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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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1960년 4.19혁명에서부터 1980년 5.18 광주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미래의 후손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바쳐 피흘렸던 수많은 분들의 피값 위에 놓여져 있다.

 

지금까지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MB정부까지 단 3번,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민주권과 헌법에 의해서가 아닌 

정권을 잡은 권력자의 선의에 크게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속에 있었다.

그러하였기에 앞에서 말했든 우리의 앞선 세대들은 민주주의라는 값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들을 후불할 수 밖엔 없었다.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항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고

②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란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 과연 대한민국 헌법이 지켜지고 있는가? 

 

헌법 제1조는 존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당위를 선언한 것일 뿐이다.

이 당위를 존재로 전환하는 주체는 국민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온전한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이를 위해서 우리의 많은 앞선 세대들이 그에 합당한 비용을 후불해주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

그 속에서 민주주의는 또다시 위태로워지고 만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헌법에 쓰여져 있다고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국민인 우리가 가진 주권의식과 그것의 발현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무관심을 질책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우리가 가진 의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또한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애써 싸워서 쟁취된 것임을 거듭 말한다.

 

우리의 관심과 행동,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무관심과 방관만큼 나쁜 것도 없다.

 

하루 하루를 살면서 교통신호를 잘지키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만이

준법정신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에 명시된 우리의 기본권과 권리를 명확히 알고,

우리가 맡긴 주권을 대리하여 행사하는 국회의원과 정당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옳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한다.

이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이 글을 쓰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선의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즉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켜내고 가꾸어야 한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이상 당위로만 존재하지 않고

실재로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꿈꾼다.

우리나라에 온전한 민주주의가 발현되는 그날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나와 우리에게 달려있다.

가슴가득 책임감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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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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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얇은 책에는 단편적 지식과 논리적 수사가 아니라, 인생이 그녀에게 허락한 삶에서의 치열함과 고뇌가 담겨져 있었다. 
 

25살의 김예슬 씨,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그녀의 말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고, 근본원인들을 생각해냈으며 해결책을 고민했다. 비록 아직은 그 해결책이 보이지 않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분명 그 답을 얻을거라고 나는 믿는다.

 

Input과 Output

나는 수많은 지식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지만, 그것이 내 삶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무수히 많은 지식과 정보의 Input 속에서, 나는 그것의 얼마만큼을 내 삶으로 Output하고 있었던 걸까. 내 삶이 단조롭고 지루했던 것은, 20대의 젊은이가 가져야 할 열정과 패기를 잃어갔던 것은 '삶'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들 그리고 여러 저서들을 통해 배운 것들이 내 삶으로 나오기엔 버거웠던 것일까. 떠밀려가듯 살아온 25년의 인생가운데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나는 두려웠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 같았다. 대학생활이 끝나간다. 복학하면 바로 끝이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도중에 멈춰서야했다. 그것이 경쟁자들에게 비록 시간낭비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허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항상 나는 현실과 미래를 저울질 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그저 내 자신의 꿈과 의지보다 부모님의 의지와 다른 누군가의 의지를 따르며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그래! 지금의 내가 이모양 이꼴인 것은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주도성' 말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주어진 것들을 암기하고 주어진 모범답안을 배껴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머리가 좋았던 것도, 특별히 노력을 많이했던 것도 아니었으니(내가 가진 상황적 한계가 있다고 해도!) 이모양 이꼴이 아닌가.

 

캥거루족

나는 무엇을 스스로 해왔던 것일까. 여전히 부모님 품안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저 공부를 조금 잘했다는 이유로, 몸이 남들과 달리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무능력하게 책만 들여다 본 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누군가를 탓해서는 쓰겠는가. 몸으로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 책임이다. 비록 운동신경이 남들에 비해 많이 둔했다해도 말이다.

스스로 땀흘려 돈을 벌어본적이 있었던가. 홀로 무언가를 이뤄본적이 있었던가. 그저 생각과 몽상속에 자기만족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부모님이 피땀흘려 버신 돈으로 음악CD를 사모으고,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올줄 몰랐던 것도 사실 아니었던가.

 

지식정보화 사회

사회는 많이 변했다. 그것도 급속도로 말이다. 정보혁명이 우리 삶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먼저 삶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지구반대편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곳으로 가볼 수도 있다. 놀라운 일이다. 또한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비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 더이상 정보는 가진자의 것만은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정보보다 이를 가공한 지식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지식은 자본, 토지, 노동에 이어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었다. 사실 지식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허나 자본, 토지, 노동과 같은 생산요소와 결합될 때 엄청난 부가가치를 가져올 수 있다. 바야흐로 현대사회는 지식을 빼놓고서는 아무것도 이야기 할 수 없는 시대이다.

 

지독한 전문화

지식사회는 전문가들의 사회이다. 전문가라는 개념은 사실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예전에 있었던 장인들이나 학자들을 생각해보면 생소한 개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장인과 학자에 비해 좀더 친근해진것같다. 전문가, 전문가란 무언가에 탁월한 사람이며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분야에 있어서 전문화 되어있다. 이러한 전문화를 통해 전문지식을 가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을 전문가들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성이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들이 분명있다. 예를들어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의료행위에 있어서는 전문화된 의사의 손길이 필요하다. 허나 모든 것에서 전문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의 추세는 모든 것들에 전문가를 양성하려는 것처럼보인다. 자격증을 떠올려보자. 별별 자격증이 다있다. 요리에서부터 종이접기같은 것들도 있고. 나는 지독한 전문화라고 말하고 싶다. 나 스스로 행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음에도 괜히 전문가의 의견이나 도움이 필요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런지...

 

무기력해진 부모세대

자급자족의 시대는 갔다. 스스로 얻는 것만으로는 인간답게 살기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결정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뿐이겠는가 효율성의 문제도 있다. 

자급자족의 시대였다면 지금쯤 나는 부모님이 하시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며, 아마 농사를 짓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자급자족의 시대는 지나가고 돈이라는 세련된 도구로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는 시대. 더나아가 앞에서 말했었듯 이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지식이 중요해졌다. 이러한 변화속에 우리의 부모세대는 무기력해졌다. 그것은 그분들이 못나서가 아니다. 시대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더이상 부모세대는 우리에게 먹고사는 법을 가르쳐줄 수 없게 되었다.

 

교육

나는 학교를 다닌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고등학교의 12년에 이어 대학교까지 학교를 다녔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 시대가 변했고 지식이 주요한 생산수단이 된 지금, 이러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참 지겹게도 학교를 다니는 구나.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들었고.

 

배움이 사라진 대학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IMF라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 들었다. 그당시에 IMF란 말은 TV를 통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당시에 있었던 외환위기는 국가 경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기업은 줄도산하고, 대기업들도 망하는 시기였으니 작은 기업들은 말해 무엇할까. 경기가 나빠지면서 실업자는 늘어나고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대학교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일단 대학생들이 취직이 안되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은 예전에 비해 취직이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니 취업을 위해서는 경쟁을 해야했다. 그것도 더욱 치열한 경쟁을 말이다. 대학교에 처음부터 배움이 없었을리 없다. 그냥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배움과 치열한 고민들이 사라져 갔을 뿐이다. 내 자신을 평가해보는 유용한 척도인 학점이 취업을 위해서는 꼭 맞춰야하는 기본스펙으로 바뀌어 갔을 뿐이다. 굳이 더 많이 전공학문에 대해 공부하기 보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것들을 학습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회가 먼저 바뀌었고 대학생이 덩달아 바뀌어 가고 따라서 대학이 바뀌어졌다. 대학은 취업전문학교가 되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김예슬 선언에 큰 몫을 하게 된 것이다.   

 
 2010년, 그리고 나는.

나는 농땡이 대학생이었을 뿐이다. 동아리를 한답시고 공부에는 소홀했던, 놀기 좋아했던 철없는 젊은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공익으로 군생활을 하고있고, 취업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학점에는 자유롭기에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나이 25살에 처음으로 용돈없이 생활을 해보고 있고, 2년이란 긴시간동안 한곳에서 일을하고도 있다. 덩달아 그곳에서 조금씩 몸을 쓰는 일을 배우고 있기도 하다. 이런 내 자신이니, 김예슬씨가 참으로 부러울 수 밖엔. 같은 나이의 한 아이가 있는데 나는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고 있으니 내 자신이 부끄러울 수 밖엔.  참, 몸쓰는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아무래도 나는 몸쓰면서 먹고 살기는 힘겨울 것 같다. 어리버리하기 때문일려나. 따라서 머리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고민이 더 많아진다. 아직도 내가 뭘 잘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놓고 있긴 하지만, 참으로 변덕스러운 내가 언제 그것을 바꿀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번에 나도 김예슬씨처럼 살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오해하지는 마시라, 전역하자 마자 대학을 때려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는 남이 한번 했던 일을 똑같이 따라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나답지 않기에. 따라서 나는 요걸 해볼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을 위해 직접 나의 '삶'으로 살아보는 것 말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내 삶을 통해 담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을 지금 이 나이에 시작해보련다. 더불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녀에겐 있었던 공동체인 대학생나눔문화와 같은 공동체를 나도 속해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책을 덮고나서 생각컨데 그녀는 혼자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을 그만둔다는 선택은 결국 그녀 스스로가 내린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는 공동체가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대학생나눔문화라는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갑자기 이 말이 떠오른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란 말이. 지금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그리고 그 꿈은 과연 우리가 꾸는 꿈과 얼마나 일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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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는 일 깔끔하게 해치우기 - KI 신서 418
데이비드 알렌 지음, 공병호 옮김 / 21세기북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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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D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지난 4월달 쯤이었을 것이다.

FS(프랭클린 플래너 시스템)을 8년가량 사용하고 있었지만, 잘 사용하다가도 매번 매너리즘에 빠져버리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드디어 나는 새로운 방법론을 찾게 되었다. 
 
그무렵 우연히 알게된 GTD는 나에게 있어서 획기적이었다.

먼저 FS와는 접근방식이 완전 달랐다. GTD는 Top-down방식의 FS와는 달리 Bottom-up방식이다. 내가 기존에 써오던 FS는 항상 Big Rocks을 강조하며 수많은 사건들(events) 중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가장 먼저 실행하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일상가운데서 발생되는 수많은 사건들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평범한 잡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GTD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수많은 사건들중에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수집하여 수집함에 넣고, 단지 한번에 하나씩 해결해 나가라고 말이다. 물론 내가 처한 상황과 시간을 고려해서 말이다. 얼마나 편한지! 예전의 나는 FS를 사용하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A,B,C와 1,2,3 같은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이 참으로 번거러웠었다. 그래서 한 때는 해야할 일 리스트만을 FS에 기록해놓고 쓰기도 했었으나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건데 이것은 FS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내게 벌어지는 일들과 내가 해야할 일의 속성 때문에 잘 맞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FS는 나같이 일상의 평범한 업무들을 해결하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도구이다. 왜냐하면 각 사건들과 이에 대한 과업을 분석하여 더 중요한 일들을 가려내는 것보다 그저 빠른 시간내에 일을 단순 처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나중에 내가 책임감을 요구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면 FS가 빛을 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될 수록 한정된 시간 속에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계된 관계자들과의 업무와 의사소통의 처리 등도 중요해지게 되는데, 이들 모두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Big Rocks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 하기 때문이다.       

 

FS와 GTD의 차이점은 대략 이러하다. 이 둘은 완전 다른 방법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고민 중이다.

GTD와 FS를 잘 섞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ZTD라는 게 있다고 하는데 좀더 검토해 봐야겠다.

내 삶을 물 흐르듯이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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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 기니스의 인생 -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을 위한 인생 지도
오스 기니스 지음, 박지은 옮김 / IVP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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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에 대해, 또한 그러한 선택에 대해 '잘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가운데서도 내안에 꿈틀대는 신앙에 대한 '회의'는 내 스스로 점검이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어쩌면 나의 이러한 '회의'는 내 자신이 제대로 된 '회심'의 사건 가운데 있지 않았음을 반증하거나 혹은 충분치 않았음 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또다시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함으로써 신앙과 믿음을 이루어 내야 겠다는 생각을 접어놓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시며, 그분의 '은혜'이다. 그 사실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준다. 즉 그것은 나의 안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달려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분의 때가 이르러야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회의'가 있다는 사실 더이상 나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지금의 내 상태는 영적 구도자의 '여정'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한 목적, 즉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가지고 있음으로(이 목적은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발견하도록 하신 것이다. 내 인생의 경험들, 어린시절뿐만 아니라 특히 경북대 IVF를 통해서 경험했던 신앙적 체험들을 통해서 말이다.) 더이상 세상의 여러 사상과 영적지식 가운데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다.(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지만 말이다. '점검'이 필요하다.) 나는 그분이 부르신 길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다. 나의 인생에는 분명한 부르심과 그에 반응하는 목적이 있으며, 따라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아갈 길이 있다. 또한 이러한 인생에는 우리가 수없이 겪어온 고통과 고난이 여전히 계속될 것이며, 그것 조차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내 인생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를 쫓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분의 '삶'이다. 그분을 쫓음으로써 나는 비로서 '나를 따르라'하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된다. 나의 인생은 더이상 목적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조장하는 '소비를 통한 가치획득'의 허망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다른의미일지는 모르겠으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몸소 실천했던 '자발적 가난'을 살아갈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겠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내가 속한 곳을 지각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이며, 그러한 지각된 사실은 나를 평안케 한다. 아마도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뭐랄까, 특별한 감정의 요동침이나 변화는 없으나 머리가 맑아지고 알 수 없는 확신이 가득차는 듯하다.
  허나 기억하자. 인생은 말이 아니라 '삶'이다. 또한 C.S. 루이스가 말했듯 '나의 존재'는 곧 '나의 행동'이다. 앞으로의 나의 삶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 내 인생의 '당면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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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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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청춘의 문장들'은 꽤나 신선한 구조의 책이다. 갑자기 나는 왜 시작부터 신선한 구조라고 이야기 하는 걸까.  
 
이 책은 제목처럼 작가의 젊은 시절 - 이 책을 낼 시점에도 그는 30대로 여전히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 을 기억하며 그 때 자신을 사로 잡았던 문장들 - 아니, 문장 속에 자신의 젊음과 청춘이 묻어들어간 것이리라 해야 옳다!  - 을 기록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작가가 뽑은 문장에다가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덧붙여 놓은 구조를 취하고 있다.
 
나는 이런점이 신선하다고, 이런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어느 책에도 이런 구조의 책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훗날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 책의 독특한 구조를 빌려오고 싶다. 나의 이야기를 담담히 적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순간이라도 - 힘들거나 어렵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 - 책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 깨달음
나는 나를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을 '자신'으로 받아들이자. '눈치'보지 않기를... 

[기억에 남는 문장] 

p.5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 청춘이란 시간은 재빨리 지나가지만, 그 영향은 평생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25살의 뜨거운 여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p.9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니깐.
 
-> 때로는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한 문장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아니,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 존재의 무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무게' 말이다.
 
p.28
자유. 아침에 늦게까지 잠잘 수 있는 자유. 내 멋대로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자유. 며칠씩 술을 마시고 쏘다녀도 잔소리 듣지 않을 자유. 그 자유는 감미로웠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소중한 것은 스쳐가는 것들이 아니다. 당장 보지 않아도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들이다. 언젠가는 그것들과 다시 만날 수밖엔 없다.
 
-> 그렇다. 소중한 것은 그저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것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스쳤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아마 소중한 것이 아닐까. 내가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인연이 되는 것일려나... 

 p.96
세상에 똑같이 생긴 돌이 없듯이 같은 유형의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유형일 뿐 입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여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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