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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사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12
이영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7월
평점 :
문태준은 '이영광'을 일컬어 '죽음을 흠향하는 시인'이라고 했단다.
그 정도로 죽음을 품고 있는 시인이라는 의미일텐데,
언제부턴가 그가 품고 있는 죽음이 삶의 저변으로서의 죽음, 삶의 밑거름으로서의 죽음으로 여겨져 좋았었다.
꽃이 진 자리에서 열매가 맺듯이,
죽음의 자리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곤 하니까 말이다.
나도 힘이 들때면 그렇게 이영광의 시집들을 읽으며 위로 받고 다시 일어서곤 했었다.
늘 위로받았다고는 하지만,
태양이나 공기 같아서 잊고 지내다가,
요번 시집을 통하여 각성하게 되었다.
시집은 원래 내달려 읽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라지만,
이 시집도 들인지는 쫌 되었지만,
시집을 들출때마다 베인듯 얽은듯 가슴 언저리가 쓰려와서,
한번에 다 읽어내지는 못했다.
지금 리뷰를 쓰고 있으나 오늘도 흡족하게 완독을 못할 수도 있겠다.
예민하고 까칠한 편이었던 나는 나이를 먹으며 제대로 무뎌지자고 작정을 한 경우인데,
상대방에게 다가갈 때 부딪히고 찌르지 않을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 무뎌지고 너그러워지자 했었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뾰족하게 벼려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징역 살고 싶다'는 말이 아프게 와닿았다.
무인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고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방심'이라는 시는 '방심'하고 있다가 '훅' 늘어오는 한방이 있었다.
방심
그는 평생 한 회사를 다녔고,
자식 셋을 길렀고
돈놀이를 했다
바람피우지 않았고
피워도 들키지 않았다
방심하지 않았다
아내 먼저 보내고 이태째
혼자 사는 칠십대다
낮술을 몇 번이나 나누었는데
뭐 하는 분이오, 묻는 늙은이다
치매는 문득 찾아왔고
자식들은 서서히 뜸해졌지만,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그는 이제 정말 방심하지 않는다
치매가 심해지고 정신이 돌아온다
입 벌리고 먼 하늘을 보며, 정신이
머리 아프게, 점점 정신 사납게,
돌아온다 그는 방심이 되지
않는다 현관에 나앉아 고개를 꼬고,
새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
먼 하늘에 꽂혀 있다
꽃 지자 잎 내미는 산벚나무 그늘 밑
후미진 꽃들에 들려있다
그는 자꾸 정신이 든다
평생의 방심이 무방비로 지워진다
한번 오면 안 가는 것이 있다
저녁엔 퇴근하는 내게 또 담배를 빌리며
어쩨 왔던 자식들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뭐 하는 분이오 침을 닦으며,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훅 들어왔던 구절은,
"새가 떠나면 구름이 다가올 뿐인/
먼 하늘에 꽂혀 있다/
꽃 지자 잎 내미는 산벚나무 그늘 밑/
후미진 꽃들에 들려있다"
는 구절이었다.
'마음1', '마음2'라는 시도 아팠다.
사실 내가 한쪽으로 접어 놓는 것들이 있는데,
세월호 관련한 것들이 그렇다.
일부러 못 본척, 못 들은척 무심해볼려고 해도 그건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부지불식간에 훅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고 그러다 보면 그 슬픔 속에 침잠해버려 빠져나올 수가 없다.
'사월'도 내겐 그렇게 읽혔고,
'평행우주의 그대'도 그렇게 읽혔으며,
'수학여행 다녀올게요'도 그렇게 읽혔다.
어쩜 이 시집 속의 모든 시들이 그렇게도 읽힐 수 있겠다.
'기다'와 '깁다'가 중의적으로 쓰인 '무릎'이라는 시도 좋았다.
무릎
무릎은 둥글고
다른 살로 기운 듯
누덕누덕하다
서기 전에 기었던 자국
서서 걸은 뒤에도 자꾸
꿇었던 자국
저렇게 아프게 부러지고도
저렇게 태연히 일어나 걷는다
좋은 시만을 골라서 옮긴다고 하는데,
적다보니 시집 한권을 통째로 옮기게 생겼다.
우리는 공감을 표현할 때 '알것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내가 상대방이 아닌데,
상대방의 맘 속을 들어가 본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 것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런 시 한 편, 시집 한권을 읽는 일은,
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흠뻑 담금질 하고 오는 것이라서,
공감 할 수 있겠고,
자연스레 내 마음에 빨간 약을 바르고 자체 치유할 수 있는 회복력을 준다.
그러고 보면 꼭 긍정 에너지 만이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고통과 슬픔도 밑바닥으로 침잠하려만 들지 않고,
한번씩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니까 말이다.
곁에 두고 한번씩 들춰볼 것 같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힘을 얻을 것 같다.
이 시집에서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다.
'끝없는 사람'이란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나가는 그런 사람을 일컬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