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Lonely Christmas & Happy New Year [2CD]
어른아이 외 노래 / 파스텔뮤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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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종합선물세트(과자)를 받아 본적이 있을 것이다. 네모넓찍한 상자 속에는 여러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다. 그 상자를 받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무엇을 먹을까, 이것 아니면 저것? 하면서 행복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종합선물세트에 들어있는 모든 과자가 맛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들어있기 때문에 마지 못해 먹는 경우가 있었으니깐. 

이번 파스텔 레이블이 준비한 이 앨범이 마치 그런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8개의 트랙으로 두 장의 CD로 구성된 크리스마스 특집 앨범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굳이 두 장의 CD로 만들 필요가 없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고, 이러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곡들을 빼버리고 한장에 넣는 것은 어땠을까. 가격도 좀 낮추고 말이다. (그렇다고 이 가격이 굉장히 비싸다는 말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외로운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를 위한 웰메이드 앨범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말로 웰메이드인지는 의문이다. 어젯밤 두 장의 앨범을 연달아 두 번 들었다. 첫 번째 앨범은 그나마 들어줄만했다. 하지만 두번째 앨범은 짜증이 밀려들어 왔다. 한 두 곡을 제외하곤 그다지 별로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궁금하다면 직접 들어보시라.)  

이 정도 수준의 앨범으로 외로운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를 과연 위로할 수 있을까?  따뜻하고 훈훈해야 할 빨간색의 크리스마스를 어설픈 회색빛으로 칠해놓으려 하는 시도가 웰메이드인지는 과연 의문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맘 때면 어김없이 수많은 캐롤들 혹은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앨범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다수의 앨범들은 올해가 지나면 쉽게 잊혀진다. 하지만 앨범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며 앨범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제발 그러길 바란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 웰메이드만을 표방하지 말고 정말로 괜찮은 정성어린 앨범을 만들어주면 좋지 않을까. 성탄절 분위기를 내고 있는 동물들이 한 가득 담겨 있는 앨범자켓을 보며, 역시나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따스한 온기의 사람이 아닌 동물이 최고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요건 살짝 무리수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이건 장난이자 역설이다)  

개인 앨범도 아니고 옴니버스 앨범에 좋은 노래와 정성스런 자켓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스텔 레이블을 좋아하는 팬으로써, 파스텔이라면 이정도는 해줘야 하는 기대를 갖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는 좀더 좋은 음악 들려 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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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Lonely Christmas & Happy New Year [2CD]
어른아이 외 노래 / 파스텔뮤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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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아직 예약이네요, 오늘 얼른 구입해야겠네요!! 기대 완전 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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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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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문학가이자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씨의 작품입니다. 이 책은 '우리는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고민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가길 원하는 구도자들을 위한 입문서'로 쓰여졌습니다. 그의 생(生)가운데 수많은 세월동안 자기자신과 지성만을 의지해온 그가 돌연 신앙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독자의 궁금증에 대한 이어령씨의 대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기독교-엄밀히 말해 개신교가 적합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기독교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에 저는 계속해서 기독교라는 표현을 쓰고자 합니다-의 세례를 받은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아직도 지성과 영성 사이의 어느 문지방 위에 있는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또한 그는 영성이란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라 이야기 하면서, 지성을 발판으로 하여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계기로 지성인이자 무신론자였던 저자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책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기 쉽지 않은데요.?
-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 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어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p.157

알다시피, 기독교는 사막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사막의 삶에서 갈증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혀가 돌처럼 굳어지는 격렬한 갈증을 겪어본 분은 없을 겁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갈증의 그 고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 물이 귀한 황무지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갈증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호수가 있고, 냇물이 있고, 냉장고 안의 페트병에 물이 넘치는 세상에서, 안 믿는 자에게 갈증을 이야기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갈증없이 이루어지는 기독교나 교회는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234 

 위의 내용을 통해 보면 자기절망과 갈증(영혼의 목마름)이 저자로 하여금 영성의 문지방을 밟도록 한듯 보입니다. 딸 민아의 실명위기 및 손자의 죽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겠지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그는 그저 조용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밖엔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안타까움과 애틋함, 또한 어쩌면 절망과 원망이 섞였을지 모르는 그의 기도는 인간으로써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종교적이거나 남을 의식하는 기도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도였을테니 말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자기절망과 영혼의 목마름만으로는 저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설명으로는 부족해보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인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사랑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바꿔놓습니다. 저자에게 있어서도 가족들 간의 사랑은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딸 민아 씨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저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저자를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물론 계기를 제공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아씨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다면 이미 저자는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었어야 할테니깐요!) 이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온전한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중략)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부릅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0대부터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것이지요. - p156부터

  앵프라맹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얇은 막. 비록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음에도 외롭운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외로움'이라고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존재론적 외로움이 우리내 삶과 영혼에 스며들때 말입니다. 저자처럼 글을 써야할까요. 글을 쓰는 것처럼 어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은 참 좋은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근본 원인인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존재론적 외로움이 진정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에 대해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마를 짚는 손. 인간은 절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찢거나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틈을 없앨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는 넘을 수 없던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국 저자가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대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존재론적 외로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않을까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들의 힘으로 영성의 문턱위에 도달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아무리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발전하고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일지라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많은 갈등가 오해가 발생하는 것처럼요. 분명 '우리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분-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당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경험해본적이 있습니까? 혹은 존재론적 외로움에 몸부림쳐 본적이 있나요? 아무리 노력해도 타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절망해본적 있습니까? 이러한 경험들은 직접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상상해보고 가늠해볼 수 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누군가로부터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많은 말을 들었다해도 그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물론 '의문을 갖는 것' 자체는 바람직합니다. 이미 영적인 경험을 해본 사람들도 의문을 가져볼만 합니다. 왜냐면 의문과 회의는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지성이 없는 믿음은 그저 맹신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곰곰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신학'이란 학문이 존재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때문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영성에 이르고 싶다면 너무 의문과 지식만을 앞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성에 이르는 그 길에는 저자의 말처럼 자기절망, 영혼의 목마름, 그리고 사랑이 있고 또한 이 모든 것 위에 '그분-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니깐요.  결론적으로 '믿음'이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영성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따져보고 검증하지 않고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깐 말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거쳐 이제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성과 영성사이의 어디쯤 와계신가요? 아직도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계신가요? 여기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이제 이 책과 함께 그 길을 찾아 떠나보지 않으실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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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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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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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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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지, 그건 사랑이었지..."

                                                     - 루시드폴 '그건 사랑이었지' 가사 中

 
한비야의 신간, '그건, 사랑이었네'를 읽다보니 문득 내가 좋아하는 루시드폴의 '그건 사랑이었지'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제목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내가 책을 읽고 느낀 느낌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조곤조곤하며 나지막한 루시드폴의 노래가 그 가사와는 상관없이 듣는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면, 이야기 하듯 쓰여진 비야 누나(?)의 책은 마치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서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비록 글-문자-을 통해 일방적으로 비야 누나(?)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것이지만, 나는 혼자 속으로 맞장구를 치기도하고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기도 하며 경청하듯하니 그럴싸하지 않은가? ^_^;

 책을 읽고난 지금,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부터 조금은 진중한 이야기까지 어려워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이 편히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굴뚝같다. 평소 말이 많은 편이 못되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누군가는 나에 대해서 전화기로 전화해서 이야기 하면 되지 뭘 망설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만나서 서로의 얼굴과 눈빛을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즐겁다고 생각한다. 또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과 치즈케익을 곁들일 수 있다면, 아! 
 
비야 누나를 실제로 만난다면 어떨까.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책에 나오듯 쩌렁쩌렁한 큰 목소리를 가지고 계시다고 하니 차분하고 작은 목소리를 가진 나는 애써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충분히 즐거울 거라고 생각한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와 이 책을 통해 이미 비야 누나에게 쏙 빠져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감이 있는 상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내겐 즐거운 일이니깐! 
 
비록 직접만나진 못해도 이렇게 책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즐겁다. 간접적이고 나만을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용기가 되는 말을 듣기도 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도전을 받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책에서 비야 누나는 내게 이런 저런 조언들을 해주셨다. 물론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밑줄 긋기 한 것이지만!
 
먼저 마음과 관련된 교훈들. 행복감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오늘 최근 어떤 감(感)에 빠져있는가? 혹은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했고, 감정 특히 내가 주로 갖고 있는 '화(火)'와 '분노'를 다스릴 방법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마음 속의 늑대와 양의 이야기를 통해 도출해낸 '좋은 마음에는 두 배로 먹이를 주고 나쁜 마음에는 절 반의 먹이를 주자'라는 교훈을 통해 내가 가진 성품을 어떻게 가꾸어 갈까 하는 고민에 대한 간결하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이런저런 교훈들. 몰랐던 아프리카의 여성할례문제의 심각함에 대해 알게 되었고, 배낭여행의 짐을 꾸리는 비유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어 많이 소유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것과는 같지 않을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신만의 길을 찾고자 하는 나에게 두가지 화두 1)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기질) 혹시 자신이 호랑이 인데 사막에 있다거나 또는 자신이 낙타인데 숲에 있지는 않는가?  2)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 를 던져 주기도 했다. 잊지말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해야 겠다. 그리고 내가 제일로 궁금해 하는 글 잘쓰는 비법들(다독-많이 읽기, 다작-많이 쓰기, 다상량-많이 생각하기, 다록-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많이 기록해놓기, 글로 쓴 뒤 말로 해보기 등)에 대해서도 일러주셨는데, 다작, 다록, 그리고 다상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반성해야겠다. 진정한 반성은 실천에 있는 것이니 결과로써 반성한 흔적이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글을 마무리 하면서 '그건, 사랑이었네?!' 라고 새삼 놀라본다. 앞서 초두에서 이야기 한 루시드폴의 '그건 사랑이었지'란 노래가 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사랑 표현이라면 비야 누나의 책 '그건, 사랑이었네'는 그녀 자신의 삶과 우리네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관한 메시지다. 이는 책제목을 통해 쉽게 짐작했듯이 그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문득 대문호(大文豪) 톨스토이의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오른다. 제목이자 책 전체에 걸쳐 던져지는 질문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톨스토이의 대답 역시 '사랑'이었다. 자기 자신과 타인, 각박한 세상임에도 훈훈한 온기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하나님)에 까지 이 모두에 대한 '사랑'이 그녀를 살아가게 했듯 또한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이 아닐까. 그래, 그건 사랑이었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질투나 시기와 같은 것들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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