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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죄 ㅣ 밀리언셀러 클럽 12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8월
평점 :
난 그의 작품 중 '무덤으로 향하다'를 제일 먼저 읽었고,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었으며,
그리고 이 책 '아버지들의 죄'를 읽었고,
그 후 '죽음의 한가운데'를 읽을 예정이다.
이 책을 미룬 까닭은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매튜 스커터'가 너무 멋져서 그 느낌을 해치지 않고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였고,
이제 읽게 된 것은, '죽음의 한가운데'가 나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싶었기 때문이다.
근데 '800만가지 죽는 방법'의 그 '매튜 스커터'가 너무 강렬하였던 나로서는,
책을 좀 읽다가 어느 부분에 이르러 허를 찔린 듯, 다시 처음부터 되짚어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어설프게 초보 탐정 행세를 하는 것도,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심각한 알콜리즘인줄 뻔히 다 아는데도,
의뢰인을 앞에 두고 버번을 홀짝거리는 상황이 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이 책이 1976년에 쓰여진 '매튜 스커터'시리즈의 첫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작품 후 '죽음의 한가운데'가,
그 후 '800만가지 죽는 법'이 쓰여졌는데,
우리나라에선 완전 순서가 뒤죽박죽 번역되었으니...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건 어찌보면 당연지사다.
이렇게 오래 전에 쓰여져 순서가 뒤죽박죽인 작품이 나에게 감동을 고스란히 줄 수 있는 것을 보면,
작가 로렌스 블록이나, 역자 박산호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매튜 스커터가 짱 멋있거나,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능력이 탁월하거나 둘 중 하나인것 같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 '아버지들의 죄'를 두고,
이 땅의, 아니 우리나라의 보통 아버지들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았었다.
1976년의 상황을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의 연장 차원에서 생각했고,
그래서 일에 치여 처자식에게 관심 갖지 못하고,
감정 표현에 서툰 그것을 '죄'라고 얘기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래 구절을 읽다가,
그리고 이 책의 원서 제목이 fathers나, a father가 아닌,
'the sins of the fathers'에서 the fathers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책에서 얘기되고 있는 아버지는 그런 모든 아버지들 중 랜덤으로 추출해낸 그런 일반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아버지들을 지칭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구절에서 카인과 아벨로 대표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지만,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자식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카인과 아벨의 아버지는 아담인 것이다.
아담은 신으로 남아 영생할 수 있었는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내쫒기고 인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담은 구백 몇 살까지 살았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할까? 뉴욕에서는 하루에 네다섯 번씩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작년 여름, 지독히도 더웠던 한 주에는 무려 쉰세 명이 살해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 친지, 연인 들을 죽인다. 롱아일랜드에 사는 한 남자는 자식들에게 가라데 시범을 보여 준다고 하다가 두 살배기 딸을 때려 죽였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
카인은 자신이 아벨을 지켜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인가? 지켜 주든가 아니면 죽이든가?(12쪽)
난 아무래도 장르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이렇게 생각이 엉뚱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장르소설 중 드라큐라가 나오는 <렛 미 인> 따위를 읽다보면,
드라큐라마저도 영생이라는 것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선악과' 라는 용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선과 악의 구별이 없고,
잘, 잘못의 구별이 없고,
그리하여 죄를 짓지 않아 벌을 받을 필요가 없어서,
인간이 되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들의 세계라는 것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원래 논리대로라면, 선악이나 잘ㆍ잘못, 행ㆍ불행 따위가 존재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삶이 굴곡없고 그날이 그날 같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삶이 되어 재미없을 것 같다.
(게다가 신들의 세계에도 선악의 구별을 위하여 약간의 악이 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것 같기 때문이다.)
때문에 완벽하게 다 채워져 있어서 더 채워 가질게 결여된 신들의 세계보다는,
잘못을 하고,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그리하여 뉘우치고 나아질 수 있는 '인간'의 삶이 훨씬 맘에 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예로 들어보면,
그들은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온갖 악행을 일삼는데,
그리고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 싶은 상황에서도 죽지도 못하고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영원히 살아간다.
그렇게 보면, 지켜주는거나 죽이는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종의 필요악인것도 같다.
하지만, 이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걸 정당화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지켜주거나 죽이는걸 인간이 할 수 있는 필요악이기 때문에,
그게 인간의 과업이어서는 안되고 신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말이 오락가락, 이랬다 저랬다 이해불가라고?
"좀 전에는 웬디가 희생자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마녀처럼 말하잖아요."
"모든 사람에게는 양면성이 있습니다."(192쪽)
모든 사람에겐 양면성이 있다지 않나?
그리고 그 사람에 나도 포함됨은 물론이고 말이다, ㅋ~.
왜 이 성경구절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들은 자기 자식들로 인해 죽어서는 안 되며 자식들도 자기 아버지들로 인해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한다. (신명기 24:16)
너희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그 자식들에게 갚으신다" 하고 말하지만, 그런 말 말아라! 죄 지은 그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제 죄를 깨닫는다. (욥기 21:19)
구관이 명관이고,
형만한 아우 없다고 들 하는데,
그래도 난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 강하게 애착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