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비행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금정연의 서서비행(書書飛行)을 읽었다.

읽는 내내 '난 왜 리뷰를 쓰나?'내지는 '난 왜 페이퍼를 쓰나'하는 자문에 시달렸다.

왜냐하면 책 겉표지의 '생계 독서가 금정연 매문기'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난 서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서평자는 아니다.

내가 쓰는 글들이 '서평'이라는 대접을 받을 정도의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럼, 내가 쓰레기 같은 글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김경민이 쓴, '시 읽기 좋은 날'의 프롤로그를 인용해야 할 것 같다.

 

 

 

 시 읽기 좋은 날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2월

 

아홉 살 때 <플란다스의 개>를 읽은 후 한 동안 힘들었다. 이건 그 전에 읽었던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이야기, 혹은 예쁘고 착한 여자가 멋진 왕자와 결혼하는 따위의 해피엔딩 동화와는 뭔가 질적으로 다르게 느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플란다스의 개>는 나에게 최초의 문학적 정서체험을 선사했던 셈인데, 그 체험의 강렬함이 아홉 살꼬마가 감당하기에는 좀 컸다.

이 동화는 나에게 세상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걸, 문학은 그걸 감추지 않고 기어이 드러내기에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때때로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프다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또한 그 아픔엔 슬픔뿐 아니라 마약 같은 중독성과 모종의 희열과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도 함께 들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주었다(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것이고, 당시의 난 그저 네로와 파트라슈가 너무 불쌍해 마냥 눈물이 났다).

 

읽은 뒤에 밀려오는 감정의 압도성과 그 감정을 제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언어의 빈곤함 말고도 나를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그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었다. 아홉 살 아이의 눈치로도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너무 바빠 보였고, 내가 기대하는 만큼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감정의 공유와 좀 비슷하면서 다른 감정일 수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의 감동, 기억하거나 붙잡아두고 싶었던 순간의 느낌을...

읽는 순간 만큼 생생하게는 아니어도 가끔 되새기고 싶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억력이 감퇴해가자, 그걸 기록해보겠다고 시작하였다.

때문에, 책소개나 줄거리 따위 클릭질 한두번하는 수고로 알아낼 수 있는 걸 적는게 아니라,

감동이나 느낌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럼 알라딘 서재에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평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까?

전정기관과 반고리관쯤 되겠다.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을 쉬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곳이고,

같은 책을 읽고도 각자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도 이 곳이다.

이곳에서 난 사람사는 세상 지지고 볶고 다 똑같구나 하는 걸 느끼기도 하고,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살아가는 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기도 한다.

독선과 아집에 빠지거나,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이중적인 잣대가 되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서평자 대접을 받을 정도도 아니지만,

굳이 서평자로 불리우길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책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난 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직업이지만,

 직장이 출판사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보니...책이 얼마나 어렵게 만들어지는지 어렴풋이 안다.

 아니,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 오히려 잘 안다고 해야 하려나?)

그런 책들을 한마디 말로 쉽게 평가하는 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좋지않은 책을 그저 좋다고 하는 건 또 베어넘겨진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싶다.

 

이런 내가 금정연을 서평자로 '아흐~, 멋져.'하고 생각하게 된건,

'온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과,

'좋아하는 책에 사랑을 고백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책에 불평하기를 망설이지 않으며 쓸데없이 공정한 체하지 않는 것' 이란 내용을 볼드체로 돌출시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정연은 좋은 서평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다독이나 정독, 사람을 홀리는 글빨이나 말빨을 꼽지 않고...

정직함(자신의 판단과 감정에 정직할 것)을 꼽고 있는데, 나는 솔직함으로 바꾸어 말하고 싶다.

 

알라딘은 이익기업이고,

그런 알라딘으로부터 내가 블로그를 빌려쓰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책팔이 노릇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읽는 노력을 기울인 책에 대하여 '나쁜 말을 조심하는 것'이 알라딘서재를 빌려쓰는 대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금정연은 좋은 서평자라는 게 나의 견해이다.

금정연은 '좋은 '서평'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

그의 서평은 좋은 글이라는 논리도 성립할 수 있겠다.

 

그의 글은 좀 가벼운 듯 하지만, 폼 잡지않아서 좋다.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이 좀 대책 없는 듯 하지만,

그의 경험과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어서 좋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일갈하는,

 물론 그들 입장에서야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니 독서에 맞춤한 계절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건강한 영혼이라면 이런 날 방구석에 앉아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 법이다. 낮이면 문득 떠나고픈 마음을 주체할 길 없고, 밤이면 살갗을 스치는 선선한 바람에 술 생각 간절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세상엔 책보다 아름답고 또 즐거운 것들이 존재한다. 출판 관계자들이 독서의 계절이란 문구를 떠올린 것도 어느 나들이나 술자리에서였을 거라는데에 소주 두 병과 오뎅탕을 걸 수도 있다.(52~53쪽)

 

이프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독서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아름다운 문장도, 힘차거나 화려한 서사도, 유쾌한 말장난과 온갖 지식의 나열도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작은 개미 같은 활자들은 나의 시선을 벗어나 저마다의 세상으로, 아마도 건강할 그들만의 세상으로 유유히 걸아간다. 나는 그들의 생기를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나의 병약함에 신경 쓰지 않는다.

ㆍㆍㆍㆍㆍㆍ

 지난 주말 나는 내가 언제나 사랑하는 도시인 부산에 갔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집에 돌아왔고, 아팠다. 아무래도 아무 생각 없이 나이만 먹다 체해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더 아팠다.(75~76쪽)

 

이 책을 읽으면서 직ㆍ간접적으로 위안이 되었는데,

나의 책탑 행각과 관련하여 에코의,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정답!(24쪽)

이 그 하나이고,

그의 가벼움을 젊음의 그것이라 치부하고,

나의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대책 없는 짬뽕공 같은 행각과 감히 동격으로 놓는 것이 그 하나이다.

 

서평집을 읽는 이유는 이쯤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시평집, 내지는 시 해석집을 읽는 이유도 별다르지 않다.

'김경민'의 '시읽기 좋은 날'을 통하여, '이성복'의 '서해'를 처음 만났는데,

그니의 해석도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나중에 사별을 하고 쓴 시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뭐 어쩔 것인가?

내가 필 받았으면 그 뿐, 난 그 순간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싶을 따름이다.

 

      서   해

                                       -이 성 복 -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란 결국 어떤 공간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엇던 곳,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의미가 있었던 곳은 나에게도 특별한 곳이 된다. '서해'는 그런 곳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추억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말하고 있지 않으나, 어쨌든 서해는 특별한 곳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가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유를 밝혔는데 그 이유란 것이 사람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나의 진짜 속마음은 뭘까?

나는 당신이 너무나도 그립기에 지금 당신이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아프고, 영영 당신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무섭다. 나는 당신이 서해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찾아갔는데 만약 그곳에 당신이 없다면, 나는 당신의 부재를 실감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당신을 찾지 못한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당신이 그곳에 계시리라고 믿고 있는 편이 나에겐 더 위안이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나는 과잉된 슬픔을 표현하는 연기나 노래에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아직 그 슬픔에 공명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건만 먼저 대성통곡을 해버리면 당황스러워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교요한 눈빛 뒤에 숨겨진 '진펄' 같은 속마음을 엿보게 될때,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애써 누르고 나오는 담담한 목소리를 엿듣게 될 때, 어쩔 수 없이 내 마음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그래서 그런 걸까.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도리어 나는 '서해'에 가보고 싶어진다. 나만의 서해에. '여느 바다와 다를'바 없는 그곳에 말이다.

 

가을이다.

하늘은 높고 볕이 좋다.

인간이 아무리 책을 읽고 애를 쓰고 소리 높여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아 본댔자 하늘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금정연의 말을 이렇게 인용하여, 이런 말이 하고 싶다.

하늘이 높건 말건, 볕이 좋건 말건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책을 읽어야 할텐데~--;

 

책의 내용이나, 이 페이퍼랑은 전혀 상관없는...내가 요즘 푹 빠져있는 The one.

(짬뽕공 마인드를 십분 발휘하여,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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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20 15:21   좋아요 1 | URL
'서서비행' 책의 교정, 편집상태가 좋아...딴지를 걸자면,
102쪽의'미치오 카쿠'가 103쪽엔 '미치오 가쿠'가 되어 있다.
한쪽으로 통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책읽는나무 2012-09-20 18:21   좋아요 1 | URL
좋.다.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좋고,님이 이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작가도 좋고,
거기다 노래도 좋군요.
좋은 가을이에요.

프레이야 2012-09-21 09:14   좋아요 1 | URL
님, 아침부터 마음을 울리는 노래^^ 좋아요~~~
남자의 사랑은 뿌리 같아요. 여자의 사랑이 잎사귀 같다면요.
가을하늘 만끽하며 마음에 평화가 늘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님에게도 저에게도^^

서평이든 어떤 글이든 기본, 즉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말에 동감이에요.
문제는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너무 의식하다보면 좋은 글이 안 나올 우려가 많다는 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