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영민'은 사람들이 흔히'동무론'이라고 하는, '동무와 연인'이라는 책을 통하여  처음 만나게 되었었다.

그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겨레21'에 연재되었던 것을 한권으로 묶어 책으로 낸 것이라는데,

철학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는 품과 '수식어'라 불리우는 형용사나 부사의 사용을 남발하지 않아서 글이 소박하면서도 투박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었다.

 

 

 

 

 

 

 

 

 봄날은 간다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요번에 책을 내셨다는 걸 좀 지나서 알게 되었고,

그랬던 터라 책의 내용까지 찬찬히 들여다볼 생각은 못하고 일단 책을 구하고 봤다,'봄날은 간다'

어째 제목부터가 그동안 접해왔던 철학서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딱딱한 것보단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게 낫지, 뭐~...

이런 말로 내 자신을 위로하기엔 제목부터가 너무 신변잡기적이었다.

앞의 몇 장을 들추다가 문체가 너무 낯설어, 내가 아는 그 '김영민'이 맞나 책 겉장 앞날개의 프로필을 한참 들여다 봤다.

철학자가 '봄날' 운운하며 날씨나 자연을 들먹이는 것부터가 생경하기만 했는데,

내용이 신변잡기 위주인 걸로도 부족해서 길이까지 짧은 것들이 많아...

그런 길이의 글로는 철학자 아니라, 철학자 할아버지라도 생각을 논리정연하고 체계적으로 펼쳐나가기 힘들것 같았다.

과연 글들이 날 것은 아닌지, 풋내가 나는건 아닌지, 뜸이나 들었는지, 상상력이 이리저리 널뛰기를 하는건 아닌지, 지나친 생략으로 심한 비약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익기를 놔두었다가 물러버린건 아닌지, 나의 걱정이 기우가 되길 바랄 뿐이었지만 솔직히 그마저도 종 잡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수필집을 읽는 기분이었다.

어느 부분까지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누워 설렁설렁 넘기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았고,

두번, 세번 거푸 읽고는 '서문'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내 곁의, 치자꽃에 물드는 것은 운명이다. 그 운명을 값싼 낭만주의로 벗겨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허영이다. 그러므로 내 물듦을 가장 낮게 예찬하는 것은 (R.지라르의 말이 아니라도) 겸허한 개종이다. 오직 그 개종에서야 치자꽃의 진정한 향기는 다시 피어오른다!

 

 

 

나는 너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말보다 빠르게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 말은 다시 허영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음을, 오직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만이 유일한 개종이다.

 

내 선물은, 마치 내 편지처럼, 네게 너무 쉽게 전달되거나 영영 전달되지 않는다. 그 사이 선물은 온통 오해이거나 허영일 뿐이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방식 그 전체가 하나의 선물로서 (어느 순간, 휘영청!) 떠오를 때에만, 그 선물은 자신을 잊은 채 고스란히 네게 도착한다.                                                          ('치자꽃'  전문)

내가 두번, 세번 거푸 읽고 자세까지 고쳐 앉아 가며 다시 읽은 글은 '치자꽃'이다.

이 말은 곧 행동이나 실천이 동반되지 않은 말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고, 그걸 여기서 '허영'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너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말보다 빠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그럭저럭 너 없이 살아간다는 거다.

결국 빠다 발린 말(= 감언이설)이었고, 위 문단의 표현을 따르자면 '허영' 또는 '오해'이다.

행동이나 실천이 하나도 약속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저렇게 위험한 일인데,

그래도 한번쯤 감언이설을 꿈꾸는 걸 보니, 내 운명은 치자꽃에 물드는 것이든지 값싼 낭만주의 쯤은 두눈 질끈 감고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배포인가 보다~--;

 

3. 산책은 술보다는 차(茶)와 같아, 혼자 걷는 게 좋다. 물론 혼자 걸으면서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혼자 하는 생각은 대개 비생산적일 뿐 아니라 종종 자익적(自溺的)이다. '공부'하지 않는 이들에게 오히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산책의 요체는 오히려 생각과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거울의 바깥으로 몸을 끄-을-며 외출한다.

동무들과 나누는 산책의 기쁨도 결코 적지 않다. 하늘과 나무와 바람에다가, 다정하고 서늘한 대화까지 섞인다면 인생의 천국을 따로 구할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역시 요체는 중용인데, 말이 걸음을 죽여도 곤란하고, 걸음이 말을 놓쳐도 안 된다. 다변(多辯)인 자는 말수를 줄여야 하고, 눌변인 자는 걸음에 의지해서 입을 벌릴 수 있다.

  

3-1. 그러면 동무가 아니라, 연인과 산책할 수 있는가? 내 답변은 '노'(努)! 즉 그저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연인과 더불어 산책하기 어려운 것은, 우선 연정은 욕심이지만 산책은 의욕이기 때문이다. 양보, 눈치 보기, 그리고 들뜸은 모두 산책에는 치명적이고, 연정이란 무릇 의도의 옹두리에 얹혀 근근이 성립하는 것이니, 산책이라는 그 허소의 길과 어긋난다.                                     ('산책, 극히 실용적인 지침들' 중 부분)

그가 '봄날은 간다'며 우리에게 무덤덤하게 들려주고 있는 얘기는 언뜻 보기에는 붓 가는대로 쓰여진 신변잡기 위주의 글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런 글에서도 자연의 이치는 배어나오고 있다.

방심하고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극도로 절제된 문장을 만나게 되고...

거기서 인생과 인간이라 불리우는 것들의 존재의 의의를, 다시말해 자연의 이치를, 소위 '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흔히 철학자들이라고 하면, 어려운 철학사상이나 철학이론 들로 중무장한 사람들을 얘기하는 줄 알았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어여삐여겨서 쉬운 한글을 만들었다지만,

철학자는 어려운 철학사상이나 철학이론을 일부러 어려운 철학용어를 써서 구사하는 사람인줄 알았다.

원어로 된 철학 사상이나 사람이름을 따라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난,

철학용어를 쉬운 우리 말로 풀어쓰는 건 엄두 내기 힘들더라도,

예를 일상 생활에서 찾아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적당한 쉬운 말이 없다면 자연에서 일례를 찾아 연관시켜서 생활에서 터득하게 하려 노력한다.

일상에서 깨닫게 되고, 깨달은 연후에야 비워내게 되는 그런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일상, 자연과 철학을 연결하는 그 비워냄의 매개가 그에게는 걷기로 대표되는 '소풍'또는 '산책'이다.

 

ㆍㆍㆍㆍㆍㆍ

인문은 한 치 타인을 포섭하지 못한 채 제 그림자 주위를 실없이 돈다. 볼테르의 생각과는 다르게, 지식은 심오한 방식으로 도덕을 불러오지 못하며, 선의와 계몽은 심오한 방식으로 동무를 불러오지 못한다.

 

'동무'는 무엇보다도 그 '폐허'를 피하는 길이었지만, 적조했던 동무 셋을 만나 맥주를 마시는 오늘, 다시 동무보다 빨리 달리는 폐허의 속도를 무력하게 바라볼 뿐.                  ('동무'보다 빨리 달리는 '폐허' 중 부분)

 

계속 신변잡기 위주의 일상, 또는 자연만을 얘기하나 보다 했는데...어느 순간에 홀연히 본심을 드러낸다.

아무래도 그는 '인문'이 타인을 포섭하고 설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듯 하고,

스스로 눈높이를 낮추고 벽을 허물어 일상으로 대중 속으로 다가오려 한다.

그 일련의 노력 과정이 '산책'으로 나타난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눈높이를 낮추고 벽을 허무는 그 '비워냄'의 노력이 '산책'이 될 수 있는 연유이다.

 

그녀가 내 사랑을 증명하라고 하였다. 차가운 달을 보면서 먼 길을 홀로 걸었다. 길은 무서운 곳이다. 길 위에 놓인 몸이 먼저 알아채기 때문이다. 길의 기하학 위로 좌표 속의 사랑이 증명될수록 그녀는 점점 멀어진다. 식(蝕)이다! 증명하고 죽을 텐가? 아니면 길이 되시려는가?   ( '식(蝕), 혹은 사랑을 증명하지 않는 법(1)' 전문)

연정은 욕심이기 때문에, 연인과의 산책은 그저 '노력'하는 수 밖에 없다는데...

노력은 시간이 개입된 일이고, 연정이 그렇듯이 사랑도 몸이 먼저 알아채는 것이 인지상정인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랑을 증명하라는 그녀 너머로 차가운 달이 보인다.

왠지 모르게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생각나고,

'시간이 좀 먹느냐?' 던 말도 생각난다.

시간을 좀 먹듯, 차고 이우는 달을 바라보며 사랑을 증명하지 않는 것이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식(蝕), 혹은 사랑을 증명하지 않는 법(4)' 에서 시간의 벌레(蝕)와 함께 과거 속에 기억을 양도하거나, 부지런히 욕망하다가 벌레처럼 죽는 길...둘 중 하나라고 하였고 난 부지런히 욕망하는 '버러지(蝕) 과'인가 보다~--;

왜? 나의 사랑은 머리나 마음이 아닌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걸 보면 말이다.

적어도 나의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인가 보다.

 

암튼 나는 이 책의 저자 '김영민'의 가는 봄날을 스토킹 하였나 보다.

그는 오전 11시쯤 일어나 저녁 해질 무렵에 산책을 나갔다가 하루 일식을 한다.

일식의 반려로 차를 한다.

독신이다.

(여기서 독신은 제도로서의 혼인 여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일종의 장소이므로 장소를 대하는 방식에 의해 독신의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나는 나의 봄날이 가는 걸 아쉬워 하진 않는다.

다만 눈높이를 낮추고 벽을 허물고 비워내지 못한건,

그리하여 늘 욕심내고 더 많이 사랑하려 한건 후회하여야 한단다.

왜 증명하고 죽어야 하는가?

사랑하다가 죽는 방법도 있는데 말이다.

 

오랫만에 읽는동안 우아하게 말하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책이고,

솔직히 말하면 변덕이 죽끓듯하며 읽었던 책이다.

 

 

언젠가 썼던 '동무와 연인'의 리뷰도 있어서 옮겨 본다.

 

 

 

 

 

 

 

 

 동무와 연인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3월

 

류종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도록 그노력을 함께 하는 사람을 '동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의 제목 <동무와 연인>을 놓고 한참 생각을 했다.

 

'서문'의

'동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가능하지만, 오히려 타락했으므로, 닿을 수 없으므로 가능해진 사연들을 일컬어 연인이라고 부른다.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스승을 따를 수 없었던 경험처럼, 스승 혹은 그 지평으로서의 도움의 가능성을 증명해주는 세속의 덕으로 우리 모두는 친구를 구하고 연인을 사귀며 가족을 얻어 다시 세속에 보은한다.'

를 보고,

저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버린 나는...

뭘 이렇게 길고 구구절절히 얘기해 놓았나 싶었으나,

<한겨레21>에 한동안 실렸던 글들이어서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 책의 내용들을 요약해 보면,

  • 동지:이성적 일체감(말)
  • 친구:정서적 일체감(몸)
  • 동무:이성적 일체감 + 정서적일체감(말+몸)

동지나 친구라면 몰라도, 동무가 되기위해선 둘 중 어느 하나만을 갖곤 충족시킬 수가 없는데...

몸으로 맺어진다는 게, (어릴 적 부터 친구가 아니구선)...

동성 간이라면 좀 힘들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동성애자가 되니까.

→그래서 '동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라고 서문에서 얘기한다.

그리고, 이성의 경우는 연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 데...

영원을 맹세하지만, 영원한 경우는 거의 없는고로...결혼 후에 이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불륜'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가능하지만, 오직 타락했으므로, 닿을 수 없으므로 가능해지는 사연'이 되는 것 같다.

 

결국,저자는 문장화하지 못하지만,최선은 동무,차선은 연인이라는 얘기다.

 

이러면서 여러가지 관계설정이 나오는데...

일반적인 '이성관계'에서 여자들은 육체로만 승부하려 했기에 '연인'밖에 될 수 없었고,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경우

'보부아르가 두려워 한 여자는 육체로 승부하는 여자가 아니라,'지적반려의 자리'였다.'

에서 알 수 있듯이...

'몸으로 맺어진 관계'즉 성욕 이후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지적반려'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동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이책에서는,

<볼테르와 에밀리 샤틀레>의 경우도 동무의 범주에 집어넣었는데...그들의 말년을 제법 자세히 알고 있는 나로선 찬성하기 힘든 부분이다.

 

동성의 관계에서도,

<부처님과 가섭>의 염화시중의 미소나,

<유영모와 김흥호>의 관계처럼,

동성애가 아니고도 동무가 될 수 있었던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런 사제 관계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하기에,

'동무'에 다다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처럼 배신자가 될 수도 있다.

 

-무릇 아버지는 죽여야 하고,스승은 능가해야 제맛이다-

이걸 동무론 제1義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책이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것은, 동무와 연인의 구별과 나열에 끝나지 않고 이상향을 제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타성에 젖어,

'연인의 살이 고기肉로 느껴질 때에도 그 고기를 다시 살로 되돌리는 법은 오직 말 밖에 없다.'

라고 얘기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이 통하게 되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려 주고 하는 배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기다려 달라고 목놓아 부르짓는 김광석을 한번 떠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책을 읽은 느낌은...이정도로 정리하여야 하겠다.

'동무'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불가능함을 뛰어넘어 '동무'가 된 경우엔 박수를 쳐주어야 하지만,

그외 경우에는 그냥 적당히 몸과 마음을 보대끼며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자라는 지탄을 받을 것이다.

이 책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중 내가 좋아하는 바로 그 구절이 인용되고 있어 옮겨본다.

 

언어는 살갗이다.ㆍㆍㆍㆍㆍㆍ나는 그 사람(연인)을 이 말 속에 둘둘 말아, 어루만지며, 애무하며 이 만짐을 얘기하며, 우리 관계에 대한 논평을 지속하고자 온 힘을 소모한다.

 

 

 

 

 

 김광석 - 다시 부르기 1,2 [재발매] [2CD]
 김광석 노래 / 씨제이 이앤엠 (구 엠넷)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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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6-16 03:13   좋아요 0 | URL
사람 몸을 빌어 태어났을 때에는 즐겁게 살고,
몸이 기운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면 넋으로 예쁘게 사는 길도 있겠지요..

하늘바람 2012-06-17 10:49   좋아요 0 | URL
봄날은 간다 영화가 생각나네요.
그 영화 오래오래 기억에 남고 다시 봐도 마음에 여러가지가 남았는데
같은 제목으로 책이 나왔네요.
그러게요 이제 우리 봄은 아니죠
하지만 언제나 봄처럼 싱그럽게 살아요 님.

2012-06-20 23:46   좋아요 0 | URL
흠. 그러고보면 양철님은 어디서 이렇게 양질의 책들을 잘도 찾아내어 읽으시는지! 김영민님의 이 책, 예기치 않게 참 좋군요. 철학자의 수필인데, 여느 시보다 더 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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