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에서 영성으로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으로서 살아온 문학가이자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씨의 작품입니다. 이 책은 '우리는 왜 신앙을 가져야 하는가 고민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 옮겨가길 원하는 구도자들을 위한 입문서'로 쓰여졌습니다. 그의 생(生)가운데 수많은 세월동안 자기자신과 지성만을 의지해온 그가 돌연 신앙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독자의 궁금증에 대한 이어령씨의 대답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기독교-엄밀히 말해 개신교가 적합하겠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를 기독교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에 저는 계속해서 기독교라는 표현을 쓰고자 합니다-의 세례를 받은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아직도 지성과 영성 사이의 어느 문지방 위에 있는 것만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또한 그는 영성이란 지성을 초월하는 것이라 이야기 하면서, 지성을 발판으로 하여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계기로 지성인이자 무신론자였던 저자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일까요. 책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기 쉽지 않은데요.?
-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듭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이 땅에는 빛뿐 아니라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영어어 '플런지(Plung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팍 던져 넣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입니다. - p.157

알다시피, 기독교는 사막의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입니다. 사막의 삶에서 갈증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혀가 돌처럼 굳어지는 격렬한 갈증을 겪어본 분은 없을 겁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갈증의 그 고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 물이 귀한 황무지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갈증의 뜻을 잘 알지 못합니다. 호수가 있고, 냇물이 있고, 냉장고 안의 페트병에 물이 넘치는 세상에서, 안 믿는 자에게 갈증을 이야기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갈증없이 이루어지는 기독교나 교회는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 p. 234 

 위의 내용을 통해 보면 자기절망과 갈증(영혼의 목마름)이 저자로 하여금 영성의 문지방을 밟도록 한듯 보입니다. 딸 민아의 실명위기 및 손자의 죽음.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 그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겠지요. 인간의 유한함을 깨달은 그는 그저 조용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밖엔 없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안타까움과 애틋함, 또한 어쩌면 절망과 원망이 섞였을지 모르는 그의 기도는 인간으로써 드릴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기도가 아니었을까요. 종교적이거나 남을 의식하는 기도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도였을테니 말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자기절망과 영혼의 목마름만으로는 저자가 믿음을 가지게 된 설명으로는 부족해보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인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간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바꿔놓기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사랑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바꿔놓습니다. 저자에게 있어서도 가족들 간의 사랑은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딸 민아 씨의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저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몰라도 저자를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인도하지는 못했습니다.(물론 계기를 제공하긴 했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아씨의 사랑만으로 충분했다면 이미 저자는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었어야 할테니깐요!) 이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온전한 사랑을 방해하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사랑을 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삶은 주고 받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고받는 그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아무리 다가서도 얇은 빈틈이 생깁니다. 전위적인 화가 마르셀 뒤샹은 그것을 '앵프라맹스inframince'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꾸며낸 말이지요. (중략)

사람들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거나 합니다. 나는 타자와 늘 하나가 되고 싶어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고 끌어안습니다. 그럴수록 어쩔 수 없이 너와 나를 가로막고 있는 틈새를 발견하고 안타까워하지요. 애타는 절망이 또다시 남에게 다가서려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부르고 정이라고도 부르고 그리움이라고도 부릅니다. 보이고 잡히는데도 아주 얇은 앵프라맹스가 그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찢을 수도 녹일 수도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외로움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20대부터 돈이나 가난, 또는 권력, 전쟁에서 비롯된 소유의 결핍보다도 생명의 결핍, 존재의 결여에 대한 그 틈을 메우기 위해서 글을 썼던것이지요. - p156부터

  앵프라맹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얇은 막. 비록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받음에도 외롭운 까닭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이를 '존재론적 외로움'이라고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요. 존재론적 외로움이 우리내 삶과 영혼에 스며들때 말입니다. 저자처럼 글을 써야할까요. 글을 쓰는 것처럼 어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은 참 좋은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근본 원인인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존재론적 외로움이 진정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저자는 이에 대해 자신이 찾아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마를 짚는 손. 인간은 절대로 그 사이에 존재하는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찢거나 넘어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틈을 없앨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의 힘이요 영성의 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는 넘을 수 없던 앵프라맹스의 얇은 막을 없앨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국 저자가 영성의 문지방 위로 온전히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대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존재론적 외로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않을까 고민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들의 힘으로 영성의 문턱위에 도달 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령 아무리 커뮤니케이션 기법이 발전하고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일지라도 사람과 사람사이에 많은 갈등가 오해가 발생하는 것처럼요. 분명 '우리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성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분-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당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경험해본적이 있습니까? 혹은 존재론적 외로움에 몸부림쳐 본적이 있나요? 아무리 노력해도 타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절망해본적 있습니까? 이러한 경험들은 직접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상상해보고 가늠해볼 수 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누군가로부터 이렇더라 저렇더라 하는 많은 말을 들었다해도 그 자신이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물론 '의문을 갖는 것' 자체는 바람직합니다. 이미 영적인 경험을 해본 사람들도 의문을 가져볼만 합니다. 왜냐면 의문과 회의는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지성이 없는 믿음은 그저 맹신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곰곰히 따져보아야 합니다. (참고로 '신학'이란 학문이 존재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때문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영성에 이르고 싶다면 너무 의문과 지식만을 앞세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성에 이르는 그 길에는 저자의 말처럼 자기절망, 영혼의 목마름, 그리고 사랑이 있고 또한 이 모든 것 위에 '그분-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니깐요.  결론적으로 '믿음'이 영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영성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따져보고 검증하지 않고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결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으니깐 말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거쳐 이제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성과 영성사이의 어디쯤 와계신가요? 아직도 갈길을 모르고 방황하고 계신가요? 여기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이제 이 책과 함께 그 길을 찾아 떠나보지 않으실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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