다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암튼, 불행이고도 다행인것은...지금 현재는 대한민국을 통틀어 어느곳에서도 그같은 고딩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겠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이 책은 고딩시절 똘똘 뭉쳐 5총사로 지내던 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무리에서 한명이 절교를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다자키 쓰쿠루'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외한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남, 여 쪽수도 맞고 각기 색채도 가지고 있으나 자신만 색채가 없어서 절교를 당한게 아닐까 하고 추측만 한다.

 

항상 사람은 저마다 다른 존재이고, 나의 가치관이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안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또 등장한다.

내가 이유도 모르고 절교를 당했더라면,

적어도 그 이유는 파헤쳐 보려고 할텐데,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고향 마을을 서둘러 떠나온다.

 

그리고 설정이겠지만, 친구가 이 넷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불가이다.

적어도 나고야 시골마을에서 도시의 대학을 갈 정도라면,

'~카더라'는 식의 풍문이라도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암튼, 자신만 색채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는 그 절교사건을 떨고 일어나지 못하고,

극단적인 자살까지도 생각하며 자꾸 안으로 움추러 든다.

건강이 악화되자, 회복할 방법으로 택한 운동인 수영 또한 내가 보기엔 침잠하려 드는 그것의 다름 아니다.

나고야 시절의 네 명만이 쓰쿠루에게 진정한 친구라 할만한 존재였다. 그다음으로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하이다가 거기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라고 하는걸 보면 말이다.

 

암튼 고등학교까지의 시기가 지식과 이론을 축적하는 시기라면,

그 이후는 이론과 지식을 토대로 경험과 견문을 넓히고 확장해 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암튼 대학에서 수영을 하면서 잠깐 만났던 하이다는 그의 아버지가 겪었다는 이상한 피아니스트 얘길 들려주는데,

여기서 '회색'과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綠)가 등장한다.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는 하이다의 아버지에게 '악마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데,

여기서'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던 '모든 진리는 회색이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 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이 문장이 그냥 떠올라주신것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난 그토록 기억력이 좋거나 연상작용이 뛰어나진 못해주시고,

이 책 바로 다음 읽은 '이권우'의 '여행자의 서재' 초입에 이런 문장이 나와 주신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난 회색을 흰색과 검정의 조합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어서,

회색의 대치선 상에 녹색을 놓을 생각을 하진 못했을 것이다.

 

책 제목의 '순례'는 '여행'쯤으로 대치될 수 있겠다.

이론과 지식을 토대로 경험과 견문을 확장시켜 나가는 그것을 누구는 '영원한 것'으로, 누구는 '생명의 나무'로 보았다.

 

회색의 대치선 상에 녹색을 놓고나니, 어려웠던 이 책이 조금 이해가 되었는데...

세상은 어쩜 선과 악, 증오, 밝음과 어두움 따위의 흑백논리로만 설명될 수 있는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백을 예로 들어보면,

기준을 무엇으로 잡느냐에 따라 좀더 흰색, 또는 좀더 어두운 색 따위의 희고 검은 정도가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 '색채가 없는'은 '투명한'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어 좀 모호하다.

차라리 '색채가 희미한'이라든지 '색채가 희박한'정도가 되어야 의미의 전달이 좀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투명한'이라는 말은 자기자신을 여과없이 걸러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중앙색을 두드러지게 해주는 배경색이라는 느낌으로 보아야 뜻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이건 바꾸어 말하면 '주인공'과 '지나가는 사람1,2'의 관계 같은건데...

하루키가 좀더 젊어서 썼더라면,

내가 좀 더 젊어서 읽었더라면,

이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이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의 나이를 지나,

그가 지났을 삶을 다 지나봤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지금 5총사로 지내던 다자키 쓰쿠르의 그 나이여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일 것이다.

 

이젠 주인공이 되는 삶도 멋지지만,
주인공이 돋보이기 위해선,두리뭉실하고 모호하고 희미한 배경들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건 윤곽을 잡아주는 '경계선'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아무리 지식이나 이론으로 중무장해서는 소용이 없다.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다.

"ㆍㆍㆍㆍㆍㆍ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어. 다만 한 가지 자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일단 그런 진실의 정경을 보게 되면,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무서우리만치 밋밋해 보인다는 거야. 그 정경에는 논리도 비논리도 없어. 선도 악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돼. 자네 자신도 융합의 일부가 되지. 자네는 육체라는 틀에서 벗어나 이른바 형이상학적 존재가 돼.ㆍㆍㆍㆍㆍㆍ"(111쪽)

 

쓰쿠루가 친구라 할 만한 상대는 없었다고 담담하게 얘기하자,

사라는 친구가 없어서 외롭지 않냐고 묻는다.

"어떨까? 모르겠어. 만일 있다해도 이런 거 저런 거 숨김없이 다 털어놓지 않을 것 같지만."

 사라는 웃었다. "여자한테는 그런 게 얼마쯤 필요한 거야. 물론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건 친구의 기능 중 일부일 뿐이어도."(265쪽)

나도 그동안,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거 저런 거 숨김없이 다 털어놓지 못하고...

외롭다, 외롭다...노래를 부르고 살았었다.

하지만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친구를 갖게 된 지금 '외롭다'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런 거 저런 거 다 털어놓는 것이 친구의 기능 중 일부여도 좋고, 전부여도 상관 없다.

그리고 그게 '친구'라는 호칭으로 불리워도 좋고, 다른 호칭으로 불리워도 좋고, 호칭이 없어도 상관없다.

암튼 사사롭고 소소한 것이라도 다 털어놓을 수 있고,

그게 꼭 즐거운 표정이 아니어도 진솔하고 풍부한  감정표현-다시말해 '활짝 열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인생이 있다. 쓰쿠루에게는 쓰쿠루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게는 좋아하는 상대와 좋아하는 곳으로 가서 좋아하는 일을 할 권리가 있다.

  사라가 그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굴 전체로 크게 웃었다. 그녀는 쓰쿠루와 같이 있을 때, 그렇게 활짝 열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 한번도 그녀가 쓰쿠루에게 보여 준 표정은 어떤 경우에도 늘 냉정하게 컨트롤되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쓰쿠루의 가슴을 아프고도 애절하게 찢어 놓았다.((288쪽)

 

난 어렵게 얘기했지만, 하루키는 쓰쿠루를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엇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지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363쪽)

 

암튼 그동안의 나는 하루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중ㆍ고딩시절 그의 소설 책 몇권을 읽고 난해하다고 생각했다.

나이들어서 읽는 하루키의 소설은 또 다른 맛을 가지고 있다.

약간 미스테리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해석 불가, 이해 불가한 부분이 아직도 있지만...

온 세계 사람들이 왜 하루키에 열광하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대하는지는 알것 같다.

아무런 내공이 없는데 그냥 얻게된 명성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눈높이를 좀 낮추었으면 좋겠다.

이 알듯말듯하고 그래서 쿨해보이는 것이 하루키의 매력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문학이라는 것은 보편적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쓰여져야 하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뭐, 다른 사람들은 다 이해했는데...나만 이해불가...미스테리 운운, 눈높이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암튼 이 책은 내게 하루키와 화해, 다시 그의 소설들 속으로 초대해준 계기가 된 작품이어서 오래 남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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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23 21:15   좋아요 0 | URL
'삐삐' 이야기를 쓴 린드그렌 님이 노벨문학상 받았는지 알 노릇이 없는데,
문학상을 받거나 말거나
즐겁게 읽으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 가슴에 남을 수 있으면
사랑스러우리라 느껴요.

세실 2013-10-24 10:10   좋아요 0 | URL
그나마 이 책은 하루키의 소설중 가장 읽기 쉬웠던 책이었어요.
에세이는 쉬운데 소설은 좀 난해하네요^^ 아직도 1Q84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