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
김도언 지음 / 이른아침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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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라는 제목을 보고 혹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와 여운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잘 웃지 않는 소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모습 말이다.

지금은 잘 웃는 청ㆍ장년이 되어있을 수도 있겠고,

여전히 잘 웃지 않는 청ㆍ장년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산술적인 통계치가 아니라, 한사람의 세월의 흔적을 엿보고 싶었나 보다.

 월요일, 컨디션이 지나치게 좋다. 이럴 때 오히려 조심해야 하는데, 친절하고 상냥한 것처럼 무서운 것도 없는 거다. 애들처럼 앙앙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어딜 가나 조숙하고 어른스럽다는 이야길 들으며 자랐다. 그런 소릴 듣는 비결은 간단하다. 웃지 않으니까 그런 말들을 하더라. 나는 정말 잘 웃지 않는 아이였고 소년이었다. 웃을 일이 좀체 없었던 거다. 나는 그래서 일찌감치, 행복하길 바라는 꿈이랑 꾸지 말고, 덜 불행하기만을 바라자, 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들의 행복을 빼앗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욕심도 없다. 그러니, 내 앞에선 그냥 마음 놓고 무장해제하시라. 긴장도 하지 마시라. 긴장은 내가 하겠다.(112쪽)

 

나는 또 다른 자칭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던 사람'을 안다.

항상 '웃는 돼지'과의 눈꼬리가 내려오고 입꼬리가 올라간 근간의 표정으로 미루어,

'잘 웃지 않는 소년'의 흔적을 읽을 수 없었는데...

언젠가 우연하게 엿본 그의 무장해제한 표정이란 것이,

돌아선 사람의 뒷모습처럼 쓸쓸한 그런 것이어서 놀라웠었다.

 

오늘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그 사람과 사석원의 '서울연가'를 놓고 얘기를 나눴다.

사석원의 호가 뭔지 아냐고 묻길래,

나는,

"몰라여, 날건달? 아님 한량인가?

 나, 요번 책 읽고 이 사람 좀 별로로 바뀌었음~--; "

하고 시큰둥하게 대구했다.

사석원이 누구인가?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좋아 죽겠다고 설레발이었기에, 그는 나의 이런 변화가 의외였나 보다.

"원래 이렇게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들은 잡다해서 농도랄까...그런게 없지.

 먼젓번 '꽃 먹는 당나귀' 참 멋졌는데..."

라며 애써 내게 호응을 구하려 들었다.

실은 난 요번 글의 농도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게 아니었다.

자신이 날건달이고 최고의 한량이고 최대의 수혜자이면서도,

자기가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왠지 밉상이었다.

괜히 주류이면서 아웃사이더인척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강남의 술집이나 딸내미의 옷가게 같은 얘기들은 설렁설렁 풀어놓는 것 같지만 일반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들이니 말이다.

그의 그림을 놓고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 입네, 어쩌네...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툴툴거리고 항변하던 사람들이 그가 아니고, 그의 주변 사람들라고 하니 망정이지 그였다면 좀 민망할 뻔 했다.

내가 여전히 시큰둥하자,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그 사람은 뭔가 아쉬운듯,

또는 사석원에 대한 그의 호의는 변할 수 없는 것인지 '화가는 그림으로 얘기해야지'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림으로써 화가의 시선을 사실인양 반영시킬 수 있고,

나는 보는 관점을 개입시킴으로써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해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 즉,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 진실의 어느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그림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얼마든지 진실을 반영시키지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또 다른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던 사람은 그제서야,

"누구나 폼 잡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속속들이 알고 나면 시들한게 사람이지...

 사람이 한 측면으로 판단하면 다른 면들은 실망 투성이..." 
이런 알쏭달쏭한 말을 건넨다.

 

 

서론이 길었다.

'김도언'의 이 책'나는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를 읽으면서 느낀 내 느낌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쯤되겠다.

작가는 글로 얘기해야 한다.

암, 그래야 하지. 그래야 하고 말고...

두말하면 잔소리지.

나는 그의 이 책을 통해서 글쓰는 사람들의 진실의 전부를 봤다고 감히 단언한다.

이만하면 됐다.

 

실은 나는 이 책의 김도언이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른바 뇌졸중으로 말을 잃었다는 소설가의 씁쓸한 뒷얘기(아니, 퇴락한 젊은 시절의 얘기라고 해야하나?)를 좀 알고 있는지라, 그의 이런 성찰이 와닿는건지도 모르겠다.

뇌졸중 때문에 말을 잃어버린 소설가의 우울에 대한 생각은 되도록 짧게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위대한 진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알겠지만 진화를 설명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드물다. 차라리 그것은 불가능하다.(78쪽)

그의 다음 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언젠가 읽었던 이정록 시인의 '편애'의 심정과도 일맥상통이다.

이러니 그에게서 '진실 또는 진심의 전부'를 봤다고 할 수밖에~--;

나의 경우, 타인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것이 언제인가부터 매우 불편해졌다. 호감의 표현이 어떤 관계의 신호 같은 게 되어 지극히 객관적이었던 감정 선에 변화를 일으킬까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부모와 형제 같은 육친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다만 관습으로서의 예의만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주의 깊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메마르고 무정한 사막주의자이며 권태주의자다. 이건 자랑도 아니고 다만 장애일 뿐. 기적적으로 전폭적인 대상이 나타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인가.(84쪽)

 

 ㆍㆍㆍㆍㆍㆍ가슴속에 피멍이 들었을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 방법을 모르기에, 수습은 영영 요원하다. 이 상처를 어쩔 것인가. 이런 사고를 당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훈련 받은 적 없기에 이 가족은 늘 아프다.ㆍㆍㆍㆍㆍㆍ나는 그녀가 믿는 신에게 단 한 번도 머리를 조아리며 갈구한 적이 없다. 잘나지도 않고, 따로 믿는 것도 없으면서 그랬다. 이것이 나의 우매함이며 나의 가련함이다.(119쪽)

그는 또,

플로베르의 대표작 <보바리 부인>에 대해, '여주인공의 눈동자 색깔이 작품 안에서 일치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작품을 비판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그러면서 줄리안 반즈는 말한다.

평론가가 여자 주인공의 눈동자 색깔이 다르다는 것을 찾아내느라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사이, 오히려 독자들은 작품에 더욱 즐겁게 몰입하면서 작품이 전해주는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작품과 새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조롱에 가두지 말고 공중에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그 생동하는 존재감의 비밀이 비로소 드러난다는 점에서.(86쪽)

이렇게 문장속의 오탈자를 잡아내느라고, 문학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빗대어 꼬집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러고 오탈자를 잡아내고 앉아있다.

왜냐고? 책을 통틀어 딱 하나여서 신기하여서..., ㅋ~.

 

우리는 내는(리) 비(80쪽)

 

암튼, 이 책이 좋았던 것은...

글쓰는 사람들이 글 외의 것들을 향하여 데면데면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고,

작가들은 어떤 고민과 고뇌를 가지고 사는지 엿볼 수 있었으며,

그들은 주변에 어떤 이들을 친구로 두고 사는지,

따위의 자잘한 호기심을 해갈할 수 있어서 였으나,

무엇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것인가 보다.

어이없게도 어떤 작가들은 적막을 빌리기도 한다. 그의 내부에서는 적막이 태어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적막을 어디선가 빌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가짜 적막이다. 그의 곁에는 사람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면서 그는 끝없이 외롭다고 하소연한다. 자신은 외롭고 고독한 존재라고 스스로 맹렬하게 주문을 건다. 그의 적막은 인사도 잘하고 사회성도 밝은 이상한 적막이다. <백치 아다다>의 소설가 계용묵이 죽었을 때 그의 빈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성격이 얼마나 까탈스러웠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자를 좋아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옆에 잘 가려고 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는 자.(228~229쪽)

아무리 '잘 웃지 않는 소년'이었다고 하더라도,

글 외의 것들을 향하여 데면데면한 면모를 보이더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흠뻑 애정해 줄 수 있겠다.

처음 소설을 쓸 때 원고지에 썼지. 좋아하는 펜으로 원고지에 정성껏 소설을 썼지. 문장을 만들고 고통과 쾌락을 얻었지. 원고지는 부드럽고 깊었지. 그런 시절이 있었지. 어떤 날은,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원고지를 찢고 다시 쓰기도 했지.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아니라 글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는 고집이 셌지. 그래서 아름답고 가난했지. 나는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 나는 헌책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너의 작은 목소리를 좋아했지. 나는 골목과 그늘이 좋았지. 하지만 그곳에 너를 초대하지는 않았지. 기적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멀리 도망쳤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노인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묘사했지. 그들의 근육 없는 걱정을 궁금해 했지. 낮에는 방에 엎드려 숨어 있곤 했지. 저녁에는 조금 움직이며 달을 바라보았지. 밤이 깊으면 소설을 썼지. 직업이 없었지. 애인도 없고 살의도 없고 금기도 없었지. 소설을 쓸 땐 착하지 않은 상상을 했지. 내가 사랑하는 악인들의 이름도 만들었지. 그들은 아무데서나 섹스하고 사람을 때렸지. 파란 하늘을 향해 던져진 돌의 곡선을 그려보기도 했지. 나는 원고지의 빈칸을 매우 사랑했지. 하지만 사실 그 사랑은 표현할 수 없는,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었지. 나는 그걸 너무 늦게 안 거지.(201쪽)

그럴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폼 잡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속속들이 알고 나면 시들한게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어느 한 측면으로 판단하게 되면, 다른 면들은 실망 투성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보여주지 않은 면까지 봤다고 해서 서운해한들 무슨 소용있겠으며,

그렇다고 두 눈 뜨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말이다.

日新又日新, 날마다 꾸준히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공부하는 자의 그것을 누가,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거창하게, 삶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예술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심지어는 신변잡기적인 이런 리뷰나 페이퍼 글들도 그렇고...

현실을 외면시키거나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가슴엔 땡큐 카드 같은 따뜻함으로,

누군가의 가슴엔 아련하고 그리운 시나 글 한 줄로,

그렇게 그렇게 위로와 위안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예술이나 문학에 문외한이어서, 작품성을 논할 수 없으니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의 글 한구절처럼,

'목요일엔 나무들이 일제히 합창을 하게 하고 수요일엔 기억 속에 물이 흐르게(138쪽)'하는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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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4-03 22:29   좋아요 1 | URL
플로베르의 통상관념사전을 보고있는데 플로베르가 나와서 그냥 반갑네요. 문학작품도 새처럼 조롱에 가두지 않아야하는군요. 사람도 그럴 것 같아요. 스스로 가두든 타의에 의해 가둬지든 진면목이 나오긴 어렵겠지요. 사월, 잘 보내고 계신거죠~~^^

하늘바람 2013-04-04 16:39   좋아요 1 | URL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맞아하며 눈깜박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