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열린책들 세계문학 87
카렌 블릭센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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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을때,

그곳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동명의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었다.

처음엔 멋진 음악과 풍광의 조화에 넋을 잃었지만,

미용사가 내 머리를 감겨줄 때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선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었는데,

그 장면이 야릇하게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풍광이 아름답긴 했지만,

난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라기 보다는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했었고,

책도 그러하리란 생각에 늘상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영화는 어떨지 몰라도, 이 책은 로맨스라고 하기 힘들다.

다큐멘터리 내지는 자서전 정도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큐멘터리라고 놓고 봤을때 이 책은 너무 덤덤하게 아름답다.

덤덤하다고 하여 무미건조하지는 않다.

어떤 부분은 묘사나 서술이 만연체로 흐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 그날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니고,

일종의 회고록으로 봐야할텐데,

이 정도의 만연체는 애교가 아닐까 싶다.

긴 호흡으로 내처 읽기보다는 중간중간 숨고르기 하며 읽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영화는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지긴 했지만,

그것 또한 억지스럽지 않았던게,

데니스의 죽음과 관련하여서 수선 부리지 않고 극도로 자제하여 적어내려 가고 있는데,

이런 생략이 웬만한 슬픔이나 죽음의 묘사보다 처연하고 눈물이 났다.

내겐 좀 비장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카렌은 뭐랄까,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어떤 남작과 결혼하고 케냐로 이주하여 커피농장을 꾸려가는 과정도 그렇고,

별거를 하게 되고 이혼을 하고,

혼자 힘으로 17년 간이나 잘 헤쳐나간다.

커피 농장이 망하고,

메뚜기 떼의 습격을 받고,

이런 일련의 상황을 겪으면서 고국으로 돌아가,

소설을 쓰고 작품 활동을 하다가,

77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강인하고 건강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고,

그런 그녀라면 충분히 천수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솔직히 책 날개에 나와있는 양력만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960년대 초반에 77세까지 살았다면 건강하게 살다 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에 껄끄러운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상이나 그녀가 처했던 위치 따위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커피농장을 하는 카렌은 원주민과 공생을 하며 살아간다.

정작 카렌은 차별을 않는 척, 공정한 척 하는데,

이 책의 번역만 놓고 봤을 때도 어디엔 하인, 어디엔 노예라고 되어 있다.

선민 의식을 가지고 베푼 것처럼 적고 있는데,

그녀의 입장에선 그랬을지라도,

원주민에게 일종의 힘이나 권력으로 군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인들의 휴식이나 휴가와 황소를 쉬지않고 혹사시키는 것에 대한 감정 이입으로 볼때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다.

그녀는 생각지 못했을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해도 결국엔 또 다른 방법으로 착취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 유쾌하지 않았다.

전쟁 중 다른 곳에 다녀온 하인에게도,

그 하인이 원하는 대로 나무를 돌보고 정원을 가꾸게 하지 않고,

요리사가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요리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구슬려 잡아놓는다.

 

원주민을 배려하고 진심으로 대했다고는 하는데,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었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도움이 되는 법을 잘 알았던 듯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왈칵 하였던 부분은 없다.

감정이 천천히 차올라, 어느 순간 고인 부분이 넘치듯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데,

백인이라면 편지에 예쁜 말을 써서 보내고 싶으면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80쪽)

이 부분에서 한번,

그리고 아내가 있는 남자가 또 다른 젊은 아내를 들였다가 독살 당한 후에 또 한번이었다.

인내심 많은 노예 마리암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었다.(269쪽)

에사는 숲의 큰 나무 아래 묻혔고 이슬람식으로 무덤에 벽을 둘렀다. 마리암모는 이제 전면에 나서서 밤공기 속에서 요란하게 곡을 했다.(271쪽)

 

일종의 춤판인, 은고마에 대한 이런 표현도 재미있다.

은고마에는 피리와 북뿐 아니라 소리꾼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소리꾼이 멀리서 초빙되어 오기도 했다. 소리꾼의 노래는 노래라기보다는 리듬감 있는 낭송에 가까웠다. 소리꾼은 즉흥 시인이었으며 기민하고 주의 깊은 춤꾼들과 더불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냈다. 밤공기 속에서 소리꾼의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고조되고 젊은 춤꾼들의 추임새가 규칙적으로 끼어드는 소리는 듣기에 좋았다. 그러나 이따금 흥을 돋우는 북소리와 함께 노래가 밤새 이어지면 그 소리는 지루할 정도로 단조로워 단 한 순간도 더 들을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그 소리가 멈추는 것 또한 견딜 수 없을 듯한 기이한 괴로움에 젖게 된다.(152쪽)

 

데니스에 관한 얘기는 의외로 무덤덤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런 구절을 읽다보면 이게 작가 카렌만의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데니스에게 말했다. 「자, 우리 쓸데없이 목숨 걸러 가요. 우리 목숨에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게 바로 우리 목숨이 지닌 가치니까요.」

 

이런 구절은 오히려 겸허했다.

나는 인간이나 자연력의 눈에 보이는 개입 없이 저절로 움직이는 물건에 대해 불신감과 수치심을 표현하지 않는 원주민 노인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의 마음은 마법에 대해 마치 보기 흉한 것을 대하듯 외면한다. 억지로 마법의 효과에 관심을 갖게 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건 마법의 내적인 작용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서 마녀에게서 가마솥으로 마법의 약을 제조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220쪽)

 

그 시대의 책은 어떤 존재였을지,

책에 대해 표현하는 이런 구절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책들을 싸서 상자에 넣고 그 상자들을 의자로도, 식탁으로도 사용했다. 책이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유럽에서 살 때와 아프리카에서 살 때가 다르다. 아프리카에서는 책이 삶의 한 부분 전체를 독차지하기에 문명화된 나라들에 있을 때보다 책의 질에 따라 느끼는 고마움이나 분노가 배가된다.(339쪽)

 

오래간만에 지루하고 심심한 책읽기였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지루하고 심심한 책읽기가 좋다.

책에 목적이나 물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냥 읽는다는 행위,

그런 행위가 주는 묘한 해방감이 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에만 '아프리카로부터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사는 세상 어느 곳이든, 지금 이 순간,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생성하기도, 또 멸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때론 자극적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지루하고 심심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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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19 17:45   좋아요 1 | URL
저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하면,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영화가 생각납니다. ^^:)

양철나무꾼 2018-07-19 17:51   좋아요 1 | URL
제가 장르소설은 즐겨읽는데, 로맨스 소설은 별로 잘 안 읽어요.
저도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영화로 보고 책으로 들였던거 같은데,
아직까지 못 읽었던 이유가 로맨스소설일까봐 였습니다.
책은 로맨스 소설이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 급이라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의 풍광은 상상할 수 있고,
아프리카의 문화와 생활상 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괜찮았습니다~^^

cyrus 2018-07-20 07:18   좋아요 0 | URL
한 달 전에 EBS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방영했어요. 심야 시간에 방영된 거라서 끝까지 다 보지 못했어요. ^^;;

양철나무꾼 2018-07-20 08:56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알았다면 다시 봤을 거예요.
책이랑은 별개로,
다시 보고싶은 영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